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 영감을 받은 예술가 9인
한영수 작가의 사진집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를 펼치면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의 찬란하던 순간이 보인다. 전쟁의 상흔과 시대의 압박에도 주체적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영감을 받아 <보그>와 예술가 9인이 그 시절과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한다.
한영수 작가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는 1950~1960년대 여성들의 사진이 담겨 있다. 공원의 햇살을 쪼이며 신문을 읽고, 목에 카메라를 메고 바캉스에 나서고, 양산과 한복을 같은 꽃무늬로 맞추고 나들이 가는 여자들이다. 그들은 주체적이고 사진은 모던하다. 전쟁 폐허 사이로 보따리를 이고 걷는 어머니에게도 카메라의 시선은 동정이 아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경이가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가 반복 재생하는 전쟁과 빈곤의 희생양 이미지가 아니다.
한영수 작가의 딸이자 한영수문화재단의 대표 한선정은 사진집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전했다. “이런 사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항상 궁금증을 가져왔다. 이 여인들은 누구인가? 한영수가 그의 카메라를 통해 선택한 순간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그리고 당시의 여성은 왜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지 못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이 내가 ‘여성’이라는 주제로 한 권의 사진집을 기획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어느 연로한 여성 팬은 재단에 이러한 감상을 전해왔다. “사진을 보면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나의 즐거웠던 시절을 상기시켜주어 고마워요.” 한영수문화재단이 낸 사진집 <서울, 모던 타임즈>(2014), <한영수: 꿈결 같은 시절>(2015), <시간 속의 강>(2017) 또한 마찬가지다. 한영수의 사진은 피사체를 아래로 내려다보거나, 불행과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과 풍경의 주체성을 담았고, 그만의 구도로 새로운 시선을 제안했다.
작가는 1933년 개성에서 태어나 1999년 작고했다. 그림 그리기, 특히 드로잉을 좋아했지만 집안의 반대를 겪었다. 한국전쟁 후 할아버지의 전기 관련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리얼리즘 사진 단체 ‘신선회’에서 활동하며 사진가로 성장했다. 1963년 프리랜서로 광고 사진을 시작한 뒤에는 1966년 한영수사진연구소를 설립, 한국 광고 및 패션 사진계의 1세대로 활약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근당의 커다란 종 사진이 그의 작업이다. “아버지는 새로운 카메라가 들어오면 바로 구입했듯이 신문물이 들어오면 바로 반응하셨다”는 한선정 대표의 말처럼 그는 1985년 국내 최초로 상업 사진 라이브러리 ‘포토뱅크’를 설립했다. 1986년에는 풍경 사진을 모은 사진집 <우리 강산>을, 1987년에는 한국전쟁 후 서울의 모습을 담은 <삶>을 출간했다. 국제사진센터(ICP,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 한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작품이 소장되면서 2017년 그곳에서 개인전도 열었다(그의 작품은 LA카운티미술관(LACMA)에도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2021년 봄, <보그>는 작가 9인에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서 받은 영감을 작품화하길 제안했다. 모두 사진 매체를 즐겨 사용하는 예술가다. 시간을 뛰어넘어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그렇게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고, 이를 본 독자도 새로운 영감을 얻는 것이야말로 <보그> 27개국이 2021년 3월호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하는 ‘Creativity’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현대의 여성에게 이번 프로젝트를 드린다.
윤정미
제목 덕분인지 흑백사진임에도 분홍색 치마가 연상됐다. 한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며 핑크색만 촬영하는 나의 ‘Pink Pink Pink’ 작품 시리즈가 떠올랐다. 그와 나의 첫 연결 고리는 이처럼 색이었다. 사진집을 펼치고 한영수의 얼굴을 보았다. 매우 젊다. 빛나는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가 촬영한 흑백의 풍경도, 사람도, 한영수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진으로 기억된다. 부재의 기억.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일지 모른다. 어린 시절 또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엄마는 다시 건강해질 수 없다. 엄마는 파킨슨병으로 오랫동안 투병하시다가 지금은 요양 병원에 계신다. 엄마는 결혼 후 7년 만에 큰오빠, 작은오빠, 나를 낳으셨다. 어린 시절 나의 사진을 보면 예쁜 옷만 입고 있다. 엄마의 정성이 느껴진다. 그 시절 분홍색 드레스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드레스를 들고 을지로에 갔다.
