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생 선수들의 도쿄 올림픽 이야기
도쿄 올림픽을 한국의 MZ세대 선수들이 ‘쿨림픽’으로 만들었다. 결과에 상관없이 경기를 즐길 줄 알고, 패한 상대 선수에게 포옹을 건네며, 팬들을 위해 귀국길 브이로그를 찍는다. 그 주역은 2000년대생 장준, 박지현, 조성재, 안세영, 신유빈! 그야말로 스포츠의 New Beginnings!
삐약! 신유빈의 인생 기합
도쿄 올림픽 이후 신유빈은 ‘국민 여동생’으로 불린다. 14세 11개월에 한국 탁구 역대 최연소로 국가 대표에 발탁돼 17세에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다. 개인 단식 32강부터 화제였다. 자신보다 마흔한 살 연상인 룩셈부르크의 노장 니샤렌을 이겼다. 니샤렌은 중국 국가 대표 팀 출신으로 세계 대회 메달리스트다. “초반엔 조급했지만 천천히 하자, 줄 것 주고 할 것 하자고 생각하니 경기에 여유가 생겼어요.” 니샤렌은 경기 후 “신유빈은 새로운 스타이며 기술도 훌륭하다”고 말했다. 신유빈이 꼽은 기억에 남는 또 다른 경기는 단체전 8강. 전지희, 최효주 선수와 함께 출전했지만 독일에 2 대 3으로 역전패했다. 경기 후 신유빈은 눈물을 보였다. “언니들이 잡아준 경기를 제가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탁구 선수로서 이런 응원은 처음이라 보답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울었나 봐요.”
신유빈의 진심을 아는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을 찾아가 응원 댓글을 달았다. 인스타그램은 훈련 모습과 함께 17세 소녀의 평범한 일상과 패션 스타일로 팔로워가 늘어 현재 15여만 명이다. “팔로워가 벌써요? 올림픽 후에 가족과 떠난 제주 여행에서도 알아봐주는 분이 있어서 얼떨떨했어요. 저를 좋아해주시다니!” 팬의 요청으로 귀국길 브이로그를 찍은 것이 계기가 되어 유튜브 채널 ‘삐약 유빈’이 개설됐다. 삐약은 신유빈이 경기 중에 넣는 기합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제가 노란 유니폼을 입어서 더 ‘삐약’으로 들렸나 봐요. 다음엔 검은색을 입으려고 했는데 결국 노란색을 입었어요. 지금은 삐약이란 별명이 친근해요.” <보그> 촬영 때는 MBC <놀면 뭐하니?> 녹화도 있었다. 신유빈은 2014년 열한 살에 국가 대표 상비군 탁구 선수로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 적 있어 유재석과의 재회로 화제다. 다섯 살 때는 탁구 신동으로 SBS <스타킹>에 출연했다. “부끄러워서 그 영상은 못 보겠어요. 강호동 아저씨께 뚱뚱하다고 말해서 지금도 죄송해요.”
올림픽이 끝나면 휴식 겸 영광을 즐겨야 마땅하지만, 신유빈은 훈련과 함께 이 일정을 감당하고 있다. 8월 17~19일 무주에서 열리는 2021 세계 선수권 파이널스에 출전할 대표 선수 선발전을 준비 중이고, 방역 상황에 달렸지만 일본 프로 탁구 T리그의 2021-2022 시즌을 뛰기 위해 훈련 중이다. 여행도 좋아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도 가고 싶지만 어느 정도는 참아야 한다. “좋아하는 떡볶이, 간장게장은 잘 먹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신유빈은 자신의 장점으로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될 때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꼽았다. 힘든 훈련도 웃으며 해왔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즐겨야죠. 가끔 못 견딜 만큼 쌓이면 크게 울고 다시 훈련해요. 탁구가 그만큼 좋거든요.” 하지만 인생 목표는 더 크다.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지만, 탁구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픈 친구들에게 기부도 하고 주위에 베풀며 어우러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조성재가 유영하는 법
“아쉽죠. 결과에 대해서는 아쉬운 것밖에 없어요. ‘왜 저것밖에 못 나왔지? 평소만큼만 했어도 결승에 가는 건데.’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따라줬어요. 자신감도 없었고,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나 봐요.” 올림픽 남자 100m 평영에서 조성재가 터치 패드를 누른 시간은 59초 99. 1분의 벽을 깨고 예선 4조 1위로 들어왔지만 다른 조에서 16명의 더 빠른 선수들이 나왔다. “저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요. 서른 살 넘어 2032년 올림픽까지 나가는 게 목표예요. 세계 신기록 세우고 금메달 따야죠.” 다행이다. 조성재가 지나간 버스에 미련을 두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다.
