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먼저 경험한 다섯 언니의 이야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언니로부터 배웠다. 이곳은 언니의 나라다.
평범하고 괜찮은 언니들
시작부터 욕해서 미안한데, 그 팀장은 좀 재수가 없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면서 원고를 다 끝내기 전까진 밥도 못 먹게 했으며, 폭언도 자주 했다. 그럴 때 섹시한 배트맨이나 귀여운 스파이더맨 이 나를 구해줬으면 참 좋으련만, 그들은 너무 바빴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사회 초년생 시절, 언제나 나를 구해주는 건 ‘쫄쫄이 수트를 입지 않은’ 그냥 청바지 차림의 평범한 여자 선배였다. 리뷰를 나쁘게 썼다는 이유로 한 영화사 대표로부터 “너 밤길 조심해!”라는 협박을 당해 화장실에서 펑펑 눈물을 흘릴 때도, 첫 인터뷰를 앞두고 “도저히 못하겠다, 적성이 아닌 것 같다, 그만둬야겠다”고 불안감에 덜덜 떨 때도 선배는 맛있는 커피를 사주면서 말했다. “괜찮아.” 지금 생각해보니, 회사가 압구정에 있어서 커피값은 꽤 비쌌고, 그래 봤자 선배는 나보다 2년 정도 회사를 더 다닌 20대였다. 당시엔 ‘선배가 나를 예뻐하는구나, 선배가 되면 저렇게 멋있고 어른스러운가 보다’ 그런 생각만 했다. 심지어 인터뷰를 앞둔 내게 선배가 해준 조언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주제를 하나 머릿속으로 정하고 가”는 지금도 인터뷰하러 갈 때마다 떠올리는 얘기다. 그렇게, 이유도 방법도 모른 채 밑도 끝도 없이 허우적거릴 때 나를 도와준 언니들이 있다.
그 언니들과 내 관계가 영화 <벌새>의 은희와 한문 선생님 같았다면 여기 적기 참 훈훈하고 좋았을 텐데, 사실은 영화 <북스마트>의 에이미와 몰리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가 그 언니들을 엄청 놀려대고 함부로 대했다는 거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그 누구보다 평범해 보이는 언니는 못하는 게 없었다. 운전도 잘해서 항상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줬으며, 유일하게 직장 생활을 해봤다는 이유로 돈도 많이 썼으며, 모임을 할 때마다 멸치김밥이나 김치전 같은 걸 만들어왔다. 그런데도 우린 나이가 많다고 언니를 놀리기 일쑤였다. 겨우 네 살 차이인데 말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시시콜콜한 고민은 언니에게로 향했다. 남 자 고민, 취업 고민, 우정 고민, 타지 생활 고민, 하다못해 숙취 고민과 뱃살 고민까지. 수백만 가지 방황과 혼란에 대해 듣느라 머리가 꽤 아팠을 텐데 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정작 언니는 누구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았을까?
여자라면 알 거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임신한 소피를 성심성의껏 도울 때, 마을 여자들이 다 함께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이 울컥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몸이 아픈 베스와 바닷가에서 진심 어린 대화를 할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올리비아 와일드 감독의 <북스마트>에서 에이미와 몰리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이유로 상처 주는 말을 하며 싸울 때 둘 모두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왜 드는지. 세상엔 말할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여자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여자들이었다. 내 기분과 감정을 눈치채고 조용히 “괜찮아?”라고 카톡을 보내주는 친구들, 늦은 밤 택시 타고 집에 갈 때 “도착하면 꼭 연락해”라고 기사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고 택시 번호를 조용히 적는 친구들, 식당의 화장실에 먼저 다녀와서는 “여긴 이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른 곳 화장실 가자”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혼자 사는 친구에게 “우스꽝스럽긴 해도 유용할 거야”라며 립스틱 호루라기를 선물하는 친구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 “나쁜 놈”이라고 온갖 지저분한 욕을 다 해주는 친구들,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 “네가 얼마나 멋진데”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설사 그게 거짓말이라도, 설사 그게 좀 과장된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다못해 겨드랑이 털은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생리 중일 때 냄새는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최저가 화장품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친구들은 언제나 먼저 경험해보고 먼저 부딪혀보고 알려줬다. 나에게는 그 평범한 친구들이 모두 언니였다. 지금의 나는 그 평범한 친구들의 작은 도움으로 이뤄졌다는 걸 안다.
