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서현진 시점
서현진의 힘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모두 그녀의 시점으로 보게 하는 데 있다. 다섯 가지 감각의 대변자, 우리 삶의 옹호자. 서현진은 특별하고 이상한 평범함을 오랫동안 긍정해왔다.
서현진의 머리는 어깨를 지나 훌쩍 자라 있었다. 전작 <블랙독>에서 자로 자른 듯한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한 번도 안 잘랐어요.” 딱 그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서현진이 새로운 인물로 우리 앞에 서기까지.
드라마 <너는 나의 봄> 방송을 이틀 앞둔 한낮,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현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계절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봄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마음이라고 했다. “나무에 물오르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얘네들 움찔움찔한다, 이런 느낌이 찾아오니까요.” 전례 없이 위태위태한 계절 한가운데 서현진의 드라마 제목은 <너는 나의 봄>이다. 사계절 중 자연현상이 아닌 어떤 의미가 담긴 유일한 계절. “저마다 일곱 살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건물에 모여 살게 되며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소개를 달고 있는 작품에서 봄은 인생의 한창때라거나 희망찬 앞날보다 마음의 위안을 구하는 듯 보였다.
“늘 그랬듯 제가 하는 생각과 비슷한 작가님을 만나면 그 작품을 선택하게 돼요.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잖아요. 요즘 ‘엄마, 아빠에게 받은 것들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찰나에 이 대본을 만났고요. ‘당신의 일곱 살로부터 당신은 얼마나 멀리 도망쳐왔나요?’라는 카피를 보고 이 드라마가 궁금해졌죠.” 대본을 읽고 난 서현진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작가님이 나 말고도 계시네.’
극 중 일곱 살의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된다. 이들은 서로를 치유하고 성장해나간다. “제겐 그때가 짤막짤막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요. 동해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다거나 경로잔치에 가서 무용하고 용돈을 받았다거나 단편적인 기억으로만요.”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을 과거를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 드라마가 별로 밝지는 않아요. 어두운 과거를 꺼내 수면 위로 올리는 작업을 하는 내용이다 보니 저도 그런 과거를 꺼내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의 저를 이렇게 있게 한 건 ‘무용을 했던 나’와 ‘무용학교, 기숙학교에 있었던 나’, ‘그룹 밀크(M.I.L.K)를 했던 나’와 ‘그게 잘 안되던 시기의 나’까지 모든 게 겹쳐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서현진은 요즘 연기를 한다기보다 극 중 강다정처럼 심리 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다른 연기자도 작가님에게 ‘드라마가 아니라 긴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했대요. 저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연기가 아닌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동안 깔끔하게 연기를 했다면 좀 버석거리고 결이 곱지 못하더라도 진짜인 순간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어요. 좋은 연기로 가는 방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삐거덕거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런 걱정이 왔다 갔다 해요.” 실제와 연기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보시는 분들은 차이를 못 느끼실 수도 있어요. 관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저는 현장에서 다른 걸 하고 있다고 느껴요.” 4회까지 방송된 지금, 예상대로 거친 결은 느낄 수 없었다. 이미나 작가는 제작 보고회에서 “서현진이 배역과 자신을 딱풀로 딱 붙이고 현장에 나타난다”고 말했는데 그 견고한 밀착력 덕분일 것이다.
서현진은 그동안 현실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법한 인물들을 계속 세상에 내놓았다. <식샤를 합시다 2> 백수지, <또 오해영> 오해영, <낭만닥터 김사부> 윤서정, <사랑의 온도> 이현수, <뷰티 인사이드> 한세계, <블랙독> 고하늘. 마동석의 아내로 길지 않게 얼굴을 비친 <굿바이 싱글> 상미조차 안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들 평범하게 여기지만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구석, 똑 부러지는 구석, ‘지랄 맞은’ 구석이 있는 여자. 세상이 세속적으로 흘러도 결국 타인을 끌어안는 사람. 드라마라는 장르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서현진이 그런 인물을 주로 맡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단순히 그런 설정이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진 않았다. 드라마를 이루는 큰 서사,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감정의 변화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순간이 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맴도는 말, 전할 수 없어 일기장에 머무는 숱한 감정. 서현진은 감춰져 있어서 모두가 생략해버리는 그 감정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살아낸다. 상대를 바라보는 표정, 버스를 기다리는 뒷모습, 운전하며 펑펑 흘리는 눈물에 늘 우리만 아는 우리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대신 살고 우리를 대신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늘 후련해지곤 했다. 드라마는 어쨌든 기승전결을 맞이하니까.
