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의 시적이면서 강렬한 작품 ‘체리 블로섬’
현대미술계의 스타인 데미안 허스트가 캔버스에 벚꽃을 흩트렸다. ‘체리 블로섬’ 연작을 파리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는 왜 이렇게 시적이면서도 강렬한 작품으로 찾아왔을까?
때는 2020년 11월, 그가 내리 3년을 일한 후였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공식적으로 ‘체리 블로섬(Cherry Blossoms)’ 시리즈를 완성했다. 100여 개 XXL 사이즈의 캔버스 중 30개를 파리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 공개했다. “여러 은유적 요소로 가득한 공간이죠. 전시관의 조명이 공간에 끊이지 않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데미안의 작품을 감상할 때 특히 더 긴장감 있게 느껴질 겁니다.” 관장인 에르베 샹데스가 말했다. ‘체리 블로섬’의 일본어 명칭인 ‘사쿠라’로도 불리는 일련의 작품은 1950년대 ‘액션 페인팅’이라는 기법의 영향 아래 각기 다른 터치로 작업했다. 완전한 구상파도, 명백한 추상파도 아닌 작품으로, ‘체리 블로섬’만의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감성으로 관객을 매혹할 것이다. “데미안의 작품은 광채가 있으면서도 비극적입니다. 생명에 늘 큰 의미를 부여하죠. 작품과 관객 사이에 어떤 매개체도 없이 아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주제를 이미 파악하고 있더라도, 작품의 구조나 배치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샹데스 관장이 설명했다.
1988년 런던의 골드스미스대학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프리즈(Freeze)> 전시를 통해 데미안 허스트는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 yBA) 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며 대중을 끊임없이 놀라게 하고,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며, 충격을 주었다. 포르말린에 박제된 상어, 해체된 소, 보석으로 뒤덮인 두개골, 알약으로 가득 찬 약품 캐비닛, 해저 보물에 관련된 페이크 다큐… 그러나 ‘스폿 페인팅(Spot Painting)’ ‘비주얼 캔디(Visual Candy)’ ‘베일 페인팅(Veil Painting)’ 같은 회화에 대한 그의 본능적 욕구 역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체리 블로섬’을 수년에 걸쳐 풍요롭게 만들어온 요소인 동시에 그의 가장 영적인 지향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런던에 위치한 그의 거대한 아틀리에로 우리를 초대했다. 어떠한 터부도 없이 자유롭게 그의 삶과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유르겐 텔러와의 촬영은 어땠나요? 아주 좋았어요. 유르겐의 아들과 내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라 이미 아는 사이거든요. 유르겐이랑 잘 안 맞는 게 있다면, 그 친구는 축구광이라는 겁니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의 팬인데요, 리즈 출신이기는 하지만 저는 리즈 유나이티드에는 관심도 없거든요. 전 당구를 좋아합니다.
이번에 완전히 쏟아붓기로 결심한 것 같은데요. 근본으로 회귀하는 걸까요? 아니면 새로운 출발이라고 봐야 할까요? 둘 다죠. 어머니도 굉장히 창의적인 분이셨는데, 예술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으셨어요. 집 출입문에 파란 점을 그리곤 하셨는데, 그게 ‘스폿 페인팅’과 유사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죠. 어릴 때는 어머니가 그린 그림을 만져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제가 아무렇게나 다루니까 만지지 못하게 하셨죠. 그럴수록 반항하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잊고 있던 느낌이네요.
벚꽃만 그린 100여 개의 대형 캔버스 작품에 영감을 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한여름 날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진짜 나무만큼 높이,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느낌을 줄 정도로 큰 그림이어야 했죠. 바로 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요! 정원에 벚나무가 있는데, 매년 꽃이 피는 2주를 관찰해왔어요. 어떤 통제와 환희 사이에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빛나는 꽃잎 표현을 통해 그 느낌을 만들어내려고 수많은 실험을 해야 했습니다. 쇠라나 모네, 보나르의 작품 중에도 벚나무를 그린 것이 있는데, 그 강렬한 색채가 어릴 때 방문한 파리의 추억을 되살리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죠. 하지만 에너지가 없는 잭슨 폴록이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말 그대로 회화라는 느낌을 줍니다.