요즘엔 세상의 많은 여자 친구들과 더 크게, 더 넓게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 여자 연예인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감정을 함께 나누고 함께 슬퍼했다. 몰래카메라가 발견되고 데이트 폭력이 일어나고 성범죄 사건이 일어날 때, 우린 터트릴 수 없는 그 분노의 감정을 함께 나누고 함께 화를 냈다. 나 혼자 탔을 때와 남자와 함께 탔을 때 달라지는 택시 기사의 태도에 대해, 영화 속에서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걷는 장면만 나와도 불안감이 얼마나 커지는지에 대해, 지금껏 당한 수많은 성희롱과 성추행에 대해, 우리를 잘 이해한다고 믿었던 남자 친구나 남편에게 여자로서 겪는 차별에 대해 얘기하다가 어떻게 눈물이 터졌는지에 대해. 우린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정세랑과 김초엽, 마가렛 애트우드, 레베카 솔닛의 작품에 대해, 버지니 비아르의 샤넬 쇼에서 모델이 안경 쓴 것에 대해, 마가렛 호웰과 요지 야마모토가 여성의 안전을 위해 만든 편안하고 튼튼한 옷에 대해, 피부를 리터칭하지 않는 프랑스 화장품 광고에 대해, 비혼을 선언한 직원에게 축의금을 주는 어떤 회사의 정책에 대해, 미혼모를 지원하는 회사 리스트에 대해, 여혐 발언을 한 남자 연예인을 기용한 회사 리스트에 대해 얘기한다. 아마 남자 친구들은 모를 거다. 그들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혹은 일찍 자리를 떠난 후 우리의 대화가 어떻게 변하는지.
가치관을 지키는 게 어려울 때마다, 열심히 싸우고 있는 여자들을 생각한다. 셀린 시아마와 아델 에넬이 프랑스 영화계에서 벌이고 있는 외로운 투쟁을 생각하며 누군가 실수로라도 우디 앨런과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보지 않도록 얘기해주며, 아델과 테일러 스위프트가 받는 시선의 폭력을 생각하며 아무리 힙합을 좋아해도 여혐을 드러내는 에미넴이나 텐타시온의 곡을 소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우리가 얘기하는 대상을 추측하며 한 여자 후배가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 여자죠?” 다른 여자 선배가 그의 팔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자이긴 한데 그 문제는 여자인 것과는 상관없어.” 그런 언니들 덕분에 “여자라서 그래”, “꼭 그럴 때 여자 같은 행동을 한다니까”, “여자 많은 조직에 있는 그런 문제 있잖아” 같은 얘기를 안 할 수 있게 됐다. 대신 여자들의 부드러움, 세심함, 예민함, 친절함, 따뜻함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다. 누구보다 평범한 여자라서, “괜찮아?”라고 물어봐줬고 시간 내서 내 얘기를 들어줬고 “괜찮아”라고 말해줬다. 휴,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이 날 구해주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는 모두 언니가 된다
나는 언니들 손에 자랐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한 살 터울 친언니가 내 끼니를 챙겼다. 여섯 살 언니는 “나도 나가서 놀고 싶은데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통곡하면서 다섯 살 동생의 입에 밥을 욱여넣었다. 20대 시절, 늘 음침한 표정을 하고 세상의 멸망을 기다리며 푼돈 알바를 전전하던 나는 사연 많고 재능 있는 어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던 ‘페미 마초’ 편집장 ‘언니’의 눈에 띄어서 대학 졸업장도 없이 하루아침에 잡지기자가 되었다. 나를 업계 술자리마다 달고 다니며 인맥을 엮어준 사수 언니, 나보다 늦게 입사한 남직원이 중간 관리자로부터 회사 내규에도 없는 군 가산점, 연령 가산점, 학력 가산점을 주렁주렁 받아 ‘개족보’가 탄생할 뻔했을 때 같이 분기탱천해준 반골 언니, 동종 업계 팀장들이 후배의 기획을 가로채고 주요 프로젝트를 독점할 때 “너는 내 총알”이라며 나를 하이라이트에 세우곤 좋아라 손뼉 치던 팀장 언니 등 수많은 언니들이 오늘의 나를 빚어냈다. 사회에서 만난 오빠들은 잘 보여봤자 나를 두고 음흉한 상상이나 하지 별 쓸모가 없는 반면 언니들은 내 일 잘하고 예의만 지켜도 컬링 선수처럼 분주하게 나의 앞길을 닦아주었다.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언니들에게 쏟은 나의 호의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알뜰하게, 몇 배로 보답받았다. 물론 얌체 같은 언니, 무관심한 언니, 무능한 언니, 못된 언니도 만났지만 그들은 내 삶을 스쳐 지나갔고 결국엔 좋은 사람만 남았다. 당연히 나는 언니들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언니가 되었다. 그때부터 ‘언니’라는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언니’라는 키워드가 대중에게 먹히는 이유는 이해한다. 그동안 과소평가되거나 기록되지 못한 여자들의 역사를 재구축하고, 여성의 성취에 합당한 상찬을 보내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사악한 이간질 뒤에 감춰져 있던 여자들의 연대를 드러내고, 우상은 될지언정 롤모델은 될 수 없는 ‘오빠’들로부터 여성들의 시선을 돌려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다 좋다. 좋은 취지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상사, 선배, 언니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고민해온 나로선 이 키워드가 두려울 때가 많다.
