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기쁠 희(喜), 착할 선(善).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 ‘톱스타’와 같은 의미로 통하도록 만든 건 오직 김희선의 재능과 능력이었다. 20여 년 동안 김희선은 유연하게 생존했고 변함없는 영향력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돌려줬다. 시대가 선망하는 여전한 스타는 재기 발랄하게 살면서, 우리 여자들에게 주도적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김희선은 청담동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앤티크하거나 모던한 가구가 불규칙적이지만 조화롭게 놓여 있으며 샹들리에가 늘어진 카페였다. 청담동 부흥기를 이끈 이곳을 이제 김희선은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딸과 허니 버터 브레드를 먹으러 오곤 한다. 촬영장을 벗어난 김희선은 스팽글 로고 장식의 블랙 티셔츠, 실크 팬츠 차림이었다. “우리 뭐 좀 먹으면서 대화할까요? 배고파요.” 김희선은 치즈가 포근하게 녹은 새우 그라탱을 주문했고 금세 테이블에는 생크림이 폭포처럼 떨어진 팬케이크와 갓 갈아낸 싱싱한 수박 주스가 차려졌다. 청담동 카페는 왜 김치볶음밥이 가장 맛있는지 묻자 김희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참 안 어울리죠? 장소에 따라 인터뷰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군요. 스튜디오에서는 형식적인 말을 많이 하는데 이런 카페는 편안한 얘기가 나오죠.” 20여 년 넘게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던 청량한 목소리가 카페 한복판에 울려 퍼지자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청담동 사람들도 우리 테이블을 흘긋거렸다. 김희선은 드라마 <앨리스> 촬영을 마치고 일상으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마지막에 촬영한 장면은 ‘골목을 돌아서 나가는 선영’이었어요. 골목을 나가는 것까지 찍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비가 악수같이 쏟아졌어요.” 드라마 밖에서도 김희선에게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향이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며칠째 지긋지긋하게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쳐 있었다.
<앨리스>는 “죽은 엄마를 닮은 여자, 감정을 잃어버린 남자의 마법 같은 시간 여행을 그린 휴먼 SF”라는 다소 복잡한 설명을 달고 있다. 김희선은 여섯 살에 미적분을 풀고, 열다섯 살에 대학교에 수석 입학한 천재 과학자 태이 역을 맡았다. 그리고 태이와 얼굴이 닮은 또 다른 인물 박선영을 연기한다. “다시는 천재 역할 안 맡을 거예요.” 캐릭터 설명으로 김희선은 작품에 대한 운을 떼었다. “대사가 너무 어려워요. 하루에도 대여섯 시간씩 물리학자들 유튜브를 봤는데 하루 이틀에 익숙해질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에요. 그런 전문용어를 평소에 쓰는 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연습밖에 없었어요. 자다가도 툭 쳤을 때 나올 정도가 되어야 했죠.” 천재 변호사를 맡았던 <나인룸>에 연이은 전문직 역할이다.
기다란 포크로 통통한 새우를 골라 먹으며 김희선은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분들이 반발할 수도 있는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이에요(웃음). 남한테 피해도 안 주고, 상대가 나한테 피해도 주지 않길 바라죠. 저와 태이가 진짜 다른 점은 제게는 정이 있는데 태이는 그게 없다는 거예요. 태이는 자기 말을 이해 못하는 친구들을 이해 못한다니까요(웃음).”
시간 여행 같은 소재는 흥미롭지만 다른 드라마에서 여러 번 선보이지 않았느냐고 내가 묻자, 그래서 이제 우리 드라마가 나와야 할 때이며, 다른 드라마가 시행착오를 보여줘서 개념 이해가 편할 것이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늘어놓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 드라마를 좋아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배신하지 않는 드라마가 될 거예요.” 게다가 김희선은 <앨리스>를 ‘최신 신파’로 소개했다. “큰 소재는 시간 여행이지만 큰 그림은 모성애예요. 시간 여행을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하죠. 사실 신파가 있어야 가슴에 와닿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한국인의 가슴에는 다 한이 있고 정이 있잖아요.”
신파의 본질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김희선은 본능적으로 그 본질을 꿰뚫는 배우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김희선의 연기 인생이 곧 한국 드라마사의 일부였다. 분방한 신세대, 발랄한 캔디형, 청순가련형, 커리어 우먼, 그리고 8월 말 방영 예정인 장르물 <앨리스>까지. 김희선이 연기한 캐릭터만 살펴봐도 여성 캐릭터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김희선은 남자들의 관심을 끄는 캐릭터도 맡았지만 그 속에서도 남자에게 보호받는 여자 캐릭터의 전형성을 깨기도 했다. 데뷔 때부터 주인공이었던 그녀에게 온전히 감정 이입하며 드라마를 보지 않은 여자들이 몇이나 될까. 김희선은 세기의 미녀 배우로 이름 높았지만 아름다운 외모란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작품으로 보여줬다.
