몽중몽
물과 하늘 사이 이어지는 몽환적인 세계에 들어선 블랙핑크.
‘블랙핑크’를 춤추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살금살금 다가가 섹시한 바이브의 음악을 틀면 된다. 셀레나 고메즈나 션 킹스턴 혹은 캐시 음악이 효과적이다. 부지불식간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틀어도 된다. 사진을 찍다가도, 구두를 신다가도, 미래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하다가도, 하던 일을 멈춘 채 몸을 흔드는 블랙핑크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멤버 두 명 이상 모여 있다면 R&B 장르가 코믹으로 바뀌기도 한다. <보그> 촬영장에서 12시간 동안 블랙핑크를 관찰한 후 도출한 결론이니 믿어도 좋다. 제니도 인정했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아기 때부터 어디선가 노래가 흘러나오면 춤을 췄다.
오대양 육대주에 부족한 바이브를 전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듯한 블랙핑크는 세계 음악 신의 중심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는 핑크빛 토네이도 같다. 힙합을 베이스로 한 데뷔곡 ‘휘파람’, ‘붐바야’를 발표한 후 ‘불장난’, ‘마지막처럼’, ‘뚜두뚜두(DDU-DU DDU-DU)’, ‘Kill This Love’까지 ‘블랙핑크 팝뮤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음악을 발표해왔다. 블랙핑크의 특별함은 각자 도드라지지만 블랙핑크로서 조화롭다는 지점에 있다. 메인 보컬, 래퍼 등 담당이 있지만 어느 파트에도 편중하지 않는다. 군무를 선보이지만 무대를 즐기는 멤버 개인이 보인다. 빈틈이 없는 스타일링으로 무장한 채 스웩을 전하는 블랙핑크의 음악은 팝뮤직의 긍정적 효과를 그대로 따른다. 맥박을 경쾌하게 뛰게 하는, 활발한 에너지의 선사다. 데뷔 5년 차.
블랙핑크는 ‘뚜두뚜두’ 뮤직비디오 유튜브 조회 수 1,045,989,715회처럼 뒤로부터 하나씩 세어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기록 제조자가 됐다. 본인들도 이토록 긴 숫자에 놀란다. 숫자를 본 지수는 “우와!”, 리사는 “신기해요!”라고 반응했다.
K-팝에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전문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건 사실이지만 블랙핑크 색깔을 만드는 건 역시 멤버들이다. 지수에게는 중심을 잡는 청아한 목소리가 있다. 제니에게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스웩이 있다. 포크를 듣고 자란 로제에게는 감성을 자극하는 보컬이 있다. 댄스 팀을 했을 정도로 춤을 좋아하는 리사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총합이 블랙핑크는 아니다. 제니의 생각은 이렇다. “제 역할을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이 멤버가 보컬을 더하고 이 멤버가 춤을 더하는 건 아니라고 여겨요. 각자의 에너지를 더해 블랙핑크의 조화가 완성되는 듯해요.” 연습생 시절 다양한 장르를 연습한 지수는 어떤 장르든 블랙핑크 빛깔로 선보이길 원한다. “블랙핑크가 하면 이렇게 달라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 색깔로 소화해내는 게 재미있어요.”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흡입력 있는 무대라는 평가에 지수는 이렇게 말했다. “‘멋있네’ 하고 봤는데 다음에 ‘어? 이게 더 멋있네?’ 이러면 뿌듯할 것 같아요. 우리 무대를 쭉 봤을 때 누가 봐도 하나도 건너뛰지 않고 볼 만큼 재미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
블랙핑크는 올해 컴백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현재 공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다른 자극을 일부러 피해 다닐 만큼 골몰해 있다. “해보고 싶었던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앨범 작업 시간이에요. 각자 갖고 온 아이디어로 전체적인 그림을 조율해요. 뮤직비디오의 경우 각자의 장면에는 각자의 의견이 다 들어가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영화를 봤는데 이런 장면을 해보고 싶었어’ 같은 식으로 진행되죠.” 지수의 얘기다. 그런가 하면 제니에게 가장 즐겁고 치열한 과정은 비주얼 작업이다. “음악 작업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뮤직비디오 관련 미팅을 해요. 그때 노래의 확실한 색깔이 잡혀요. 하나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노력을 많이 하죠. 그 시간이 되면 뇌를 제일 많이 쓰죠.” 비주얼 디렉터이자 <보그>와 함께 지드래곤부터 블랙핑크까지 슈퍼 뮤지션들의 스타일링을 맡아온 지은 역시 증언했다. “뮤직비디오 작업할 때 각자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와요. 저는 그 이미지를 옷으로 풀어주는 것만 돕죠.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요.”