긴긴 막내 시절을 지나 내게도 후배가 생기면서 나는 좋은 선배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후배가 주로 여자였으니 좋은 선배란 곧 좋은 언니를 뜻하기도 했다.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되 엉겨 붙지 않고, 작은 재능이라도 발견하면 기뻐하고, 기회를 주고, 무조건 칭찬하고, 책임질 것은 책임지려 했다. 내가 언니들에게서 받은 애정과 지원을 나의 동생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동시에 꼰대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반짝이는 재능과 미완의 인격을 가진 참신한 앙팡 테리블이 이룬 것도 없이 성품만 괴팍한 테리블한 꼰대로 전락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마냥 지켜주고 싶던 나의 동생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자기 후배들로부터 일 못하고 성격 더러운 상사라고 욕먹는 세대가 되기까지도 채 10년이 안 걸렸다. 아, 답답해. 그냥 직설적으로 얘기해보자. 상사가 막내를 보면서 ‘애가 좀 예민하지만 감성적이라 해두자’, ‘쟤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말을 세게 하지만 패기라고 해두지’, ‘쟤는 잇속이 빤히 보이지만 상사한테 예쁨받으려는 태도는 사회에서 나쁠 게 없지’ 하고 넘어가면 그 막내가 윗사람이 되었을 때 부하 직원들로부터 ‘저 피곤한 예민보스!’, ‘폭언쟁이’, ‘사내 정치만 하는 강약약강 꼰대’가 돼버리는 식이다. ‘사회생활이란 기성세대 괴물들을 욕하다가, 나랑 같이 그들을 욕하던 한 세대 위 언니들이 괴물로 변하는 걸 지켜보다가, 그다음은 동기가, 그다음은 후배들이 괴물이 되는 걸 지켜보는 과정일까’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들기 시작했다. 그건 꽤나 좌절스러운 자각이었다. 그 연쇄 작용 어딘가에 분명 내가 있다. 나는 언제 괴물이 되었을까. 분명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 나도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뭐가 더 나쁜가. 내가 괴물로서 반면교사가 되는 것과 스스로 괴물 되길 꺼려서 쿨한 척만 하다가 괴물을 길러내서 다다음 세대에 던져주는 것 중에. 나는 괴물일까 괴물이 못돼 나쁜 사람일 까. 나는 과연 좋은 언니였을까. 실패했다면, 왜 실패했을까. 내게 언니 되기는 동생 되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당신이 가르침을 수용하고, 남의 성취를 존경하고, 타인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태도가 있다면 좋은 언니들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세상에는 멋진 여자들이 널렸다. 멀리서 찾으면 더 쉽다. 성공한 기업가, 예술인, 운동선수, 직장인, 주부, 자영업자 ‘언니’들은 당신의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줄 것이다. 역사를 종으로 훑어 찾으면 더 많다. 당신은 그들을 향해 인생의 나침반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이 주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좋은 언니’가 되는 것은 백 번을 고민하고 천 번을 반성해도 될까 말까 한 성취다. 그리고 좋은 언니가 된다는 것은 단지 동생들을 보살피고 모범이 되어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좋은 언니, 즉 존경할 만한 사회인으로 길러내는 일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길러내야 할 사람들 중에는 타인의 가르침을 수용할 마음도 없고 남의 성취를 존경하지도 않으며 보살핌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언니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고단한 일이다.