액션 페인팅에 가까운 작업 방식이 힐링이 되나요? 그렇죠, 근본적으로 자연스러운 부분이 있거든요. 중력 속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그 후에는 사라지는 겁니다. 삶과 죽음, 이 끊이지 않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열여섯 살 먹은 아들이 그림은 재미없다기에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설치 작품이었던 ‘약국(Pharmacy)’만 맘에 든다지 뭡니까! 익스트림 스포츠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을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다고 제가 반박했죠. 작업할 때 아주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낮게 내려가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발을 뗀 느낌이랄까요. 그림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고, 이 말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색상과 형태가 있기에 새로움을 추구하게 됩니다.
색채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봐도 될까요? 맞습니다. 색채는 아주 직관적으로 다가오는데,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탕을 파는 가게처럼 색깔을 섞어야 합니다. 보나르는 아마 이 지구에서 가장 색상을 잘 쓰는 아티스트일 겁니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과장되고 공격적이기까지 하죠. ‘체리 블로섬’은 흰색으로 시작해 밤색과 파란색을 포인트로 썼는데, 아주 끔찍하기만 했죠. 빛의 스펙트럼이 색상을 다양한 차원으로 태어나게 함을 깨닫기 전까지 그랬죠. 특히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전광판이나 대형 화면 같은 거대한 형태에서 그런 점이 더 잘 드러납니다.
‘체리 블로섬’ 시리즈는 고전파와 추상파의 만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작품에 붙인 ‘대천사 라파엘 블로섬’ ‘케루빔’과 같은 명칭이 이 부분을 암시한 것일까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 두 개의 경계에 걸친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추상화에 구상파적 느낌을 불어넣는 것을 우려했어요. 수틴, 데 쿠닝이나 고야의 작품을 보면 그들이 그림을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그린 벚꽃은 완전히 사실적이었지만 추상적인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런 두 가지 느낌을 섞은 것입니다. 고통에서 생겨나는 카오스적 에너지를 통해 움직여왔습니다. 다시 한번 그런 위험을 안고 시도하는 거죠.
예술이 당신의 삶을 구원했나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이며,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어요. 창작 시기 중 이런저런 때가 더 낫다는 평도 듣습니다만, 다 부질없는 얘기죠.
유명한 사진 ‘데드 헤드와 함께(With Dead Head)’도 거기에 포함되겠죠. 죽은 시체의 머리 옆에 10대 소년이 있는 사진이죠? 하하. 아주 다양한 작품을 해볼 수 있어서 운이 좋았죠. 199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어요. 많은 사람한테 축하받았지만, 스스로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죠. 그런데 그 생각이 오래가지 못해 위험해졌죠. 사다리의 위아래, 양 끝에선 쉽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가운데에 잘 위치해야죠. 조각, 설치미술 이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작 비용을 질문하는데요, 특히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를 만드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궁금해하지만 그림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아요. 예를 들어 모나리자의 가치를 제작 비용으로 매기는 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어시스턴트를 두는 것에 종종 비난을 받았죠. 미켈란젤로나 다 빈치도 조수를 두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체리 블로섬’에는 어시스턴트의 도움이 없었다죠? 전혀 없었습니다. 코로나 시대가 왔을 때쯤 제 그림 작업이나 화구 세척, 마음에 들지도 않는 음악을 틀어주는 어시스턴트를 두세 명 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 혼자 작업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 고요함을 즐기게 됐죠.
