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는 반드시 박멸해야 할까?
노화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혹은 스스로를 포용하는 법을 깨우치는 은빛 한 줄기.
작년 이맘때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점검하던 내 일상에 ‘첫 새치’가 찾아온 것이다. 풍성하고 새카만 머리숱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나였지만, 그 촘촘한 모발 사이로 존재를 드러내던 흰 머리카락. 그것을 처음 발견하자마자 받은 충격이란! ‘이젠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라며 애써 쿨한 척 웃어넘겼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그 얄팍한 한 가닥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뷰티 & 헬스 전문 에디터’로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노화’라는 이름의 트랙에서 질주를 시작한 기분?
역시 기우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색이 바랜 새치는 자주 발견됐으니 말이다. 머리카락을 뽑는 것이 솔루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에 띄는 순간 모낭까지 속 시원하게 제거하면 노화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그 순간만큼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본능적인 ‘뿌리 뽑기’ 외에 다른 묘안은 없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새치를 제거하고 나서야 뒤늦게 예방에 효과적인 영양제와 두피 관리법을 검색하는 일의 반복 또 반복. 몇 달 전 우리는 젊은 세대의 ‘얼리 탈모’ 현상으로 헤어 케어 비즈니스가 고속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다뤘다. 급증하는 초기 새치 역시 여기에 한몫 거든다. MZ세대가 헤어 제품을 주로 쇼핑하는 올리브영 같은 드러그스토어에서는 새치 염색약 매출이 지난해보다 약 25% 증가했다. 30대 초·중반의 증가 폭은 훨씬 가파르다. 초기 새치를 경험하는 비율은 늘었고 그 대응 속도 또한 빨라진 것이다.
모낭 세포로 전달돼야 할 영양소가 부족해지면서 세포는 노화되고 멜라닌 색소가 줄어든다. 그로 인해 모근부터 조금씩 색이 하얗게 바래며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흰머리’가 된다. 이쯤 되면 건강한 두피와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힘든 시대처럼 여겨진다.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유전적 영향부터 불규칙한 생활 습관과 바이러스 사태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로 쌓인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 모공을 약화시키는 대기 환경, 잦은 탈색과 시술 등등. 게다가 두피가 건조해지는 쌀쌀한 날씨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새치가 생기는 원인은 심히 다채롭고도 현실적이기에 어느 하나만 콕 집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새치는 반드시 박멸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영국 <보그> 부편집장 사라 해리스(Sarah Harris)는 기다란 플래티넘 헤어스타일로 유명하다. 무려 열여섯 살에 새치를 처음 경험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흰머리에 대해 언급하는 걸 좋아하죠.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기 전까진 제 머리가 얼마나 하얗게 셌는지도 깨닫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은발이 주는 특유의 반항적 분위기를 좋아해요. 순응하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그녀의 인스타그램 메시지함에는 ‘머리가 세도록 놔두는 데 당신이 큰 용기를 줬다’고 말하는 여성들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노화의 지표로 기피되고 적대시되어온 흰머리를 많은 여성이 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지난여름 칸영화제에서 앤디 맥도웰, 조디 포스터, 헬렌 미렌 등이 회색빛 헤어스타일로 레드 카펫에서 더 돋보였음은 물론이다. 후추를 멋지게 흩뿌린 듯한 빛깔의 길고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자랑하고, 하이라이트 염색이라도 한 듯한 그들의 그레이 헤어는 ‘힙’해 보이기까지 했다. 최근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의 리부트 촬영을 진행 중인 사라 제시카 파커 역시 빛바랜 금발 아닌가.
‘안티에이징’이라는 핵심어 아래 우리는 노화의 징후를 하나하나 예민하게 발견하며, 그것을 악착같이 막고자 애써왔다. 그 행위가 오죽했으면 ‘안티(Anti)’라는 부정적 수식어가 붙을 정도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나이가 드는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여성이 늘면서 ‘에이징(Aging)’에 대한 패러다임도 변화하고 있다.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3~4주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시간과 비용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새치를 반드시 노화와 연결하지 않고 그저 여러 변화의 하나로 인식한 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회색빛 머리의 셀피를 업로드하고 소통하는 SNS 커뮤니티 @grombre는 23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거느리는 중이다.
물론 30대 초에 새치를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일이 쉽진 않다. 칠흑 같은 동양인의 모발 틈에서는 유난히 부각되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색깔로 머리를 염색해 자신을 표현하는 게 유행인 요즘, 흰 머리카락을 오히려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하이라이트 기법이나 애시 계열 컬러로 염색하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새치를 발견했을 때 그 가느다란 것들을 묵묵히 수용하기로 했다. “너 흰머리 보여!”라며 머리카락을 뽑자고 달려드는 친구의 손등을 매섭게 쳐낸 채 말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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