두렵게도 우리는 모두 자라서 언니가 된다. ‘멋있으면 다 언니’라지만 멋없어도 나이 먹으면 언니가 된다. ‘내가 뭘 알아. 한 살이라도 오래 산 니들이 떠먹여줘야지’ 언제까지나 입 벌리고 짹짹거릴 수는 없고, 나이 든다고 절로 존경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며, 어린 날의 티끌 같은 결함이 나잇살과 함께 들보로 자라나 돌이킬 수 없이 못난 어른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언니들을 지지할 필요는 없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성공을 위해 더 높은 능력과 인격을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성공한 언니들이 존경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확률상으로는 못난 언니가 못난 오빠들만큼 많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들을 향해 나침반을 맞추고 정진하기만 하면 절로 당신이 동경하는 언니들처럼 될 거란 착각도 버려야 한다. 모든 동생들이 훌륭한 언니로 자라지는 않는다. 하여 작금의 ‘언니’ 신드롬을 계기로, 우리가 저 위의 멋진 언니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한편으로 자신이 어떤 언니가 될지,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나 같은 평범한 여성 사회인들이 더 많이 고민을 해보았으면 한다. 여성들이 서로의 언니, 동생이 되어 밀어주고 끌어주는 유토피아는 우리의 일상에서, 삶의 현장에서, 주변인과의 관계 속에 이뤄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언니들에게 배운 것처럼
프랜 리보위츠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을 봤다. 7회 내내 작가 프랜 리보위츠의 독설 폭격과 연출 그리고 방청객 역을 맡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진심 100% 폭소를 볼 수 있는 시리즈다. 개, 부자, 거지, 스포츠, 브런치, 로스앤젤레스, 자연, 논픽션 소설, 건강식… 프랜 리보위츠는 그야말로 ‘모두 까기’다. 세상만사 싫은 것이 차고 넘치는 이 여자는 지하철역에 예술 작품을 설치하느라 5개월이나 공사를 해야 한다는 안내문을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비아냥거리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지하철역의 예술 작품이 지친 영혼을 달래기 위한 거라고요? 지하철을 타는 사람에겐 남은 영혼이 없어요! 이미 탈탈 털렸거든요. 제아무리 달라이 라마라도 지하철 한 번 타고 나면 분노 폭발 미치광이가 될 거예요” 같은 말을 들으면서 나 역시 마틴 스코세이지처럼 연신 낄낄거렸다. 그녀는 마치 내가 아는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바로 나의 언니들 말이다.
나는 스무 살, 그러니까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쭉 여자들과 함께 지냈다. 여대를 졸업한 후 바로 패션지를 만드는 잡지사에 어시스턴트로 입사해서 에디터로 한참을 일했다. 지금 몸담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업체의 팀원들 역시 모두 여자다. 어쩌면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치고는 일을 참 잘해”처럼 칭찬을 빙자한 모욕이나 ‘여직원’이라는 구시대적 호칭과 굴레 같은 건 내게 인터넷 괴담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 이 두 가지가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말했는데, 나의 언니들은 그 두 가지 열쇠를 모두 가진 사람들이었다. 능력 있고(까다롭고) 주관이 분명했다(괴팍했다).
마감만 되면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일단 내 어설픈 원고가 디렉터 선배의 손에 들어가면 빨간 펜투성이로 돌아오기 일쑤였고 회의실에 불려가 2시간이 넘는 개인 교습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쿠션어’ 같은 건 그녀들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잘하는 건 고사하고 버티기도 괴로웠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죽을 것 같았던 시간이 (추억 보정 같은 게 절대 아니다) 나를 먹고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결과론적으로 아직까지 콘텐츠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가끔은 글을 쓰면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삶의 필수적인 잔기술 역시 그녀들을 통해 터득했다. 옷 입는 법? 단언컨대 그들은 최고의 쇼핑 메이트다. 화장? 레드 립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때로 로망은 로망으로 남겨둬야만 한다. 술? 알코올 해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젠 와인 반병 정도는 거뜬히 비운다. 딱 기분 좋을 때까지만 마시되 인사불성이 된 누군가를 귀가시키는 법도 알게 됐다. 그리고 젊음의 마지노선은 스물아홉 살이라 생각하던 20대 중반의 나는 그들에게서 30대, 40대, 50대에도 각자의 청춘이 존재함을 목격했다. 청춘의 소멸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그럼에도 시간의 흘러감을 받아들이는 일은 별개의 문제라는 걸 배웠다. 와인과 음식을 마리아주하거나 상황에 맞는 적절한 레스토랑을 고르는 방법, 그럴듯한 예술가와 소설가의 이름을 습득했다. (덕분에 예술을 진심으로 좋아하진 않더라도 어디 가서 좋아하는 척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딱 하나 아직까지 못 배운 것은 좋은 남자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법이다. 그건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호오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건 바꿔 말하면 개인의 취향과 선택을 존중할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들은 차단의 귀재가 됐다. 마치 수전 손택처럼 말이다. 1978년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손택은 기 센 여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을 털어놓았다. “아마 내 기가 꺾이지 않았던 건 그런 메시지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 해서는, 확실히 어떤 면에서 청각 기능을 꺼버려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리를 두었다면, 본능적으로 내 기를 꺾을 만한 것들에 맞서 나 자신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을 뿐이에요.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시집을 못 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든가.”