엄청난 훈련과 노력, 타고난 재능과 본능 모두일 테지만 꼭 한번 연기 접근법에 대해 묻고 싶었다. 가상의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놀라운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말이다. “연기 선생님이 딱 한 분밖에 안 계셨거든요. 드라마 제대로 시작하면서부터는 혼자 그냥 했고요. 그때 선생님께 배운 건 ‘진짜가 아니면 하지도 마’였어요. 그래서 그 상황에 나를 갖다놓는 것 말고는 테크닉이 따로 없어요.” 서현진은 전교 1등의 공부 비법은 교과서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낭만닥터 김사부> 하면서 한석규 선생님께 배운 게 있어요. 선생님은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항상 ‘보고 듣고 말하자!’ 말씀을 하세요. 그게 연기의 기본이라는 거죠. 사실 긴장해서 내 것만 말하고 제대로 못 듣는 경우가 많아요. ‘보고 듣고 말하기만 하면 되지’ 늘 생각하면서 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서현진은 테크닉이 뛰어나서 어떤 상황에서든 안정적으로 연기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했다. “직구로 정 한가운데를 치는 느낌”은 아니라고도.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라 한때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운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다양한 커리큘럼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어떨 때는 콤플렉스도 있었어요. 지금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어요.” 여전히 그런 연기에 감탄한다면서도 덧붙였다. “그런데 재미로 따지면 마음을 가지고 하는 쪽이 훨씬 재미있어요.”
인물과 자신을 딱풀로 붙이기 전, 서현진은 인물의 과거를 본다. 인물의 창조주인 작가가 A4 용지 서너 장에 적어놓은 내용이다. “시놉에 있거나 작가분이 주시는 것들이죠. 그걸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데 저는 ‘상처’로 사람을 좀 붙이는 편이에요. 그게 붙으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굴러가요.” 상처에 딱지가 앉고 또다시 상처가 나도 우리는 살아간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살아가잖아요. 그게 삶인 것 같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큰 사건이 있어도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가지 않는 이상 출근하잖아요. 그런 삶을 담담하게 그냥 또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게 제일 슬프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전 평범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다 특별하고 다 이상하고요(웃음). 저는 그런 작품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수심에 잠겨 기다리던 지하철이 왔음에도 발을 내딛지 못하는 순간, 이별을 하고 몇 날 며칠 울다가도 밥을 욱여넣는 순간.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그저 사랑만 하거나 마냥 일만 하지 않아서 그게 텔레비전 바깥의 우리라서. 서현진을 통해 그걸 확인할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판타지적인 설정이 있었던 <뷰티 인사이드>에서도 현실감이 들었다. 그래,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완전 다른 사람으로 외모가 좀 바뀔 수도 있지. “그런 설정도 말만 되면 상관없어요. <뷰티 인사이드>도 어떻게 하면 말이 되게 보일 수 있을지 제일 먼저 고민했어요. 흡혈귀나 좀비가 나오는 작품도 제가 하면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웃음).”
서현진에 관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작품을 시작하면 그 인물과 그녀가 한 몸처럼 섞인다는 것이다. “일단 작품에 들어가면 캐릭터랑 저랑 구분이 별로 없어지는 타입이에요. 현장에서도 캐릭터인지 나인지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일부러 그렇게 해요. 내가 뭘 해도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안 봐주겠지? 이런 마음에 초반에는 일부러 캐릭터처럼 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저절로 되더라고요.” 이미나 작가는 제작 보고회에서 “서현진 배우가 ‘눈물이 나는데 내가 우는지 다정이가 우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서현진 배우가 강다정 그 자체니까 그냥 와서 하고 가는 거 같다”고, 정지현 감독은 “촬영장에 서현진이 와서 잘 지내다 가고 있다”고 촬영 후기처럼 말했다.
