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 핑크빛 ‘내일’
김희선의 주변은 핑크빛이다. 자기에게 집중한 밀레니얼 아이콘을 지나 선의와 친절로 연대한 덕분이다. 드라마 <내일>을 선택한 이유 역시 생을 마감하려는 이들을 구하는 설정이라서다.
김희선이 분홍색 단발로 촬영장에 들어섰다. 드라마 <내일>(2022)을 준비하며 원작 웹툰과 싱크로율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헤어스타일이다. 영화 <와니와 준하>(2001)에서 첫사랑 이복동생 영민(조승우)과 함께하는 장면 이후론 이런 길이와 탈색은 처음이다. <와니와 준하>는 김희선의 수채화 같은 얼굴과 담백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수작. 또 하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고르라면 드라마 <웨딩드레스>(1997~1998)에서 선보인 펌, 일명 폭탄 머리다. 트렌드세터였던 김희선을 따라 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당시 드라마에서 이승연과 자매로 나왔는데, 둘은 그야말로 트렌드의 엘파바와 글린다였다. 이승연이 진행한 토크쇼 <세이세이세이>(1998)에 김희선이 출연한 편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는데 ‘시대를 앞서간 세기말 토크’로 회자된다. 어떤 질문에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솔직한 김희선은 Z세대의 선구다.
2022년에 만난 김희선도 여전히 주변을 오렌지 탄산수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오랜 경력의 배우를 인터뷰할 땐 긴장하곤 하는데, 김희선은 친절함과 격의 없음으로 5분 만에 상대를 무장 해제시킨다. 변한 점이라면 자신에게 집중하던 김희선이 그 관심을 주변으로 확장했다는 것이다. <내일>을 선택한 계기가 선의에 가깝다. 김희선은 시나리오를 받고 원작자를 따로 만나고 싶을 만큼 빠져들었다. <내일>은 저승 기업 ‘주마등’에서 자살을 막는 저승사자들의 활약을 다룬다. 생을 마감하려는 이들을 구하는 위기관리팀장 ‘구련’ 역을 김희선이, 취준생으로 자살하려다 이곳에 인턴으로 합류한 청년 역을 로운이 맡았다. “요즘 모두 힘들잖아요. 특정 상황에 부닥친 사람뿐 아니라 각자 나름의 어려움 속에 살고 있죠. 그래서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늘었어요. 제 주변에서도 그렇고 어느 연예인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잖아요. 그런 사고를 보며 내가 조금이라도 무언가 해야 하진 않았나 후회되고 마음이 아팠어요. 저뿐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거예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크게 이바지하겠다거나 어른으로서 뭔가 해야겠다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좋지 않은 선택을 하려는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저는 작품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방법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김희선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주변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잘 챙겨야겠다, 종종 다짐해요.”
김희선은 촬영일에 두 군데에서 빵을 사와 스태프에게 먹였다. 둘 다 맛집이니 골고루 맛보라고. 그는 워낙 주변 챙기기에 익숙하다. 김희선은 “내가 오지랖이 넓긴 해요”라며 웃는다. “사람들과 왁자지껄 함께 어울리길 좋아하니 잘해줘야죠. 작가나 연구원처럼 방에서 혼자 조용히 일하는 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이 직업이 성격과 맞아요. 일뿐 아니라 취미 생활도 여럿이 우르르 가서 하는 게 좋고요.” 김희선이 이전 <보그> 인터뷰에서 언젠가 밥집을 운영하고 싶다고 한 이유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끼니를 대접하고 함께 웃고 떠드는 삶. 그 인터뷰 후엔 <우도주막>(2021)이라는 예능 프로그램도 했다. 제주를 찾은 신혼부부를 위한 심야 주막 컨셉으로, 김희선이 주모 격이었다. “정말 재밌었어요. 주막을 찾은 분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고 새로운 생각도 배우고요. 저 그런 거 아주 좋아하거든요.” 사람이 어떻게 타인 속에서 늘 좋을 수 있을까. 현대인도 그렇고 공개 석상에 드러나는 연예인이라면 인간관계에 지쳐 자기 동굴에 숨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희선은 길어야 2~3일 버틸 거라고 말했다. 늘 좋은 사람만 만나지 않을 텐데, 어떻게 매번 친절할 수 있는지, 명상이라도 하는지 물었다. “운이 좋았나 봐요. 나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아니면 어디서 내 소문을 들었을까요? 나한테 나쁘게 하면 두 배로 돌려받으니 잘하라고요. 사람이 너무 착하고 순해 보이면 안 돼요(웃음).” 김희선은 부정적인 질문도 긍정으로 돌려놓는다.