과거의 을지로는 재개발로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2000년에 을지로의 가게와 주인들을 사진에 담았다. 2017년에 다시 그들을 찾아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다. 17년 동안 가게는 약간 변했을 뿐이며 주인에겐 연륜이 더해졌다. 어떤 가게는 사라졌다. 언젠가 우리는 사진으로만 예전의 을지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영수가 사진으로 부재를 기억하듯, 나 또한 어린 시절 드레스를 을지로 한가운데 놓고 사진으로 기억한다.
www.jeongmeeyoon.com
신기철
나는 움직임을 고정시킬 수 있는 사진기의 힘을 빌려 사물과 불안에 대해 작업했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짐을 짊어진 여인들이다. 전쟁 이후 1950년대의 낯익은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진가는 누군가의 고된 삶의 순간을 동정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낯선 장면을 발견한다. 자기 몸 반만 한 동생을 힘에 부치지만 둘러업고 빗속에서도 꽃신을 신고 있는 소녀, 한가득 짐 보따리를 머리에 올려놓고도 미소 짓는 여인,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낙네. 이들에게는 자기 연민 없이 오롯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의연함이 있다.
나는 그들의 자세를 봇짐을 통해 형상화한다. 작은 움직임에도 흐트러질 수 있는, 겨우 균형이 유지된 상태로 봇짐을 둔다. 이것은 추락도 안정된 상태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이 마땅히 디딜 곳 없는 현실에서도 삶을 어떻게든 계속해나가려 했던 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여기에 1950년생인 이모와 그녀의 막냇동생인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얻은, 쓸려나간 이엉을 추가해 표현했다. 이모는 삶이 재난이던 시절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때 초가 담벼락의 이엉이 쓸려나갔다. 할아버지는 식모가 된 딸을 어렵사리 찾아냈지만, 어머니에겐 이엉을 뛰어넘은 언니(이모)의 대범함이 깊이 남았다. 자신도 이곳을 뛰어넘어 나아갈 수 있겠다고. 그렇게 어머니는 중학교도, 공장도, 대학도 갈 수 있었다. 지난 시기 흔한 비참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www.shingicheol.com
성지연
2014년 아를 국제사진축제(Les Rencontres de la photographie d’Arles)에서 한영수문화재단의 한선정 대표를 만나고 한영수의 작품 세계에 한창 빠져 지냈다. 이번 사진집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의 표지에는 설레는 연분홍 바탕에 치마를 살랑거리며 나들이 나온 두 여인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한 장이 흑백영화 스틸처럼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사진집을 넘기다가 한 ‘그녀’에 사로잡혔다. 사진 속 ‘그녀’는 유럽풍의 덕수궁 석조전 계단에서 선글라스를 벗고 작은 분첩을 꺼내 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석조전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와 대조적으로 보이는 한복을 입은 전통적인) 어르신들이 보인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모의 그녀는 거울을 통해 무엇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녀의 내면 이야기는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거울을 보는 여인의 내면에 담긴 팽팽하고 긴장되며 묘한 이야기를 ‘나의 사물’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었다. 알 듯 모를 듯 켜켜이 베일에 싸인 감정은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심연의 거울, 연분홍 꽃잎, 팽팽한 풍선, 긴장된 리본의 끝자락에 놓인 듯하다.
www.sungjiyeon.com
정희승
나는 사물을 찍는다. 여기서 사물이란 오브제와 신체, 얼굴을 포함하는 것이며 그들의 형태와 질감, 그 사물이 놓인 특정 시공간에서 드러내는 표정과 정서를 담아낸다. 한영수 작가가 바라본 1950~1960년대 한국 여성은 그 면면이 전후 시대의 삶에 대한 상투적 문구로는 설명하기 힘든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가벼운 양장을 차려입고 한강을 바라보는 두 여성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여성들, 아이를 업은 엄마와 소녀들, 다시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봇짐이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행상에 나서고, 물질을 하는, 즉 일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한영수 작가는 이 여성들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나는 작가의 눈을 통해 전후의 척박하고 무너진 삶을 온몸으로 일으켜 세우는, 당당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여성들을 본다. 어떤 삶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은 에너지를.