작업할 때 어떤 음악을 트나요? 비틀스를 듣습니다. ‘알 수 없는 내일(Tomorrow Never Knows)’을 가장 좋아합니다. 곧 다가올 혼란에 대한 노래죠.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일렉트로 사운드도 좋아합니다. 팝캔(Popcaan) 같은 젊은 자메이카 래퍼의 노래도 듣고 지미 클리프(Jimmy Cliff)의 레게 음악도 듣습니다. 펑크는 밴드 더 클래시(The Clash)를 주로 듣습니다. 친구인 조 스트러머(Joe Strummer)가 활동하던 밴드죠. 살아생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좀 어색하지만요.
행위 예술가인 리 보워리(Leigh Bowery)와도 가까웠죠. 런던과 뉴욕의 밤 문화를 향유하던 유명 인사였는데… 리 보워리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어느 잡지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제 모피 코트요”라고 답했죠. 당시 모피 불매운동이 엄청났는데도 말이에요. 사람들이 유감을 표하니, 거의 미친 사람처럼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럼 수백 명의 남성과 콘돔 없이 성관계하는 걸로 할게요.” 단 한 문장으로, 지루한 질문을 엄청난 해프닝으로 바꿔놓은 사건이었죠.
런던이라는 도시는 어떤가요? 어떤 것이 아티스트라는 걸 일깨웠나요? 잉글랜드 북부 출신입니다만, 런던을 늘 사랑해왔죠. 에너지가 엄청난 대도시이기 때문에 길을 잃기도 쉽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도시에서 벗어나려고 데번에 함께 살 집을 구하기도 했어요. 요즘엔 아이들이 다 커서 반대 상황이에요. 런던에서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직접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Newport Street Gallery)도 열었죠. 처음에는 제 작품이나 수집품 일부만 전시했는데, 관객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1970년대 초현실주의 미국 작가인 리처드 에스테스(Richard Estes)의 작품을 곧 전시할 예정입니다. 갤러리 관리도 아주 재미있어요.
SNS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특히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히 활동하던데요. 자가 격리 이전에는 그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시가 두 번 밀리는 동안, 제 계정 조회 수가 100만 회를 넘어가더군요. 엄청난 거죠. 게다가 영상을 찍을 수도 있고, 이를 또 포스팅한 다음 전 세계 사람과 댓글로 의견을 나누고요. 인스타그램에는 경멸할 것도 많지만, 좋은 것도 있죠. 제가 에르베 샹데스와 계약했다는 것도 인스타그램에 올라 있어요. 그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전시를 제안해 정말 기쁩니다. 정원, 건물, 조명, 모든 것이 너무나 멋지죠.
당신 작품은 종종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체리 블로섬’에도 양가적 암시를 넣어둔 듯한데요. 맞습니다. 작품은 한순간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순간은 아주 짧으면서 두 세계를 담고 있죠. 누군가는 기쁨, 사랑, 환희를 보지만 다른 누군가는 슬픔, 상실을 봅니다. 그것이 삶과 죽음이죠. 그리고 최근에는 제 앞에 남은 시간보다는 지나온 시간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나약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집에 가본 적이 있어요. 나이도 아주 많으신 데다, 본인 나이만큼 오래된 벽과 두꺼비집이 닳아서 떨어지고 있었어요. 집 전체를 아예 새로 만들고 싶을 정도였어요! 이것이 제가 ‘체리 블로섬’을 볼 때 느낀 것입니다. 그동안 미니멀리스트 컨셉의 아트를 해왔죠.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고, 시선을 새로운 곳으로 돌려보려 합니다.
죽음이 두려운가요? 어머니로부터 피할 수 없는 것에 맞서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예술에도 불가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에 대한 믿음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죠. 그렇지만 불멸을 위해 딱히 노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지켜볼 뿐이죠. 그렇게 오랫동안은 아니겠지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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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ERGEN TELLER
- 글
- SOPHIE ROSEMONT
- 크리에이티브 파트너
- DOVILE DRIZ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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