지난해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사실 훨씬 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결혼 생활을 지속할 정도로 서로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거나 주사, 도박, 폭력, 욕설이 난무하는, 흔히 말하는 ‘치명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남자들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뉘었다. “나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라는 말로 연애의 가능성을 내비치거나 남편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후자인 경우엔 대체로 “네가 기가 세긴 세구나”, “너 힙합이네” 혹은 (한참의 침묵 후에) “으… 응” 같은 반응이 비수처럼 돌아왔다. 언니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축하해” 같은 억지스러운 리액션도, “시대가 변했잖아” 같은 뻔한 레퍼토리도 없었다. 그녀들에게 이혼은 그냥 내 선택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마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종류의 경험 때문이지 싶다. 내 행복과 욕망이 욕심이 되는, ‘기 센 여자’라는 타이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순간을 우리는 모두 겪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거나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무거운 책임감과 자괴감을 견뎌내야 하는 일상에 그녀들은 아마 단련되었던 것 같다. 속으로 괴로울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법에. 그리고 그녀들에게 배운 것처럼 나도 청각 기능을 꺼버렸다.
그래, 세상에는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가 너무 많다. 싫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 또한 많다. 프랜 리보위츠가 말했듯이 개인의 즐거움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그런 점에서 ‘길티 플레저’라는 단어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겸손함이 좋은 성격을 대신할 수도 없다. 타인에 비춰봤을 때 당신의 삶과 선택과 말이 비합리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직설적이라고? 언니들이 그랬다. 그게 뭐 어때서.
허세 없는 언니들의 힘
지방에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금호동 시장 골목의 한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한 적이 있다. 요즘은 여자 청원경찰이 드물지만 당시엔 안내원을 대신해 젊은 여성 청원경찰을 뽑는 게 은행마다 유행이었다. 보안보다는 친절한 고객 응대가 주 업무였던 터라 딱히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치도 않았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찾던 나는 용역업체 사장의 제안으로 휴학 중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은행에 취업했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금방 그만둘 거라 생각해 뽑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고 실제로 최종 학력이 고졸 상태인 건 맞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생각했다. 면접은 간단했다. ‘시집 안 가고 왜 지방에서 혼자 여기까지 올라왔느냐’는 질문에 살 짝 당황했지만(당시 내 나이 고작 스물한 살!) 도시 생활에 대한 철없는 환상 같은 걸로 대충 이해되었던 것 같다. 바로 다음 날부터 제복을 입고 사용법도 모르는 가스총을 찼다. 그렇게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은행에는 나 외에도 유니폼을 입는 사람이 딱 네 명 더 있었다. 여상을 졸업한 창구 직원 언니들이었다. 입출금 창구의 세 언니 중 한 명은 야간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한 명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며, 막내 언니는 나와 아침마다 간식 심부름을 함께 했다. 대리로 승진한 언니 한 명은 양복을 입은 다른 남자 직원들과 함께 대출 창구에 앉아 있었는데, 왜 혼자만 유니폼을 입는지 그땐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은행에는 40대의 깐깐한 여자 과장도 한 명 있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왔음을 강조하며 나의 업무 능력(화분에 물 주기, 액자 똑바로 걸기 등)을 끝없이 의심하던 과장은 자율 복장이었다. 20년 전, 지금은 합병되어 이름도 없는 그 작은 은행에서의 일화가 문득 떠오른 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때문이다. 여상 출신의 말단 직원들은 반드시 무릎 길이의 유니폼을 입어야 하며 매일 아침 일사불란하게 커피를 탄다. 책상을 닦고 잔심부름을 도맡으며 진급은커녕 서른 살이 넘어도 ‘여자애’로 불린다. 함께 입사한 남자 직원보다 급여는 한참 적었지만 그렇다고 일이 적은 것도 아니어서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은행 언니들은 거의 매일같이 야근을 했다.