다시 가벼운 여름 치마를 입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산책을 하는 두 여성의 뒷모습과, 봇짐을 머리에 이고 차가운 겨울 공기를 헤치며 걸어가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번갈아 본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이들은 혼자가 아니다.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있지만 동시에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보기 힘든 두 여성이 마주 잡고 걸어가는 두 손에서 나는 시대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동질성과 연대의 몸짓을 읽는다.
@chungheeseung
박수지
사진집의 제목을 보고 오래된 노래를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책 속에 담긴 옛 한국의 모습은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처럼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시간과 흔적이기 때문일까. 60여 년 전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렵고 혼란스럽던 시절이라는 배경을 뒤로한 채 나는 그들의 낭만을 보았다. 사진을 통해 내 멋대로 미화한 시대의 모습과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상황이 맞물려 나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했다. 나는 향수 어린 정서를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 그리움의 원천은 내 과거와 삶이 아니다. 내가 겪지 않은 시대 혹은 그 자취라고 할 수 있겠다. 주위의 수백 년 된 성당과 고성, 벼룩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래된 물건들.
나 자신에게 물었다. ‘타국의 무수한 옛 흔적 사이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들 역시 미지의 영역이기에 내 노스탤지어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옛 프랑스와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면 감정적 동요보다 호기심이 앞선다. 몇십 년 동안 어느 프랑스인 가정 한구석을 차지한 석유등을 보며 느끼는 것은 세월의 무게와 그에 대한 경외심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다면 더 개인적이고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내 뿌리에 관한 고찰과 재발견을 연료 삼아 석유등에 불씨를 밝혔다. 이국의 황량한 겨울 풍경 위로 옛 조국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소망했다. 내가 보았던 그 시절의 낭만이 우리 할머니들 주름 한 줄에 실재하는 것이길.
www.suji-park.com
안준
<보그>로부터 전화를 받은 날은 외할머니 사십구재였다.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 자다 깨어보니 밖은 어둑했다. 잠이 덜 깬 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란 제하의 사진집을 보자 그렇게 시작하는 슬픈 노래를 들은 초등학교 여름방학의 어느 날이 기억났다. 당시 어린애가 지나칠 수도 있었던 옛날 노래에 집중한 것은 ‘옷고름을 씹는다’는 이해할 수 없는 가사 때문이었는데 곰곰이 들어보니 봄에 연분홍 치마를 입고 누군가와 성황당길이나 역마찻길을 거닐다 변하는 계절을 보며 함께 울고 웃다 보니 ‘봄날은 간다’는 노래였다. ‘아니, 봄날이 가는 것이 어째서 슬프단 말인가.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방학해서 다 같이 물놀이를 갈 텐데.’ 어린 마음에 이상한 노래로 여겼다.
외할머니의 유품을 태우며 비로소 그 노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구도 살지 않는 외할머니 댁의 정원에는 내가 좋아한다고 심으셔 봄마다 피는 수국과 아이리스, 벚꽃 나무가 있다. 이젠 나를 기다리는 이 없는 정원을 둘러보며 알 수 있었다. ‘그래. 오래전 그 슬픈 노래처럼 함께했던 봄날이 갔구나.’ 2021년의 봄을 맞이하며 지나간 모든 봄날을 애도한다. 다가오는 봄에는 심은 이가 떠난 정원에서 나를 위해 피고 지는 꽃을 보리라.