조성재는 수영을 하던 누나를 따라 처음으로 물에 들어갔다. 물이 좋아 시작한 취미가 인생을 바꿨다. 날 때부터 아쿠아맨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중상위권의 평범한 선수였다. 서울체고 2학년 때 하영일 코치를 만나며 선수 인생에 변곡점이 생겼다. “코치님 덕분에 영법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록 단축에 큰 도움을 주셨죠. ‘수영이 재미있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 인터뷰는 꼭 나갔으면 좋겠어요.”
조성재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태극 마크를 달았다. “터치 패드를 찍고 들어왔는데, 제 이름이 전광판에 있었어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죠. 어릴 때부터 국가 대표가 되는 게 목표였으니까.” 처음 참가한 올림픽도 낯선 경험이다.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실감이 나더라고요. 도쿄에 도착해 수영장에 오륜기가 걸린 걸 보고 소름이 돋았어요. ‘드디어 올림픽에 왔네!’ 어릴 때 꿈꾸던 모습이 눈에 펼쳐진 순간이었죠.”
승부욕 역시 지금의 조성재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연습할 때 기록이 안 나오면 극도로 예민해져요. 올림픽 때 숙소를 같이 쓰던 친구도 말하더라고요. 엄청 예민하고 날카로웠다고.” 마음을 다잡는 방법은 아직도 찾는 중이다. 이번 올림픽 기간에는 유튜브로 ‘마음이 안정되는 음악’, ‘불교 경전’ 등을 들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요즘 관심사에 대해 묻자 “롤(리그 오브 레전드)이에요. 저 얼마 전에 다이아 찍었어요”라고 답했다. 스무 살다운 대답이다. 조성재가 수영만큼 좋아하는 건 역시 게임이다. “또래 운동선수 중에 톱 10에 들걸요?” 그의 눈에 생기가 돈다. 신발 끈을 느슨하게 풀어 헤친 아디다스 이지부스트를 신고 있어서 패션에 대해 물었다. “작년에 이지에 꽂혀 세 켤레나 샀어요. 한 켤레는 안 신어서 중고나라에 팔았어요(웃음). 패션, 좋아하죠. 깔끔하게 입는 걸 좋아해요.” 어쩐지, 그의 영법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최근 조성재는 카메라에도 ‘빠졌다’. 올림픽이 끝나고 우연히 들른 전자 기기 매장에서 카메라의 ‘찰칵’ 소리에 매료돼 그 자리에서 덜컥 구매한 것이다. 지금은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누르며 사진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다. “작년에는 기타를 쳤어요. 잘 치진 못해요.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칠 수 있을 정도 수준? 이런저런 취미를 갖는 게 제 ‘멘탈’ 관리에 도움이 돼요. 너무 수영에만 빠져 있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고요.”
