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키아라는 소우주 앞에서
“물감 자국이 있는 파란색 아르마니 수트를 입고 있었어요. 너무 말라서 뼈만 남은 그의 몸에서 수트가 헐렁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신발은 신지 않은 채였죠. 온통 물감 범벅이었어요.” 책 <바스키아의 미망인>을 써낸 제니퍼 클레멘트는 비싼 조르지오 아르마니 수트를 입고 그림을 그리는 그 유명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바스키아는 아르마니 수트만 함부로 취급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그림조차 아무렇게나 대했다. 그가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여자 친구 수잔 멀록의 집에 살 때 바닥에 널브러진 그림엔 그가 밟고 다닌 운동화 발자국이 덕지덕지 나 있었다. 심지어 그 운동화 자국의 색과 형태로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영화 <바스키아>를 만든 영화감독이자 화가인 줄리안 슈나벨은 이렇게 말했다. “바스키아만큼 자기 작품을 물리적으로 학대한 작가는 없어요.”
뉴욕의 길거리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바스키아는 문짝이나 창문, 거울, 냉장고 등 아무 데나 그림을 그렸다. 당시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지만 거리에서 주워온 깡통, 유리 창문, 나무 패널 등은 그의 정체성과 같았다. 그는 1970년대 후반 학교를 그만두고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뉴욕의 길거리에 그래피티를 그리고 다녔다. “하루 종일 길 위에 서서 똑바로 살라고 소리칠 순 없으니 벽에 글을 쓴다”는 게 그가 그래피티를 그리는 이유였다. ‘소위 말하는 아방가르드를 위한 세이모’, ‘경찰의 종말로서의 세이모’ 등등 급진적이고 반체제적인 메시지는 세이모를 하나의 문화 예술 운동이자 예술 그룹으로 각인하는 선언이었다. 잠은 톰킨스 스퀘어 공원의 벤치에서 잤고 돈은 그림을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팔아 벌었다. 엽서를 사간 사람 중에는 앤디 워홀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와 의도된 그래피티, 상품 광고가 뒤섞인 길거리의 미학처럼 바스키아의 작품에서도 이질적인 것이 한데 뒤섞여 새로운 감흥을 만들어낸다. 텍스트와 그림, 만화와 순수 미술, 음악과 해부학, 개인적 역사와 거대한 미술사가 때로는 장난기 넘치게, 때로는 심오하게 섞였다. 밀로의 ‘비너스’, 마네의 ‘올랭피아’, 레오나르도 다빈치, 빌럼 데 쿠닝과 잭슨 폴록 등 미술사의 위대한 그림과 배트맨, 슈퍼맨, 뽀빠이, 야구 선수 행크 아론,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 등이 그의 그림 안에서 평등하게 등장한다. 저급한 것과 고상한 것, 의도된 것과 우연한 것, 기성의 것과 즉흥적인 것이 충돌하며 고지식한 경계는 무너진다. 그는 포스터나 잡지, 시리얼 상자의 이미지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 일상의 물건을 그림에 조합하는 아상블라주, 자신의 작품을 복사해 재사용하는 제록스, 텍스트를 잘라내고 재배열하는 윌리엄 버로스의 컷업(Cut-up) 기법을 활용했다. 글자도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블루스, 범죄, 광대, 총알, 해골, 유명한, 호텔, 왕, 자유, 흑인, 우유, 경찰, 설탕, 치아, 비누, 엉덩잇살, 핫도그, 가짜’. 내러티브의 논리적 흐름은 파괴되고 의도는 미스터리한 수수께끼가 되었으며 우연성의 가치는 확대됐으며 즉흥적인 리듬감이 만들어졌다. 마치 재즈처럼. “어떻게 그리나?”라는 질문에 바스키아는 조금 재수 없게 “그건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어떻게 연주하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라고 말했다.
바스키아는 영감을 얻기 위해 반나절을 기다리는 인내심 많은 예술가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8년간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뭔가에 쫓기듯 작품을 마구 만들어냈고 다양한 기법을 마구 실험했으며 그가 알고 있거나 보거나 경험한 모든 것을 작품 안에 마구 쏟아부었다. 거기엔 찰리 파커, 지미 헨드릭스 같은 뮤지션에 대한 동경, 만화가의 꿈도 포함됐다. 그의 그림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체 해부도와 미술사의 흔적은 어린 시절 당한 교통사고와 엄마와 함께 방문한 미술관 순례와 관련이 있다. ‘Grey’라는 이름으로 밴드 활동도 했으며 디제잉도 했고 라멜지와 K-Rob의 음반을 제작하고 커버에 직접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블론디의 ‘Rapture’ 뮤직비디오에도 등장했으며, 1987년 꼼데가르송 런웨이에도 올랐으며, ‘Man Made’라는 이름으로 핸드 페인팅 의류를 만들었다. 힙한 건 다 했다. 힙해 보이기 위해, 힙하지 않은 척하는 태도도 보였다. 좋아하는 책을 묻는 질문에 “마크 트웨인”이라고 말한 뒤 “사실은 윌리엄 버로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버로스를 읽고 있다고 하면 어린애처럼 보일까 봐 그렇게 말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언론에 끊임없이 가십거리를 준다는 것도 인지했다. 그는 TV나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껌을 씹으며 작업했다. 그를 위해 갤러리 한구석에 작업실을 내준 아니나 노세이는 “하루 종일 라벨의 ‘볼레로’를 틀어놓고 작업하는 바스키아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성공과 명성에 대한 바스키아의 강박을 대변한다. 친구들은 매일 밤 파티와 클럽에 가는 그가 언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놀라곤 했다. 퇴근한 조수에게 바스키아는 전화해 다시 작업실로 오라고 하기 일쑤였다. 경쟁심과 승리욕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금의 혹평도 견디지 못했다. 바스키아는 스타였다.