1934년생 외할머니는 사진집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 등장하는 ‘전쟁 이후 시대’의 젊은 여성이셨다. 그 여성들은 일제강점기에 유년을 보낸 후 한국전쟁 무렵 결혼했으며 아이를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 세월이 지나 그분들이 할머니가 됐을 즈음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시기로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하고 사위를 응원하며 제 몫인 듯 외손을 돌보셨다. 그분들의 딸은 엄마의 인생을 연민하며 당신의 딸에게 이를 이야기했기에 나는 외할머니의 포근함을 기억하면서도 한 여성의 일생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그분께 나는 귀여운 손녀이면서 ‘왜 49일 동안 내 꿈에는 나오지 않으실까’라며 제사 후 낮잠을 자던 아직 철없는 손녀였다. 잠에서 깰 때 죄송했다. 그러다 이 사진집을 펼쳤다. 외할머니께서 ‘괜찮아.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젊음은 그랬었노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어딘가로 떠나신 것 같았다.
@junahn922
이예린
나는 일상의 당연한 일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발견하는 색다름에 흥미를 느끼고 작업한다. 삶에서 사라지는 과정이고 지나치는 순간을 단지 시점의 차이로 마술처럼, 생각의 차이로 깃털처럼 요긴한 터치로, 일상을 환상(Fantasy)적으로 그리고픈 마음이다.
얼마 전 한영수 선생님의 작품집을 접했다. 근현대의 모습이 잘 드러난 작품에는 길거리 풍경, 신여성(新女性), 짐을 이고 가는 사람들 등이 선형 구도로 이루어지는 등 몇 가지 의미 있는 요소를 발견했다. 그 시대 삶이 청량하게 투영되어 온기가 느껴졌다. 그중 비 내리는 풍경이 친숙했다. 비와 관련된 사진은 내게 뉴욕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낯선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할 즈음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놓여 밤낮이 바뀐 곳에서 비가 흠뻑 오던 날 센트럴 파크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가 ‘After the Rain’(2005~) 연작을 구상했다. 비 온 뒤 물웅덩이에 비친 세상을 촬영하는 빗물 풍경 사진과 영상인데 이 상(像)은 거꾸로 뒤집혔고 흑백 부분도 있다. 허상의 세상이 주인공인 듯 더 잘 보이게 하고 싶어 선택한 구성이다. 물에 비친 세상은 금방 증발해버릴 것처럼 잠시 머무는, 바람에 흩날리는, 아련하고 신비로운, 또 다른 세상이다.
이 프로젝트는 목포에서 진행했다.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기도 하다. 비 오는 목포 거리 풍경은 낯설지만 담담하고 나지막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겸손할 정도로 작고 아담한 건물 중에서도 근대 문화유산인 목포근대역사관, 유행가 가사에서 익히 들었던 목포의 눈물과 이별의 연안 항구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 선교의 역사가 있는 석조 건물 양동교회, 호남선의 종착역이라는 근대 철도 문화 목포역을 주요 배경으로 했다. 물웅덩이 속 세상은 지나온 역사와 감정을 품고 매직 아워의 푸른 빛깔로 덤덤히 서려 있다.
목포에 처음 왔던 날, 이곳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서 제2의 뉴욕을 연상했다. 지낼수록 매력적이던 대서양의 기점 뉴욕처럼, 서남해 시작점의 목포가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발전해나가기를 소망한다. 목포의 바닷바람 흩뿌리는 빗줄기 담아, 2021년 1월 목포에서.
www.yeleenlee.com
송석우
나는 몸짓 언어와 퍼포먼스를 이용해 사람들의 상호작용 방식, 거기에 관여하는 사회적 원리를 탐구하며, 이를 주로 사진이라는 매체에 담고 있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은 ‘여성’이라는 대상을 통해 1950~1960년대 시대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여성’이라는 주제로 평면적 형태와 입체감, 대상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에 구조를 부여했다.