비주얼에 대한 멤버들의 치열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패션으로 이어진다. 사실 블랙핑크 음악의 특별한 요소는 패션이다. 단지 하이패션을 무대의상으로 스타일링하거나 화보를 찍거나 사복 차림에서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블랙핑크는 자신들의 음악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패션을 선택해왔다.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어느 디자이너의 말처럼 패션으로 음악과 자신을 드러내왔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새로움을 환기하고 누군가에게는 공감각적 쾌감을 선사하며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새로움을 즐기는 태도는 하이패션 브랜드가 블랙핑크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과거 제인 버킨과 에르메스의 동행처럼, 제니퍼 로페즈와 베르사체의 협력처럼 멤버들에게도 영감을 주고받는 브랜드가 있다. “적당한 새로움과 적당한 저의 색깔을 혼합해 누가 봐도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샤넬 패션쇼에 늘 초대받는 제니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옷 입는 걸 좋아했는데 일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아요. 어떻게 보면 분야가 다른데 통틀어서 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스타일링에 관한 멤버들의 의견은 협력으로 이어진다. 권해주고 북돋아준다. “리사에게 너만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조언하곤 해요. 리사의 스타일링을 상의할 때 의견이 가장 많이 나와요. 정말 리사만 할 수 있는 스타일링이 있거든요. 덕분에 리사가 새로운 도전을 많이 하는데 참 멋있어요.” 3월호 <보그>에 디올 뷰티 화보도 촬영한 지수가 말했다. “‘우리 팀엔 이런 애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얼마 전 로제에게는 인생 원피스가 생겼다.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원피스를 입었는데 어느 하나 걸리는 부분 없이 매우 편하게 공연할 수 있게 도와줬어요. 바람에도 잘 날렸죠. 우리에게 옷은 정말 중요해요. 옷이 주는 핏이 동작에 영감을 주고 무대에서 자신감을 주니까요.”
지난 한 해 블랙핑크는 해외 투어에 집중했다. 방콕, 자카르타, 홍콩 등 아시아에서 시작해 로스앤젤레스 등 미주,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등 유럽을 거쳐 시드니까지 세계 일주처럼 대도시를 순회했다. 1년의 시간은 여행이자 발전이자 증명이었다. “체력이 확실히 늘었어요.” 지수가 웃으며 얘기했다. “데뷔 초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때는 무대에서 긴장해 하나하나 힘을 줬죠. 공연하다 보니 여유가 생기고 팬들과 즐기듯 할 수 있어 후반부로 갈수록 즐거웠어요.” 미국 투어 순위 29위에 오르는 등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는 블랙핑크에게 도약의 기회가 됐다. “예전부터 코첼라 페스티벌에 너무너무 가고 싶었어요. 분위기와 바이브가 좋아서요. 우리는 짜인 공간에서 짜인 것들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코첼라에서는 정말 자유로웠거든요. 정말 엔도르핀이 솟았어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영감도 많이 얻었어요.” 로제는 코첼라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다. “무대에 올랐을 때 눈앞에 연습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니까요.” 블랙핑크는 코첼라 무대에서 원곡 그대로 한국어로 1시간 30분간 공연했다. “우리를 모르는 분들도 계셨을 거예요. 제 친구가 공연을 보러 왔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블랙핑크가 누구지?’ 하면서도 신나게 즐겼다고 해요. 음악과 무대로 통한 느낌을 받아 정말 기뻤어요.” 그 순간을 기억하는 리사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무대에 오를수록 경계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콘서트에 오시는 분들의 나이와 국적이 모두 다르거든요. 우리 음악과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정말 다양한 분들이 와주시고 응원해주시니까 하나가 된 느낌을 받았어요.” 지수 역시 코첼라 모먼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블랙핑크와 인터뷰하는 사이,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블랙핑크야말로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었 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건 구글 번역기가 아니라 콘텐츠이고 그 안에 담긴 예술이다.