올림픽이 끝났건만 조성재는 쉴 틈이 없다. 일주일 휴식 후 바로 제주로 내려간다. 전국체전 준비에 돌입해야 하니까. 체전이 끝나면 아시안게임이 기다린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인데, 물속에서 너무 빨리 철이 든 걸까. 도리어 운동하는 게 쉬는 거라며 찡긋 웃는다. “물이 제일 편해요. 오롯이 저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안세영의 후회 없는 스무 살
“정말 후회 없을 만큼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지난여름의 안세영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둔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한 덕분에 컨디션이 좋다는 걸 스스로 느낄 만큼 자신 있었다. “스무 살에 겪는 올림픽은 살면서 한 번뿐이잖아요. 긴장만 하지 않으면 잘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국가 대표 선발전 전승 기록, 한국 선수 최초 2019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신인상, 올해 BWF 월드 투어 우승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성장한 2002년생 ‘셔틀콕 천재’의 올림픽 첫 무대. 여자 단식 세계 랭킹 8위인 그녀에게 한국이 거는 기대는 당연했다. 조별 리그 1차전부터 이어진 16강전까지 세트 스코어 2 대 0으로 끝낸 안세영의 플레이는 침착하면서도 끈질긴 그녀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 있었다. 무릎이 까지든, 발목을 접질리든 툭 털고 일어나 끝까지 셔틀콕을 쫓아가는 투지에 사람들은 빠져들었다. 8강전에서 세계 랭킹 1위 중국 천위페이를 만나 도쿄에 더 이상 머물지 못했을 때조차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다음 올림픽을 기대할 만큼 ‘안세영다움’은 멋졌으니까.
“그래도 아쉬워요. 올림픽이 아직 안 끝난 것 같기도 해요.” 올림픽이 끝난 지금, 끝나지 않은 건 안세영의 훈련 루틴뿐이다. 귀국 후 코로나 검사를 위해 딱 하루 격리하고 스스로 소속 팀(삼성생명) 훈련에 돌입했다. “운동은 하루 쉬면 다시 시작하는 게 정말 힘들거든요. 하루 쉬면 이틀 쉬고 싶고, 이틀 쉬면 사흘 쉬고 싶고… 그게 싫어서 가능하면 매일 하려고 해요.” 여섯 살 때 처음 라켓을 쥐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해 만 15세에 최연소 국가 대표가 된 이후 더 깊이 있게 이어온 훈련의 시간이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운동을 하고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광주로 향하는 스케줄이다. 집에 가서도 홀로 45층 아파트 계단을 뛰어오르거나 전남대학교 운동장을 뛰며 하루를 채운다. 올림픽이 끝나면, 딱 한 잔 해보고 싶다던 맥주도 아직 못 마셨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정말 느낀 게 많았어요. 아직 국가 대표 주전을 하기에는 부족하구나 싶었죠.” 태극 마크를 달고 임한 첫 경기 상대도 천위페이였다. 2 대 0으로 눈물을 머금었다. “정말 많은 분이 응원하고 계시다는 걸 느꼈는데도 15 대 8, 20 대 13… 점점 점수 차가 벌어지니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날지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어렸으니까, 그게 정말 창피했어요.” 경기 직후 인터뷰할 때마다 울먹이는 이유는 함께 고생한 코칭스태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지 손에 쥐지 못한 메달 탓이 아니다. “장영수 코치님이 새벽이고 밤이고 제가 훈련하고 싶다면 시간 맞춰 매번 나와주셨거든요. 훈련밖에는 답이 없어서 그랬는데. 경기 결과가 나쁘면 그 생각부터 나서 힘들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안세영은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써오던 훈련 일지는 이제 경기 분석으로 내용이 바뀌었고 주위의 기대도 즐긴다. “‘천재 소녀’, ‘기대주’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요. 처음에는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칭찬을 부담으로만 느꼈어요. 그런데 스무 살이 된 뒤 달라졌어요. 은근히 관심받는 거 좋아하거든요(웃음).”