나는 반년 넘게 그곳에서 일했다. 같이 야근도 하고 어쩌다 보니 회식이며 야유회도 반강제로 따라가게 됐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알게 된 언니들의 고민은 가족의 생활비 송금, 진급을 위해 필요한 대학 졸업장과 등록금 사이에서의 갈등, 남자 친구와의 다툼, 오늘의 간식 메뉴, 장래의 꿈과 같은 엄청나고 또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제일 나이 많은 언니는 흡연자였는데 흡연을 일종의 친목 수단으로 삼는 남자 직원들과 달리 늘 숨어서 담배 를 피웠다. 그렇다고 불만은 없었다. 적은 급여도 학력 차별도 유니폼 착용이나 흡연 사실을 숨겨야 하는 것도 언니들에게 딱히 큰 애로 사항은 아닌 듯했다. 아직 모두가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들이었으니까.
문제는 술자리였다. 회식을 할 때면 제일 직급이 높은 남자 상사 양옆과 맞은편엔 언니들이 앉아 술을 따랐다. 남자 직원들이 알아서 그렇게 자리를 배치하고 짐짓 큰 소리로 여직원들의 미모를 칭찬하며 애교를 요구했다. 음담패설은 그냥 일상이었다. 우리 사이의 모종의 연대 의식은 바로 이 술자리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남자 직원들이 행여 나를 그 음흉한 상사 옆에 앉히려 하면 언니들이 먼저 웃음으로 막아서며 슬쩍 자리를 바꿔 앉혔다. 노래 방에서 술 취한 상사가 나를 부둥켜 안으며 블루스를 추려 할 땐 함께 있던 식당 언니가 벌떡 일어나 파트너를 자청하기도 했다. 식당 언니는 늘 반짝이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멋쟁이 40대로, 흥이 많고 사람이 좋아 창구 언니들과 죽이 잘 맞았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었다는 식당 언니는 아줌마 특유의 대범함과 친화력으로 능구렁이 같은 남자 직원들을 구워삶고 그들의 수작을 익살스러운 농담으로 맞받아치며 우리들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외주업체 계약직 ‘식당 아줌마’가 본사의 정규직 남자 임원들의 희롱에 맞서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그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늙은 상사의 비위 맞추기에 여념 없는 양복쟁이들 틈에서 그만큼도 어려운 일이란 걸 다른 언니들도 알고 있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여직원들처럼 회사의 불의에 맞서 당당히 들고 일어나진 못했지만 우린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깔깔대며, 때로는 분노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언니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때가 되어 나는 은행을 떠났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해 잡지사에 취직했다. 여고, 여대를 나와 여자들로 가득한 잡지사로 들어온 후 한동안은 그 시절을 잊고 지냈다. 온갖 차별이 난무하던 그 야만의 사무실도 기억 너머로 지웠다. 잡지사에 다니는 동안 일하는 여성으로서 나의 고민은 전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일을 하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면 불쑥 의문이 들었다. ‘대학 시절 똑똑했던 그 언니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1990년대 말 PC통신의 유행과 함께 생겨난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언니들은 틈만 나면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고 종로 피맛골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밤새 술을 마시며 여성의 자유와 연대를 논했다. 나는 늘 ‘소주엔 고갈비’보다 확실한 언니들의 주관과 박학다식함에 감탄하며 수줍게 존경의 건배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짧은 사회생활에 안녕을 고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미련이야 없었겠냐마는 신혼의 단꿈과 갓 태어난 아기의 재롱에 빠져, 혹은 주부 생활의 피로에 젖어 야심만만했던 왕년의 그녀들은 ‘그땐 그랬지’ 하는 과거가 되어갔다. 나는 아이들과 남편 얘기뿐인 동창 모임에 어느 해부턴가 발길을 끊었다.
내 불만의 또 다른 가지는 ‘왜 세상의 많은 멘토 중엔 여자가 없을까?’였다. 신사임당, 현모양처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믿고 따르고 싶은 멋진 여자. 인기 드라마의 줄거리만큼이나 자신의 꿈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열정가. 쇼핑할 때보다 신나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전략가. 연예인이나 직장 동료의 사생활을 캐고 험담하는 대신 각각의 장점을 발견하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애정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챙기는 사려 깊은 사람. 뒤에서 하는 불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땐 정면으로 나와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여신. 한때 멘토 붐이 인 적도 있지만 몇몇 여성 정치인을 제외하면 실제 현장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여성 멘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직장에서의 여자 선배들은 마흔 살을 고비로 하나둘 조직에서 떠나갔고 이후의 소식은 거의 전해진 바가 없었다. 혹시 결혼이 답답한 회사 생활의 탈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했던 적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이라고 쉬운 게 아니라서 아직 나는 독신으로 남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엔 언니들이 있다.