급변하는 드라마 트렌드 한가운데 어떻게 유연하게 적응했는지 내가 질문했다. 그러자 잠시 과거를 떠올려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딱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그때는 작품을 고르는 데 사회적 영향이 컸어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메시지를 얻어야 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IMF 때였죠. 그래서 캔디형 캐릭터가 대다수였어요. 만날 얻어터져도 울지 않고 칠전팔기했어요(웃음). 사실 정치적 색깔이 들어간 드라마나 장르물은 방송사에서 편성을 받을 수도 없었죠.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였어요. 만약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여러모로 다양한 역할을 시도했을 것 같아요.”
넷플릭스나 웹드라마로 데뷔했다면 김희선의 필모그래피는 그야말로 온갖 인물 군상의 집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악역 이야기가 나오자 김희선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고 그 크고 예쁜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사실은 악역이 너무 재밌어요. 대본을 읽을 때부터 짜릿하죠. 예를 들어 <미스터 Q>의 송윤아 언니 같은 역할. 디자인 실장으로 나와 만날 예쁜 옷도 입고 헤어스타일도 바꿨죠. 전 만날 머리 질끈 묶고 추리닝 입었는데.” 관객으로서 취향은 마블이라는 비밀도 덧붙인다. “극장에서도 로맨틱 코미디는 잘 안 봐요. <엑스맨>,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를 좋아해요.”
대한민국 경제는 시련의 시절을 통과했고 시대는 배우를 다시 예술의 영역에 돌려놓았다. 국민의 정신 수양을 짊어지던 김희선 개인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결혼했고 아기를 낳았으며 6년간 공백이 흘렀다. (결혼하면 은퇴할 것이라 선언하던 과거 인터뷰도 정말 톱스타다웠다.) 책무가 아닌 배우로서 원하는 캐릭터를 선택하기 시작한 시기도 그때부터다. “6년간 쉬고 선택한 작품이 <신의>예요. 오래 쉬고 나오려다 보니 자신감이 많이 없었죠. ‘역시 김희선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봐줄지 불안했어요. 상대역이 이민호 씨인 것도 부담이었어요. 너무 잘나가는 배우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쉬다 나온 배우. <신의>는 열심히 했지만 많이 부끄럽게 시작한 작품이에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죠.” 우려와 달리 결과적으로는 탄탄한 마니아를 많이 양산한 작품이다. 그때부터 김희선의 커리어도 다양하고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갔고 말이다. “당시에 디시 갤러리가 처음 생겼던 기억이 나네요. 예전 팬 카페 분위기와 달리 굉장히 터프하더라고요(웃음). 하루는 명동에서 사인회를 했는데, 멀리서 갓을 쓴 스님 수십 명이 다가오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제가 <신의>에서 쓰고 나온 갓을 쓴 팬들이었죠(웃음). 그렇게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어요.”
이후 김희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1년에 한 편씩 새 작품에 출연했다. <참 좋은 시절>에서는 가족사 한복판에서 자기 인생을 꿋꿋하게 일구는 여성, <앵그리맘>에서는 학교 폭력에 맞서는 교복 입은 엄마였다. 그리고 <품위있는 그녀>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구축해온 이미지, 쌓아 올린 연기력, 다른 차원으로 돌입한 외모까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이 작품으로 김희선은 엔터테인먼트로서 재미와 인간의 욕망에 대해 통쾌한 통찰을 남겼다. 김해숙과 영혼 체인지가 일어난 변호사 역할을 맡았던 <나인룸>은 장르물 배우로서 가능성을 증명했다. 흥미로운 건 작품 종영 때마다 ‘김희선의 재발견’이라는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외모, 패션, 행보 등 사실 ‘시대의 아이콘’ 김희선에게는 연기력보다 화제가 되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오히려 대중이 그녀의 연기를 차분히 지켜볼 준비가 된 적이 없었다. “28년째 재발견이래요. 제2의 전성기는 여덟 번쯤 왔나 봐요(웃음). 그 말을 듣고 처음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예전에도 연기를 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재발견이라니요. 하지만 작품마다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그렇게 표현해주시는 거겠죠. 이제는 그런 평가가 정말 좋아요.”