경기 중 뉴스나 SNS 댓글, 팬들이 만들어준 영상도 찾아본다. 자신이 몰랐던 단점도 깨닫고 장점으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때로 결과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이 복잡할 땐 별을 본다. 원래는 베이킹이 취미인데 진천선수촌에선 빵을 만들 수 없으니 카메라로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며 머리를 식히고 다시 뛰었다. 그런 식으로, 안세영 스스로 프로다운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는 중이다. “제 경기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환호할 때 제일 행복해요. 그때 쾌감이 정말 커요. ‘할 수 있을 때 하자’는 마인드거든요. 앞으로 뭔가 대단한 목표보다 아직 다 해보지 않은 세계 대회 우승부터 차곡차곡 해보려고요.” 그래도 하나 더 갖고 싶은 꿈은 없는지 물었다. “나중에 제 이름을 단 경기장은 하나 만들어보면 좋지 않을까요? 운동하고 싶을 때 언제든 할 수 있게요.” 경기장 밖, 그녀의 목소리는 작지만 솔직하고 거침없다. 바로 지금, 스무 살 안세영이므로.
태권도 정신처럼 단단한 장준
장준의 SNS 팔로워는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네 배 이상 늘었다. 동메달을 손에 든 사진이 피드에 올라오자 순식간에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그중 장준의 ‘대댓글’이 눈에 띈다. “DM으로 축하한다고 정말 많이 연락을 주셨는데 꼭 답장 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이라는 수식어를 두 번 사용했고, 힘주어 ‘꼭’이라는 말로 기다리는 팬을 안심시켰다. 지금도 장준은 쉬지 않고 답장을 하는 중이다.
효와 예를 중시하는 태권도지만 세상 모든 태권도인이 다 장준 같을지 궁금해졌다. 조금 느리지만 또박또박 이야기하고, 표정이 다양하진 않지만 눈빛은 언제나 진심이다. 아는 체를 해오는 모든 이에게 깊이 고개 숙여 하는 인사도 몸에 익어 보였다.
일곱 살의 장준은 형이 하는 건 뭐든 좋아 보였다. 형의 태권도장을 무작정 따라간 날이 태권도와의 첫 인연이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태권도 지도자였던 지인에게 아들의 실력을 알린 것이 선수 장준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오늘의 장준을 만든 셈이다. 2018년 열아홉 살 장준은 본격적인 ‘장준 시대’를 만들어간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1위, 금메달, 챔피언을 석권했다. 이듬해에는 세계태권도연맹 갈라 어워즈가 선정한 올해의 남자 선수상을 탔다. 단 한 명에게만 출전 기회(-58kg급)가 주어지는 도쿄행 티켓 역시 그의 차지였다. 1등이라고 자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첫 올림픽 출전이라고 흥분하거나 중압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 역시 고요한 호수 같은 성격 덕분이다. 하지만 도쿄 올림픽이 다가오자 ‘어금준(어차피 금메달은 장준)’의 무게가 전신을 짓눌렀다. 태권도를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경기 당일, 컨디션 난조로 결국 준결승전에서 튀니지의 모하메드 칼릴 젠두비 선수에게 패하고 만다. “상대 선수는 각 상황에 따른 대처 방안을 철저히 준비해왔어요. 그가 더 잘했기 때문에 이긴 거예요. 당연히 축하해줘야죠.” 준결승전이 끝나자 장준은 칼릴 선수와 포옹했다. 이어 승리의 기쁨에 흐느껴 우는 튀니지 감독도 찾아가 축하의 포옹을 건넸다.
태권도를 시작한 이후로 이기는 데 익숙한 그에게 패배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신기한 건 올림픽 기간 내내 그를 괴롭힌 중압감이 패배 이후 치유됐다는 사실이다. 그 후 이어진 동메달 결정전에서 장준은 헝가리의 오마르 살림 선수를 30점 차로 이겼다. 장준 스스로는 평소 기량의 절반밖에 발휘 못했다며 아쉬워했지만, 해설위원들은 태권도에서 가능한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보여줬다며 극찬했다.