나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누군가의 등장을 마냥 기다리다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가 가진 한 줌의 타이틀을 버리고 ‘35세 무직자, 싱글 여성, 캣 맘’이 되었을 때다. 나는 회사 밖에 그토록 많은 열정적인 여성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회사 안에도 그들은 이미 존재했다. 다만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일 기회가 없었거나 사회적 관계나 위치로 인해 미처 서로를 몰라봤을 뿐. 회사와 직함을 떼어내고 그냥 이름 석 자로 만난 우리는 더 이상 눈치 볼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똘똘 뭉쳤다. 척박한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는 오늘의 전우들. 그래도 지금보단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긍정의 화신들. 잡지사 에디터 출신들은 죄다 ‘장군병’에 걸렸다고 쯧쯧거리면서도 내일은 또 어떤 재미난 일을 벌일까 신나게 파티원을 모집하는 자기 판의 주인들. 에디터 출신 선후배뿐 아니라 미술계, 디자인계, 출판계 등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에서 일해온 우리들의 고민은 대체로 비슷했고 자신의 일을 사랑했으며 매사에 열심이었다. 사회적 입장 차가 드러나지 않는 말랑말랑한 대화 주제를 고르기 위해 굳이 관심도 없는 연예계나 연애 얘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생각을 꺼내 보이면 여기에 힘을 보태는 또 다른 생각 하나가 튀어나와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던 문제도 척척 해결되었다. 물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적도 거침없었다.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놀아볼 만큼 놀아본 언니들. 일 좀 한다 하는 사람들. ‘역시 여자들과 일하면 잡음이 없다’는 우리끼리의 편 가르기가 아니라 긴 시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온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불같은 성미, 일에 대한 욕심, 이런저런 실수, 미련한 구석은 있어도 우린 허세는 없다.
모든 여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난 언니들의 힘이 바로 이 허세 없음에 있다고 본다. “오빠 한번 믿어봐”, “오빠가 다 해줄게”는 심심찮게 들어봤어도 언니가 그런 말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아주 오래전엔 정말 여성이 사회적으로 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도 그 잘난 오빠들과 동생들을 대학까지 뒷바라지한 건 사실상 ‘언니’라 불리던 숱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허세 빼면 시체’라는 오빠들이 자신의 권위와 ‘살아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본인도 모른 채(때로는 알면서도) 약자를 희롱하는 동안 언니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해왔다. 단지 내 귀에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언니들의 무능을 탓했지만 실은 내가 그들의 행동을 보지 못한 탓이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누구나 안다. 허세와 거품으로 가득하던 산업 성장기는 끝났다. 코로나와 함께하는 저성장 시대. 마스크로 모두가 입을 가린 요즘, 힘을 발휘하는 건 오직 ‘진짜’뿐이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배려할 줄 아는 언니들의 진심,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언니들의 능력, 성급하게 ‘우리’로 묶어 떼로 몰려다니는 대신 다름의 가치를 지지하는 언니들의 유연함. 이젠 내가 누군가의 언니가 되어줄 차례다.
언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
언니. 언니라고 부를 만한 상대는 누구일까. ‘언니’는 단지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걷고 싶다까지 나아가야 가능한 호칭이다. 그 사람의 궤적에 어떤 진동을 느껴본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로 만나 마음이 통하는 동성끼리 언니 동생 하는 사이로 흘러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지만, 나는 그 경우에도 꿋꿋하게 이름이나 직함을 부르곤 했다. 언니라는 호칭을 누구에게나 쉽게 내줄 수는 없으니까.
이 까다로움은 친언니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섯 살 터울인데, 30~40대에는 그리 대단치 않은 차이지만 유년기에는 상당한 거리다. 내가 초등학교 때 언니는 이미 고등학생이었다. 언니가 친구들을 불러 학교 실습 시간에 배운 도넛 같은 걸 튀기고 있을 때, 나는 방에 숨어 고소한 기름 냄새나 맡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언감생심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언니의 친구들은 내가 여전히 시소나 태워주면 기뻐할 꼬맹이라고 착각했으니까. 언니들의 세계는 닫힌 커튼 같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땐 인지하지 못했지만 언니로부터 흘러온 문화적 유산은 제법 많았다. 덕분에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이에 윤상과 변진섭에 입문했고, 또래보다 빨리 삐삐를 사용했으며, 다양한 패션 브랜드를 알았다. 온전한 내 취향이 다져지기 전에 언니 방의 문틈 사이로 구경한 세상이 내게는 먼저였다.