사실 김희선은 자신의 연기와 열정에 대해 설명이 많은 편이 아니다. 언제 준비했나 싶게 등장해서는 김희선이 아닌 배우가 떠오르지 않는 연기를 해내곤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어릴 때도 공부 안 했는데 시험 잘 보는 애가 되고 싶었죠. 그래서 교과서도 일부러 깨끗하게 뒀어요. 그런 면이 연기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따로 감정을 잡지 않아도 현장에서 슛 들어가면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웃음).”
3년 전 <보그> 인터뷰 당시 열여섯 살에 연기를 시작한 동기로 “서태지 오빠 보려고”라고 답한 그녀다. 테이블에 물잔이 빌 때마다 종업원은 눈빛을 건네고 물을 따라줬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김희선은 노력형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배우들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과학적으로 배가 부르면 행복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눈물이 안 나온대요. 실제로 우는 장면이 있으면 이틀을 굶는 배우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굶으며 일하면 눈물이 아니라 화가 나요(웃음). 슬픈 신이 있다고 어두운 음악을 틀고 감정을 잡으면 정작 슛 들어갈 때 힘이 빠져서 못해요. 그냥 각자 다른 거죠.” 촬영이 끝나는 순간 배역도 완전히 내려놓는다. 연기에 인생 전부를 거는 듯 보이지 않지만 연기하는 캐릭터로 기어코 대중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야 마는 배우가 김희선이다. 우리의 대화는 바뀐 촬영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몇 날 며칠씩 밤을 새워서 촬영했다면 52시간 근무제로 이제는 일상생활도 유지하면서 작품에 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캐릭터에 빠져들려고 하면 하루 쉬고 그래서 초반에는 적응이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사실 이렇게 촬영하는 게 옳죠.”
시대의 아이콘, 28년 경력의 배우,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로서의 삶을 보며 스타는 타고날 수 있지만 스타로 남는 건 본인의 몫임을 실감한다. 20여 년 동안 그 산업 안에서 유연하게 생존했고 변함없는 자신의 영향력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돌려주고자 했다. 김희선은 경쾌하고도 재기 발랄하게 살아가면서, 여자들에게 주도적인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죽을 때까지 배우를 하겠다거나 연기가 주는 환희에 대해 찬양한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대중 곁에 함께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 꾸준한 동력에 대해 내가 궁금해하자 김희선은 ‘불가항력’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건 제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하는 거지,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안 하고 싶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나하나 해왔기에 이렇게 지금 제가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방영한 어느 단막극 제목은 <남편한테 김희선이 생겼어요>였다. 기쁠 희, 착할 선.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 ‘톱스타’와 같은 의미로 통하도록 만든 건 오직 김희선의 재능과 능력이었다. 김희선의 본업은 배우지만 스타다.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온전하게 공존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곱창밴드, 머리띠, 구슬밴드, 실핀 등 김희선이 방송에서 착용하고 나와 창조한 ‘유행’은 그녀가 동경과 갈망을 끌어내는 특별한 힘이 있음을 증명한다.
1990년대 패션 세계에서 김희선이 퍼뜨린 건 리본, 프릴 등 이른바 ‘공주풍’이라 불리는 빅토리안 스타일이다. 당시 ‘오브제’ 디자이너 강진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김희선이 오브제의 뮤즈였다고 밝힌 적 있다. TV에서 김희선을 본 순간, ‘김희선을 위해 이 큰 리본을 만들었구나’라는 걸 깨닫고 옷을 보냈다고 말이다. 그렇게 김희선은 자기 얼굴보다 큰 리본이 달린 오브제 옷을 입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 MC로 나왔다.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극도로 로맨틱한 브랜드 오브제는 김희선이 착용하는 순간 어떤 예술이 됐다. 그 전에도 김희선이 입으면 어떤 옷에서도 ‘여성성’이 극대화됐다. 그녀는 정말이지 현대에 환생한 공주 같았다. (나는 코끝에 자리한 일명 ‘미인점’이 그 증표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김희선은 미인점까지 유행시켰다.) 한국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전성기를 끌어낸 것도 김희선이다. 오브제부터 앙드레김까지 패션계는 그야말로 김희선을 열렬히 사랑했다. 2017년 <품위있는 그녀>의 우아진 스타일은 파격을 키워드로 20대를 보낸 패셔니스타만 선보일 수 있는 화려하고도 우아한 스타일이었다. <보그> 편집장은 당시 “‘마드모아젤’이 ‘마담’으로 돌아왔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희선은 동그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여전히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지만 평소 옷차림은 실용성을 띤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김희선의 창백한 레드 네일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김희선 하면 떠오르는 맥시 스커트와 블라우스, 카디건을 즐겨 입죠. 청바지에 면 티셔츠를 입을 때도 있고요. 편한 옷 위주로 입어 레이어드해서 입는 건 잘 못해요. 조금 보이는 옷자락을 위해 세심하게 챙겨 입는 정성이 부족하죠.”