블랙핑크는 블랙핑크로 하는 활동이 가장 즐겁다.
<보그>가 창조한, 핑크빛 천둥이 치고 파란 안개꽃이 무성한 꿈의 세계에서 멤버들은 손목에 필름 카메라를 걸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어여쁜 작은 새들처럼 쉼 없이 웃었다. “멤버들 가치관이 재미있어요. 특히 지수 언니는 계속 장난치고 개그를 던지니 아주 재미있어요”라며 리사가 파란 안개꽃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외 투어는 우리끼리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넷이 노는 게 진짜 재미있으니까요. 넷이 무대에 올라가면 무척 든든해요. 믿을 만한 오른팔, 왼팔과 함께 있는 느낌? 저까지 자신감이 생기죠.” 지수의 표정에도 만족스러움이 드러났다. 지금 <보그> 촬영장에서 모습처럼 블랙핑크는 사진을 찍으며 시간 보내기를 가장 좋아한다. “맛집도 찾아다니고 ‘뭐가 유행이래!’ 그러면 같이 몰려가요.” 리사의 그 큰 눈동자가 더 커졌다.
트위터에는 블랙핑크 어록 계정이 있다. ‘개념 인터뷰’로 불리는 답변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꿈을 향해 간다는 것,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것. 시대는 이런 노력을 유행이 지난 가치로 취급하지만 블랙핑크의 인터뷰는 방향성 없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없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로부터 받는 관심의 크기를 멤버들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블랙핑크는 어떤 가능성일 수 있다. “지난해에 해외 투어를 돌고 여러 가지 새로운 일을 경험했어요.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됐어요. 굉장히 높은 계단을 올라갔죠.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재미있고 멋있게 다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좋아요. 앞으로도 꾸준히 상상만 하는 것들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멋있는 음악 하면서 좋은 무대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무엇을 하든 분명한 제니가 여전히 분명하게 의견을 전했다. “우리끼리 ‘자신감을 잃지 말자. 서로가 있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보자’고 얘기하곤 해요. 우리를 보는 팬들도 자신감 잃지 않고 당당하면 멋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하셨어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제가 결정하게 하셨거든요. 앞으로도 제가 결정하고 살려고요.” 이 문장은 밀레니얼 세대의 특권을 만끽하고 있는 지수의 얘기다. 로제는 “가수로서는 음악이 우선이지만 사람으로서는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최근에 채영이(로제)가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최대한 도전해보고 재미있게 살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동의했어요”라고 리사가 곁에서 덧붙여 말했다.
블랙핑크를 촬영하기 위해 뉴욕에서 서울에 온 사진가 페트라 콜린스는 폭넓은 여성을 제시하기 위해 소녀들을 주체적인 눈으로 기록해왔다. 블랙핑크는 페트라 콜린스의 사진을 SNS에서 봤다고 말했다. 감성이 좋았다는 느낌까지 덧붙였다. 사실 그런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느껴지는 것이다. 소녀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제니는 답했다. “제가 아직 소녀라고 생각해요. 소녀다운 걸 좋아하고 딱히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어요.” 의존적이거나 나약한 소녀는 <보그>의 꿈의 동산에 없었다. 페트라 콜린스의 렌즈에 담긴 블랙핑크는 자유롭고 솔직했다. 그녀들의 오늘은 사진에, SNS에 기록되었다. 이제 곧 터치 한 번이면 전 세계에 퍼져나갈 것이다.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남현지
- 피처 디렉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페트라 콜린스(Petra Collins)
- 스타일리스트
- 지은
- 에디터
- 허보연, 권소정
- 헤어
- 이선영
- 메이크업
- 이명선
- 네일
- 박은경(Unistella)
- 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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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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