장준은 동메달 수상자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경기장을 돌 때 그간의 훈련 과정과 부모님, 은사를 떠올렸다. 과격한 경기 중에도 흥분한 적 없는 그지만 올림픽 무대에서 퇴장한 후 한참 울었다. 그 자리엔 고등학교 은사인 송명섭 코치도 함께였다.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송명섭 코치는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준의 멘토였다. 장준은 그의 인품을 좋아하고 닮고 싶어 했다. 이미 물들어 있음에도 본인은 더 자신을 가다듬어갔다. 도쿄 올림픽이 끝나고 얻은 교훈도 마음과 관계 있다. “긴장과 부담을 덜어내는 마인드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여유롭고 편안한 경기 운영이 장점인 그이지만 더 견고해지기 위해 전진할 것이다.
여자 농구의 내일이 된 박지현
13년 만에 한국 여자 농구가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스페인(3위), 캐나다(4위), 세르비아(8위)와 함께 예선 A조에 편성된 한국 팀은 안타깝게도 3패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세계 랭킹 19위인 한국 팀은 강호들과 근소한 점수 차로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특히 4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패한 세르비아전에서 박지현은 다시 한국 여자 농구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도쿄 올림픽 이전에 이미 FIBA(국제농구연맹)가 선정한 ‘지켜볼 젊은 선수 10인’에 이름을 올린 그녀는 세르비아전에 선발로 출전해 팀 내 최다 득점과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이다.
“대진표를 보고 걱정이 앞섰지만 금세 마음이 바뀌었죠. 상위권 선수들과 언제 겨뤄보겠어요?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을 안고 경기를 기다렸어요.” 주변에서 “30점 차만 아니면 돼, 20점 차로만 져도 잘한 거야”라고 할 때마다 박지현은 오기가 생겼다. “아직 상대하지 않았는데 왜 다들 우리가 진다는 건지… 부정적인 생각은 옳지 않아요. 경기를 위해 내 몫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여겼죠.”
박지현은 도쿄 올림픽에서 얻은 성과를 팀원들과 전주원 감독에게 돌렸다. 전 감독은 엄한 편이지만 선수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보듬으며 팀을 이끌어왔다. 박지현은 팀 내 정신적 지주인 김정은 선수에게도 각별히 고마워했다. 김정은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한국 여자 농구가 올림픽 티켓을 쥐게 한 공신이다. “국가 대표 팀 전원 모두 좋은 분들이에요. 그들 옆에 있으면 덩달아 저도 좋은 선수가 돼가는 것 같아요. 팀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도 설 수 있었고. 팀 코리아죠!”
박지현은 열 살에 동네 친구 따라 유소년 농구 클럽에 등록했다. 중학생 유망주를 거쳐 숭의여고의 전승 행진을 이끌었고, 2018-2019 여자 프로 농구 신인 선수 선발에서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프로에 입성했다. 입단 후 정규 리그 15게임에 출전해 두각을 보인 뒤, 2019 정규 리그 시상식에서는 기자단 투표 101표 중 96표를 얻으며 스타 신인 선수상을 수상했다. 박지현의 농구 인생에 굴곡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감만으로 프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훈련량도 어마어마했으며 입단하자마자 곧장 프로 경기에 투입된 점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단단한 성격으로 모두 이겨냈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고 있다. 드물었을 사진 촬영에도 박지현은 호리촌트에서 머뭇거림 없이 당당했고, <보그> 스태프와 스스럼없이 농담하는 여유도 보였다.
만약 농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농구 안 했으면, 농구 했을 텐데요.” 박지현은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농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10대 때부터 큰 주목을 받고, 태극 마크를 달았으며, 스물두 살인 지금 여자 프로 농구의 희망으로 여겨지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더 노력해서 언젠가 미국 여자 프로 농구(WNBA) 진출이란 꿈도 이루고 싶어요. 물론 어디서든 최선을 다할 거예요.”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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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빛누리(프리랜스 에디터), 김선영, 김미한(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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