이 점에 착안해 21세기를 사는 MZ세대 여성을 통해 현재의 구조를 드러냈다. MZ세대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최신 트렌드와 이색적 경험을 추구하며, 내면의 잠재된 가능성의 확장에 열중한다. ‘다만추(다양한 만남 추구)’와 ‘후렌드(Who+Friend)’에서 보듯 MZ세대는 현재보다 다양한 삶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소통에 익숙해 휘발적 관계에 만족하고, 이 관계가 지속되지 않아도 개의치 않으며,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이 특징을 살리고 싶었다. 미묘한 움직임, 얼굴 표정, 장면의 리듬과 흐름 그리고 분위기 등 여러 요소로 담아내 그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www.songseokwoo.com
김진희
나의 최근작 ‘Finger Play’ 시리즈는 내 손과 발에 생긴 한포진이라는 질환이 창작 계기였다. 많은 수포와 상처가 생긴 손은 감추고 싶은 치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체에 실린 길고 하얗고 잘 정돈된 여성의 과장된 손짓을 보고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매체에서 보이는 여성의 손, 여성스러운 손짓은 실제 내 삶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떻게 관계 맺을까 궁금했다. 그렇게 ‘Finger Play’를 시작했다. 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매체의 손 이미지에 구멍을 뚫고 내 치부인 손을 드러내며 사회와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길고 하얗고 잘 정돈된 손도 아름답고 아픈 내 손도 아름답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보고 공통점을 느꼈다. 그의 작품에 담긴 여성 또한 남의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유롭게 입고 원하는 방향으로 걷는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 아닐까. 당시 이러한 여성이 담긴 사진은 흔치 않았다. 그 시대의 여성은 (때로는 지금까지도)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의든 타의든 여성이 본인 자신만으로 존재하고 표현되기란 쉽지 않다. 한영수 작가의 작품 같은 시선이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면서 점차 변해간다.
www.jinheekim.net
VOGUE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는 1950~1960년대 ‘여성’이라는 주제로 기획되었다. 미디어가 반복 재생하는 전쟁 후 희생양과 동정의 이미지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패셔너블한 여성들이다. 한선정 한영수문화재단 대표 아버지의 사진을 정리할 때면 배경이 된 장소와 시대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진에 담긴 건물과 거리를 살펴 ‘대한 뉴스’를 비롯한 옛 문헌에서 단서를 찾아낸다. 이 작업을 해오면서 내가 시대를 단편적으로바라봤음을 뉘우쳤다. 사람의 인생이 다양하듯 시대도 그러하며, 그 시대마다 여성들의 삶 또한 다채롭다. 미디어에서 재생되는 전후 여성의 삶은 편향되어 있다. 여성의 다른 이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한영수의 사진을 통해 다양한 여성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오로지 정보를 통해서만 과거를 알 수 있기에 다양한 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사진이라는 매체,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진 안의 여러 정보가 다방면으로 분석되면서 가치가 올라간다. 그래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선 여성 사회학자를 통해 1950~1960년대 사회와 여성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사진집의 제목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지은 이유는? 제목을 정할 때 노래 가사나 영화 제목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 <서울, 모던 타임즈>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는 만인이 다 아는 노래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다 너무 좋아 가사 사용료를 지불하고 사용했다. 사진집 제목이 결정되자 자연스럽게 표지의 색(분홍)도 정해졌다. 이전 세 권의 사진집 <서울, 모던 타임즈>(2014), <한영수: 꿈결 같은 시절>(2015), <시간 속의 강>(2017)의 표지는 각각 빨강, 연두, 파랑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다음 사진집 표지의 색이 뭔지 먼저 묻곤 했다.
3,000컷의 필름을 스캔해 160장을 선별해 책에 담았다. 그중 마음을 사로잡은 사진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진을 프린트해 바닥에 펼쳐놓고 오랜 선별 작업을 거쳤다. 특정 사진을 하나 선정하기란 쉽지 않다. 돌담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사진(26p), 양산을 쓰고 가는 여인(31p), 카바레 간판 아래 군중 속 뒤돌아보는 남자의 시선(41p), 한낮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벽에 뜬금없이 걸린 흰옷(68p) 등은 지금까지 보던 그 시대의 사진과 한영수의 사진이 다름을 보여준다. 멕시코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가 생각나는 아기를 업은 어머니의 사진(121p), 신윤복의 그림이 생각나는 빨래터의 아낙네들 사진(130p)도 좋아한다.