1988년 8월 12일 친구와 런 디엠씨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날, 바스키아는 만 27세로 숨을 거둔다. 사인은 약물 과다였다. 부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악의적 제목도 있었다. ‘벼락 성공과 명성의 위험’. 담배를 사기 위해 길거리에서 75센트 받고 그림을 팔던 그가 휘트니나 가고시안의 화이트 큐브에 그림을 전시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언론은 끊임없이 앤디 워홀의 마스코트로 바스키아를 다뤘다. 사실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뉴욕의 길거리에서 택시 잡기도 힘들었다. 뉴욕에서 자랐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중문화와 미술사의 기호를 작품에 끊임없이 차용하는데도 평론가와 기자들은 “원시적 미술을 하는 작가”라는 표현과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인심 쓴다는 듯 “검은 피카소”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당시 백인 미술계의 차별은 바스키아를 숨 막히게 했다. 바스키아는 1983년 흑인 아티스트 마이클 스튜어트가 지하철 벽에 그래피티를 그리다가 백인 경찰에게 붙잡혀 맞아 죽은 사건에 충격 받아 ‘Defacement(The Death of Michael Stewart)’라는 작품을 그렸다. 바스키아는 비극적 영웅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죽음과 공포를 지속적으로 작품에 드러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분노하는 지금, 지난해 구겐하임에서 바스키아 전시를 기획한 흑인 큐레이터 차에드리아 라부비에가 인종차별을 당한 사건이 알려진 지금, 그의 작품이 말하는 어두운 메시지는 유효하다.
지금, 바스키아는 흔하다. 제이 지와 카니예 웨스트 등은 걸핏하면 가사에서 그를 언급하는 걸로도 모자라 할로윈 때 바스키아 분장을 하고 나타나며, 슈프림부터 꼼데가르송, 오프화이트, 발렌티노, 최근의 코치까지 디자이너들은 끊임없이 바스키아의 유령을 불러낸다. “제발 바스키아 좀 자게 내버려두라”는 한 네티즌의 볼멘소리가 이해가 될 정도다. 뉴욕을 통째로 집어삼킨 듯한 그의 작품처럼 바스키아는 하이패션부터 스트리트 패션까지, 엄숙한 미술관부터 시끄러운 슈퍼마켓까지 어디나 존재한다. 매력적인 스타 기질, 흑인으로서 갖는 정체성과 시선,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반항, 스트리트 아트와 유스 컬처, 즉흥적인 리듬과 운율 등 바스키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지금 가장 영향력이 큰 스타 디자이너나 음악계 아이콘을 설명하는 문구 같다. 그건 그가 요절해서도 아니고 그가 흑인이어서도 아니고 앤디 워홀로부터 사랑받아서도 아니다. 관성적으로 반복되는 폭력적 시스템과 우리가 사랑하는 대중문화의 가치와 매력을 그가 정확하게 포착했기 때문이고, 아무리 운동화로 밟아도 절대 훼손되지 않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익살과 공포가 담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 과자 박스나 티셔츠 속 프린트 말고 그의 그림을 온전히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바스키아는 여전히 20대의 젊은 모습 그대로다. 모르긴 몰라도, 명성과 인기를 즐긴 그는 이 <보그> 화보를 좋아했을 것 같다. 죽음과 신체 절단에 대한 집착을 담은 해부학 그림 ‘Untitled(Bracco di Ferro)’와 ‘Back of the Neck’과 대조되게 빨간 프린지를 단 구조적인 보테가 베네타 홀터넥 드레스를 입은 모델 신현지가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생동감 넘치는 인체를 재현한 데다, 윌리엄 버로스 방식대로 글씨를 쓰고 지우고 가리고 해체하고 재조합한 그림 ‘Five Fish Species’ 앞에서 기호, 선, 도형, 글씨가 세심하게 배열된 5 몽클레르 크레이그 그린의 대담한 드레스로 마약 중독과 차별적 시선으로 상처받은 그의 몸과 영혼을 부드럽게 감쌌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그가 영원한 잠을 잘 일은 없을 듯하다.
추천기사
-
패션 트렌드
올해 수명이 다한 트렌드와 2025년에도 계속될 트렌드 5
2024.12.16by 이소미, Alexandre Marain
-
아트
뉴욕에서 흙을 빚는 작가, 제니 지은 리
2024.12.05by 김나랑
-
패션 뉴스
더 푸른 바다를 꿈꾸는 프라다와 포토그래퍼 엔조 바라코
2024.12.18by 안건호, Ashley Ogawa Clarke
-
Culture
처음 뵙겠습니다, 영화로 만나는 ‘에드워드 호퍼’
2024.11.29by VOGUE
-
패션 트렌드
디자이너들이 컬러 타이츠로 겨울 룩에 재미를 주는 방법
2024.12.17by 안건호
-
패션 화보
그런지 한 방울, 젠지의 파티
2024.12.15by 김다혜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