그러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발적으로 끌리는 대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생한 TV 광고가 하나 있다. 화장품 광고였는지 속옷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배우 이혜영(<피도 눈물도 없이>의 주인공)이 타이트한 옷차림에 도발적인 자세로 당구를 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성의 판타지를 채우는 컨셉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대에는 그처럼 강하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고분고분하고, 처연하고, 어딘가 박복한 여성들을 미디어에서 신물 나게 보고 살던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굳이 계보로 치자면 배우 김서형이나 진서연의 조상 격이라고 할까.
내가 느낀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무렵 라디오에서는 전에 없이 야릇한 엄정화의 ‘눈동자’가 흘러나왔고, 신승훈의 뮤직비디오로 데뷔한 배우 김지호가 이른바 ‘중성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대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나는 스테레오타입 바깥에 있는 여성들을 접했고, 매료되었다. 그들과 나의 세계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언니라는 친근한 표현은 감히 붙여볼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나에겐 언니나 다름없었다. 왠지 그들처럼 되고 싶었으니까.
여기까지가 프롤로그 개념이라면, 나의 1호 언니로 자부 넘치게 호출하고 싶은 대상은 이효리다. 고작 나보다 한 살 위지만, ‘멋있으면 언니’라는 공식을 확실히 깨우친 인물이다. 이효리는 청순한 걸 그룹의 리더로 데뷔했다. 그러나 핑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거침없이 예능 프로그램에 임했는지 알 것이다. 특히 이효리는 19금 토크부터 가식 없는 심드렁한 리액션, 겉치레의 겸손 따윈 없는 당당함을 드러냈다. 저래도 되나 싶게 선을 턱턱 넘었고, 그게 결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재치 있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효리는 예뻤고, 자신만만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이효리를 좋아했느냐면,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처음 스키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스키 장비를 장착하고 평지에서 걷지도 못할 정도의 초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급자 코스에서 핑클과 강호동이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 중이라고 수군대는 게 아닌가. 대책 없이 리프트에 몸을 실었다. 효리 언니를 실물로 영접할 수 있다면야 그깟 상급자 코스 따위! 언니를 가까이서 보는 열망은 채웠지만, 내려가는 길이 문제였다. 스키장 폐장 시간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더 다급해졌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슬로프를 울면서 질주했다. 내 인생에서 소름 끼칠 만큼 가장 집중력이 넘치던 순간이다. 그만큼 이효리라는 존재는 내게 막강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났지만 이효리는 세대를 막론하고 여성들의 현재진행형 언니다. 그게 참 뿌듯하다. 그런 사람을 좋아해왔으니까 내 삶도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 때문일까. 멋지게 나이 먹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아는 나이이기 때문일까.
거칠고 불안정하던 10대와 20대를 당찬 언니들의 기운으로 헤쳐나왔다면, 30대 이후의 삶은 인생의 쓴맛을 먼저 경험한 언니들이 주는 위로와 연대로 견디고 있다. 송은이는 비보를 론칭하며 기회는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 이라는 아포리즘을 몸소 선보였고, 김숙은 나답게 살고 말하는 방식이 가진 힘을 증명해냈다. 커리어에 부침이 있었던 백지영은 누구보다 여자 후배들의 등을 팍팍 밀어주고 싶어 한다. 황정은 작가는 시대와 함께 아파하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결연함을 문장을 통해 선언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혜신은 타인의 아픔에 진실로 공감하는 법을 알려준다. 다 내가 좋아하고 지지하는 언니들이다.
가까이는 영화 일을 하면서 만난 수많은 여성이 나의 등을 다독이는 힘의 원천이다. 한번은 윤여정 선생과 인터넷 라이브 방송을 하는데 채팅창에 “저만 불행한 것 같아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그걸 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다 불행해요. 너만 불행한 거 아니야. 어쩌면 너보다 더 불행할걸.” 나는 그 말에 한 번 웃고, 두 번 안도했다. 나도 어설픈 위로가 아닌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송곳 같은 말을 전하는 ‘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가짜가 아닌 진짜 삶을 살아야겠지.
최근에는 나보다 물리적 나이가 어린 영화감독과 배우, 작가를 더 자주 만나게 된다. 이젠 그들이 나의 새로운 언니들이다. 특히 1990년대생 여성들이 내게 주는 영감은 굉장하다. 그들은 용감하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내 세대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틀에 들어 가고 싶어 안달하며 살았다면, 그들은 그 틀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것 같다. 나는 수많은 언니에 의해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언니를 만날 예정이다. 언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아져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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