김희선은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휴먼 판타지 <내일>을 비롯해 근래 장르물을 선택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멜로 <앨리스>(2020), 김해숙과 팽팽한 연기 전선을 이룬 복수극 <나인룸>(2018) 등이 그렇다. “극장에 로맨틱 코미디와 마블 히어로물이 걸리면 후자부터 봐요. 요즘 장르가 다양해 너무 좋아요.” 최근엔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2022)에 빠졌다. “우리나라는 한의 정서가 있는 귀신 이야기가 자리 잡아왔잖아요. 이제 OTT 등을 통해 여러 장르물을 접하면서 좀비가 익숙해지고 그것에 열광하는 작품도 나왔죠. 각 시기에 맞는 작품이 있는 거 같아요.” 김희선이야말로 30년 가까이 작품을 해오며 받은 시나리오만 훑어도 드라마의 역사를 말할 수 있을 거다. “작품은 시대상을 반영해요. IMF가 터지면서 다들 어려움에 처했잖아요. 그렇기에 1990년대 말 드라마 주인공은 힘든 상황에 넘어져도 털고 일어나 헤쳐나가는 역할이 많았어요. 2000년대 들어서는 젊은 배우들 활약이 커지면서 유쾌한 청춘물이 사랑받았고, 2010년대 들어서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등장했죠. 유튜브, OTT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여러 시도를 할 수 있고, CG 기술이 발달해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이 많아진 덕이죠.”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특히 김희선은 1990년대 캔디형 여주인공의 전설이다. <미스터 큐>(1998)에선 속옷 회사 디자인 실장 주리(송윤아)의 계략에 당하면서도 착한 성정을 잃지 않고 사랑과 커리어를 이뤄낸 혜원을 연기했다. <토마토>(1999)에서는 구두 매장의 가난한 직원이었다가 본사 디자이너로 꿈을 키워나가는 이한이 역을 맡았다. 우리는 김희선이 주는 예쁨과 드라마의 희망찬 결말을 보며 그렇지 않은 우리의 밀레니얼을 다소 잊을 수 있었다.
김희선은 시간이 갈수록 색다르고 다양한 역할에 도전했다. “여러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청순가련에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착한 아이는 많이 해봤으니 더 과감한 역할을 하고 싶었죠. <내일>의 구련처럼 쿨하고 시크한 연기도 처음인걸요. 다른 건 몰라도 새로운 김희선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예요. 감히 기대해달라 말하고 싶어요.” 김희선은 자신의 철없던 시절을 반성하듯 덧붙였다. “작품을 하며 내가 얼마나 예쁘게 나올까, 분량이 얼마나 나올까를 신경 쓰던 시절도 있었어요. 어떤 장면을 연기하면 얼굴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그저 예쁘게 나오길 바랐죠. 다행히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연기가 바람직한 쪽으로 변해갔죠. 이제는 나보다 주위가 살아야 작품이 잘된다는 마음으로 임해요. 예쁘게 나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김희선을 처음 만나면서 그 ‘예쁨’에 관해 꼭 묻고 싶었다. 대한민국 최고 미녀라는 수식어를 내내 들어온 기분은 어떤 걸까. 김희선의 역사를 정리한 인터넷 글을 보면 대부분 그가 얼마나 예뻤는지, 유행을 선도했는지 소개하는 데만 절반 이상이 할애된다. 배우 정우성에게 “잘생겼어요”라고 말하면 그가 “저도 알아요”라고 답하듯이 해탈의 지점일까. 김희선은 “그런 칭찬은 사막의 오아시스죠. 진짜 고마워요”라고 답했다. “이전에는 내가 인기 있으니까, 드라마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으레 하는 말이지 싶었어요. 당연시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민망해요. 이제는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즈음 김희선은 SNS에 올릴 사진을 찍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올리는 법을 얼마 전에 배웠을 만큼 익숙하진 않지만, 지칠 때면 이곳에 들러 응원 댓글을 보고 힘을 얻는다. 연예인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계정도 오랜만이다. 요즘엔 소속사에서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김희선의 소탈한 매력을 브이로그로 담아 유튜브 채널을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김희선은 바로 거절했다. “혼자 문답을 못해요. 여럿이 주거니 받거니 해야지 혼자 리액션이 안 되거든요. 저는 현실 사람과 눈 마주치고 손뼉 쳐야 좋아요. 사실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노트북을 들고 오는 기자들 풍경이 어색했어요. 노트북이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들 키보드 치느라 고개를 잘 들지 않더라고요.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 거지만, 눈을 보며 이야기 나누지 못해 조금 아쉬웠어요. 그만큼 저는 아날로그 인간인가 봐요.”
놀랍게도 근래 김희선의 취미는 혼자 하는 것이다. 그는 휴대폰에 담긴 유화를 나에게 보여줬다. 모녀처럼 보이는 두 여자가 바다 가운데로 손잡고 걸어가는 풍경이다. 김희선이 직접 그렸다.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안정적인 솜씨의 그림이다. “그릴 때는 다른 생각이 안 나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요.” 주변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싶어 50호 캔버스를 샀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선 물감을 뿌렸다고 했다. “혼자 하는 취미가 처음이라 두려웠어요. 그때 주변에서 마음대로 해보라고 용기를 줬고, 그렇게 무작정 그리다 지금까지 왔죠. 예술적 성취를 바라기보다 그저 새로운 취미로 시작했는데 그림이 쌓여가고 있네요. 20대에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어요. 일이 끝나면 늦은 밤인데 테니스든 탁구든 골프든 그 시간에 할 수 없었죠. 어린 마음에 자기는 싫어서 사람들과 짬 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이제는 그림이라는 즐거운 취미가 생겼어요. 언젠가 운 좋게 기회가 오면 카페에서 작은 전시를 열고 싶어요.”
김희선은 종종 화랑에 들른다. 그곳에서 비공개로 활동하는 어느 연예인의 그림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림이 그 사람과 닮았더군요. 언젠가 내가 그림을 내보이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제나 밝은 김희선을 지키기 위해 애쓴 남모를 고충이 보일 거 같아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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