앞서 ‘상처’라고 표현했지만 서현진이 연기한 인물들은 상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좌절하고 때론 현실과 타협하기도 했지만 결국 용기를 냈다. 해야 할 말을 했고 나가야 할 방향으로 행동했다. 내겐 그 지점이 늘 보고 싶은 판타지로 여겨졌다. “대본 속의 인물들은 늘 저보다 나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부러웠던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도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살지?’ 했고요.” 그녀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인간상에 대해 듣고 싶었다. 서현진이 골라 들려준 단어는 ‘생존자’였다. “자기를 잘 다져서 사는 사람들, 험한 상황이 있더라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때가 묻지 않거나 순수한 것과는 좀 달라요. 자기를 잘 가꿔서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서현진은 가만히 덧붙였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처음 대본을 마주할 때부터 작품을 떠나보내기까지 무수한 과정 중 서현진이 가장 좋아하는 단계는 ‘촬영장에 있을 때’다. 연기 얘기로 한창 수다 떨 때가 정말이지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촬영장에 가면 기본적으로 모니터석 뒤에서 수다를 많이 떨어요. 어떻게 놀지 궁리하다가 연기하고 또 수다 떨고. 그런 과정이 모두 다 즐거움이죠. 그런데 전 정말 딱 촬영장에 있을 때만 좋은 것 같아요. 그 외의 것에 서툴거든요. 아직도 긴장을 많이 하고, 아직도 내 일 같지 않고요. 조금은 스트레스가 되니까 촬영장에 있을 때 제일 편하죠.” 문득 나는 <블랙독> 교무실이 떠올랐다. 진학부 선생님들은 중간고사 문제를 내며 머리를 싸매고 학생부를 정리하며 밤을 지새우고 커피 한잔하는 시간에도 학교 얘기만 했다. 모두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블랙독> 찍으면서 미란 언니, 창훈 오빠랑 만날 연기만 얘기했어요. 우리끼리 똑같은 얘기 진짜 3박 4일 동안 한다고 하면서도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언니, 연기를 너무 디테일하게 하고 싶어.’ ‘얼마큼?’ ‘속눈썹 한 올까지 다.’ ‘지겨워 진짜 지겹다.’ 이러면서요(웃음).” 사실 직업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이루는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직업이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내 고백에 서현진은 ‘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속눈썹 한 올까지 표현하고 싶다고 했을 때 라미란이 주는 답은 늘 같다. ‘그냥 해.’ “작품 선택할 때 그런 얘기를 주로 했던 것 같아요. ‘야, 고민하지 말고 그냥 앞에 있는 거 해. 재다 보면 아무것도 못해. 하다 보면 좋은 거 걸려.’ 근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밖에 서현진이 연기할 때 환기가 되거나 ‘으샤!’ 힘이 나는 계기는 다른 사람의 연기론을 듣는 것이다. 요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인터뷰어로 나선 키키 키린 인터뷰집 <키키 키린의 말>을 읽고 있다. “키키 키린이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둘이 대담한 내용이에요. 울며 웃으며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아껴 보고 있어요. ‘내가 틀리지 않게 가고 있어’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맞아!’ 하면서 힘을 받고요.”
배우라는 직업과 연기하는 과정은 서현진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드라마 안 했으면 사람을 잘 몰랐을 거예요. 정말 집 안에만 있기 때문에 고인 물이에요. 시야도 좁고 루틴도 거기서 거기고. 드라마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본 속 인물을 들여다보면서 나 스스로도 들여다봐요. 드라마를 하면서 성장해가고 있어요. 안 했을 때보다 했을 때가 훨씬 나은 사람이에요. 배우라는 직업은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어요.”
다만 개인 삶을 노출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에도 서현진은 작품 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배우에 속한다. 그녀의 근황은 절친으로 알려진 배우들의 인스타그램에서 언뜻 드러날 뿐이다. 자연인 서현진의 삶은 한 문장으로 “집에서 요리하고 강아지랑 놀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로 요약된다. SNS를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이유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지만 결국 결론은 배우로 귀결됐다. “완벽주의자가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내가 썩 만족스럽지 않나 봐요. 그래서 배우를 하며 다른 인물로 잘 도망갈 수 있어요.” 그러므로 앞으로도 자연인 서현진을 SNS에서 보긴 힘들 듯하다. 서현진은 “드라마를 꾸준히 하겠습니다”라며 히히 웃었다.