사람들은 여전히 김희선을 선망하지만 과거와는 종류가 다른 환호를 보낸다. 꾸준히 이어오는 커리어에 호감을 표한다. 하지만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과거를 돌아볼 때 김희선은 다소 복잡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인터뷰할 때 가끔 ‘<토마토> 때 정말 대단했잖아요’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서글프기도 해요. 지금도 아주 좋지만 누구나 다 시간이 흐르면서 들어오는 작품이나 역할이 한정될 수밖에 없잖아요. 이경영 선생님이 ‘모든 배우는 조연으로 돌아온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컨텐츠가 너무 많아져서 아무리 드라마가 잘되어도 예전 같은 시청률이 나올 수 없어요. 다시는 그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요. 어떨 때는 이런 지금이 좋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우울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도 있을 수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배우가 소위 톱스타 자리에 오르면 충만한 선택지 속에서 스타 개인은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 드라마 외에 극도의 노출을 꺼린다. 하지만 인상적이게도 김희선은 공백기를 제외하면 대중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발랄하게 생동했다. 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고 <화신>, <토크몬> 등 토크쇼에서 활약했으며, 예능 프로그램의 트렌드가 리얼리티로 바뀐 후에는 여행용 트렁크에 술을 반쯤 채우고 섬으로 들어갔다. (<섬총사>에서 할머니들과 정을 나누고 출연자들과 수다를 떨던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타고난 스타는 대중의 관심을 공기만큼 자연스럽게 여기는 듯 보였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김희선은 김희선이라는 신인류였다. 왜 신비주의를 시도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희선은 “지금은 신비주의 했다가 잊히죠”라며 깔깔깔 웃는다. “만약 제가 솔직함을 주 무기로 내세웠을 때 안 먹혔으면 예능 프로그램에 안 나갔을 것 같아요. ‘아니, 쟤는 여자애가 어떻게 방송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어?’ 했다면 옛날에 접었겠죠. 그런데 그땐 저 같은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신선하게 봐주셨어요. 신비주의는 제가 힘들었을 거 같아요. 술 마시기도 좋아하고, 돌아다니기도 좋아하는데 어떻게 신비주의를 해요. 거짓말하면 늘 들키고요. 그걸 일찍 안 거죠.“ 솔직한 김희선은 40대의 아름다움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도 “말씀은 고맙지만 이제 아줌마인데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자꾸 그렇게 말해서 힘들어요(웃음). 작품에서는 그런 역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작품에 더 열심히 임하게 돼요. 하지만 사실인데 굳이 말하지 않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아요.”
김희선에게는 이상한 책임감이 몇몇 있다. 인터뷰하는 기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중 하나다. 인터뷰가 끝나고 재미있었냐, 좋았냐고 묻는 여배우를 적어도 나는 본 적 없다. “제 안에 개그 코드가 있나 봐요(웃음). 엄마 아빠가 절 늦게 낳으셨고 외동딸로 혼자 자랐어요. 나이 드신 엄마 아빠를 늘 재미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한번은 엄마 립스틱을 꺼내 발랐는데 고모들이 ‘어머, 희선이 예쁘다’ 했대요. 그러고 나서부터 제가 그 립스틱을 또 바르더래요. 어르신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인터뷰할 때도 그 습관이 나오는 거죠. 이건 버릴 수도 없어요. 너무 오래돼서.”
드라마 <앨리스>는 시간 여행이 가능한 시점을 2050년으로 설정해두었다. 막연한 미래를 떠올리면 어떤 모습인가 물었을 때 김희선은 “밥집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작품이 끝나고 나면 생각이 많아져요. 그림을 그려볼까? 사진을 찍어볼까? 하지만 언젠가는 밥집을 열고 싶어요. 여러 사람과 만나고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진짜 좋아요. 아, 물론 요리는 전문가에게 맡겨야죠(웃음).” 타고난 스타 김희선은 밥집을 운영하면서도 브라운관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경신해나갈 것이다.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시대에는 그런 스타가 한 명씩 등장하는 법이다.
운명을 믿느냐고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김희선은 ‘반반’이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사실 별로 노력도 안 했는데 몹시 사랑받은 적도 있고, 정말 보여줘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잘되지 않았던 적도 있어요. 이제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것뿐인 것 같아요. 만약에 다시 이 생활을 하겠느냐고, 지금의 김희선으로 이 수순을 밟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할 것 같아요. 악플도 많고 연기력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저는 제가 겪은 이 모든 상황이 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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