해방, 전쟁 후 사진에서 카메라는 권력의 우위에, 피사체는 그 아래에 자리하곤 한다. 하지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만 봐도 한영수 작가는 피사체를 주체적 대상으로 바라봤다. 시대의 애환이나 불행을 보는 이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된 시대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꽃피우는 강인한 여성의 힘을 느끼게 한다. 한영수 작가의 시선이 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후 도시가 재건되고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모더니즘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 삶을 살아갔다. 작가는 성별과 상관없이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다. 그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살아간다”고 말한 바 있다. 주체적 여성이란 부분이 크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자리 잡은 전후 여성의 이미지가 주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사진집이 현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바라나? 앞서 말했듯 그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 이면의 시각을 현세대에게 전해주고 싶다. 놀랍게도 많은 젊은 세대로부터 피드백을 받는다. 미국 서부의 한 젊은 배우는 “엄청난 금액만 아니라면 사진집을 모두 사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 고등학생은 “한영수는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 한국 사진가다. 새로운 사진집이 나오면 연락해달라”는 메시지도 보내왔다. 그들에게 작가의 사진이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 궁금하다. 한영수는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사진가다.
<보그>는 사진 작업을 주로 하는 젊은 작가 9인에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도록 제안했다. 작가들이 영감을 받은 부분은 각기 달랐다. 주체적 여성, 여성 간의 연대, 어머님의 머리 위에 얹은 보따리의 무게, 지금은 부재한 풍경에 대한 그리움 등 다양하다. 시간을 뛰어넘어 한 작가가 다른 작가에게 영감을 주어 새 작품이 완성됐다. 내가 사진집을 시리즈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작가가 살아 있는 듯, 작업을 계속하는 것처럼 만들고 싶어서다. 가끔 웃으며 “작가의 생명 연장”이라고 말한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다. 작품은 결국 기억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숨 쉰다. 작가들 각자의 감성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준 것이 고맙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교감이 가능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한선정 대표 역시 사진 전공 후 헝가리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고 사진가로도 활동했다.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성악을 했지만, 취미로 찍던 사진을 전공하게 되었다. 중앙대 사진과를 다니면서도 아무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 없고, 아버지의 카메라를 받은 적도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제대로 카메라를 마주할 정도였다. 디자인하우스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헝가리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집을 통해 아버지의 사진을 접한 헝가리사진박물관장이 ‘마스터’라 칭하며 한 달간 전시를 제안했다. 당시 전시는 줄을 서서 입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8년 한영수문화재단을 설립했다. 1999년 한영수 작가가 작고했으니 꽤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8년간은뒷정리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동시에 언제 손상될지 모를 필름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도 걱정이었다. 이후 재단을 설립하여 정리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꿈에서 아버지를 만난 적 있나? 그렇진 않다. 하지만 생전의 몇몇 모습은 선명하다. 어느 주말 “산에 눈꽃이 피었다”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바로 카메라를 메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아버지는 훼손되어가는 자연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집이 <우리 강산>이다.
작가의 생전 사진을 보면 스타일이 멋지다. 포마드 머리에 셔츠, 재킷을 갖춰 입고 카메라를 든 사진이 특히 그렇다. 생전 아버지의 패션에 얽힌 추억이 있나? 어머니께서 “외출할 때 어떤 옷을 입을까”라고 아버지께 늘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꽃을 보라”고 답하셨다. 꽃이 가진 색의 조화를 따라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자연을 따라 옷을 입으라는 얘기였던 것 같다.
예정된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한영수문화재단은 꾸준히 사진집과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현재 네 권의 사진집이 나왔고, 남겨진 작품을 정리하며 계속 사진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6월에는 한영수의 작품과 그동안 교류해온 사진가 이노우에 고지(Inoue Koji)의 작품을 선보이는 2인전이 류가헌 갤러리에서 열리며, 오는 연말 개인전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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