배우는 감각의 세포를 촘촘하게 부여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특히 인물의 대사나 몸짓을 세세하고 생동감 있게 운용하는 서현진을 보며 나의 가설이 맞다고 여겼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섯 가지 감각을 모티브로 오늘 촬영을 진행하며 어떤 감각이 가장 예민한지 물었다. “청각이죠. 그래서 연기할 때도 조그만 소리라도 들리면 금방 집중이 깨져요. 티는 사실 잘 안 내지만.” 예민하기 때문에 배우로서 도움이 되는 지점도 있다. “제 소리를 제가 듣죠. 그래서 캐치가 잘되죠.” 예민한 청각만큼 서현진이 내는 발성과 딕션은 독보적이다. 많은 팬들이 ASMR로 삼는다는 낭창한 목소리. 어쩐지 안심이 되는 목소리. 딕션 구사의 원칙을 묻자 “ASMR로 틀면 못 주무시는 거 아닌가요. 너무 카랑카랑해서”라면서도 “상대 배우가 연기할 때도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대사를 한다 정도? 그래야 상대 배우도 똑같이 연기할 수 있으니까요”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 수집한 TMI를 하나 전하자면 서현진이 사랑하는 ASMR은 요리할 때 나는 소리다. 지글지글 튀김 소리, 드르륵 탁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 “틀어놓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죠(웃음).”
‘로맨스 장인’, ‘로코 퀸’ 수식어는 유효하지만 우리가 그렇듯 로맨스는 언제,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2015년 <식샤를 합시다 2>를 마치고 로맨스를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던 그녀와 2021년 힐링 로맨스 장르에 임하는 서현진은 같고도 다르다. <너는 나의 봄>에는 힐링 로맨스라는 장르가 붙어 있지만 사는 얘기에 가깝다. 물론 혼종 장르가 요즘 드라마 트렌드긴 하다. 그럼에도 로맨스가 가지는 미덕에 대해 물었을 때 서현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다 하니까. 모두들 사랑을 하니까요.” 로맨스를 대하는 마음은 넓어진 듯 보였다. “얼마 전에도 작품 같이 하는 신인 친구가 ‘언니는 설레는 연기할 때 진짜 설레요?’ 이렇게 묻더라고요. ‘주로 설레지’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진짜 설레야 되거든요. 진짜로요(웃음).” 서현진의 로맨스 대상은 확장되는 듯 보인다. 그녀의 차기작은 치매를 주제로 한 영화 <디멘시아>, 괴팍하고 못돼먹은 로스쿨 교수로 등장할 <왜 오수재인가?>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다. 그저 모두가 각자 분야에서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연기를 열심히 한다”고 했던 서현진의 담백한 직업관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얘길 꺼냈을 때 서현진은 변함없이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억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예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엄마도 당시에 ‘잘 잊히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셨거든요. 저도 작품에서 좋은 배우로 재밌게만 봐주시면 돼요. 대중 예술의 기능이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맥주 마시며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 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대단히 심오할 필요가 없어요. 만드는 사람이 대단히 심오하게 만들면 돼요. 보는 분들은 재미있게 보시면 되고요.”
시청자 서현진에게도 그렇게 기능한다고 했다. “그럼요. 그럼에도 너무너무 좋아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있지만 그건 내가 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는 바람 역시 변하지 않았다. “좋은 인성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잘하면서 내가 할 일을 ‘따박따박’ 하는 것. 그러면 계속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녀의 직업관과 가장 먼 단어는 역시 야망, 욕심, 성공이었다. “맞네요. 그렇지만 드라마는 성공하면 좋겠습니다. 성공하면 너무 좋겠습니다.”
<너는 나의 봄>이 봄날을 맞이하기까지 수개월이 남아 있었다. 서현진의 봄날도 아직인 듯했다. “저의 봄날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아, 나이 70에 오면 좋겠어요. 저도 오스카 가보고 싶어요(웃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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