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닉 백] 여행 그리고 협업의 역사, 루이 비통 스피디 백
팬데믹 시대가 일깨운 많은 것 중 하나가 여행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행은 소수만 맛볼 수 있는 유희였어요. 대서양을 건너려면 몇 달간 배를 타야 하는 탐험가, 또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가정교사를 대동한 채 ‘그랜드 투어’를 하는 상류층 자제들의 전유물이었죠.
19세기 초에 들어서 증기선과 철도, 도로 위에 마차가 등장하면서 여행의 대중화가 시작됩니다. 최초의 여행사도 이때 생겨났고요. 자연히 짐을 옮길 여행용 트렁크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했어요. 루이 비통은 바로 이 시기인 1854년에 파리에서 창립한 하우스입니다. 그가 만든 캔버스 소재 여행용 트렁크는 여타 가방보다 가벼워 인기를 끌었죠.
여행의 폭발적 인기를 방증하듯, 여행용 가방을 만드는 하우스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아버지 루이로부터 하우스를 물려받은 조르주 비통은 고민에 빠졌어요.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을까? 우선 그는 기존 여행 트렁크의 둥근 돔 형태를 평평하게 변형했습니다. 마차에 좀 더 수월하게 쌓을 수 있는 루이 비통의 새로운 트렁크는 금세 주목을 받았어요.
조르주 비통은 이어 로고를 고안했습니다. 갈색 가죽에 황갈색으로 알파벳 L과 V를 겹친 뒤 13세기 파리 대성당을 장식한 네 개의 잎이 달린 꽃과 가문의 문장 속 식물 등에서 영감을 얻은 세 가지 무늬를 결합했습니다. 지금의 루이 비통 하우스를 만든 이 모노그램이 탄생한 건 1896년의 일. 등장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로고나 상징과 달리, 루이 비통 모노그램은 패션의 역사로 남았죠.
루이 비통은 트렁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여행 가방을 선보였습니다. 1892년의 오버나잇 가방, 1914년 선보인 입구가 네모난 여행 가방, 1987년의 사냥 가방은 모두 근교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가방이에요. 오늘 소개하려는 스피디 백의 원형인 키폴도 그렇습니다. 1930년에 등장한 이 더플백 형태의 토트백은 지금까지도 주말여행 그리고 스포츠 가방으로 사랑받고 있죠.
그리고 1932년 키폴을 작게 줄인 형태의 스피디 백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익스프레스’라 불리던 가방이죠. 왁스칠 후 코팅한 모노그램 무늬 캔버스 소재에 파이핑 바느질 장식의 바케타 가죽 손잡이가 달린 스피디 백은 유연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가방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스피디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실용적인 여행용 가방이었어요.
이 가방을 패션 아이템인 핸드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1959년의 일입니다.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화니 페이스>의 연이은 성공으로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오드리 헵번에 의해서죠. 그녀는 평소 즐겨 들던 스피디 백 30의 사이즈를 5cm 줄인 스피디 25로 만들어달라고 루이 비통에 주문했습니다. 작게 줄인 가방을 든 배우의 모습은 여기저기 파파라치에 의해 노출되었고, 가방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기 시작했죠.
오드리 헵번과 함께 클래식이 된 스피디 백이 새로 생명을 얻은 건 2000년의 일입니다. 당시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제이콥스는 스피디 백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길 바랐죠. 마크 제이콥스는 자신의 친구 스테판 스프라우스를 찾아갔고, 서브컬처 성향의 아티스트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그는 그래피티 스타일로 스피디에 루이 비통이라는 글자를 휘갈겨 썼어요. 협업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습니다.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그래피티로 패션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루이 비통은 이후 시대를 풍미하는 아티스트와 손을 잡았습니다. 2002년 무라카미 다카시는 모노그램을 흰색으로 내놓는가 하면, 총천연색 캐릭터와 체리 무늬를 입혔습니다. 2008년 리처드 프린스는 특유의 오버레이와 다양한 색상으로 스피디 백을 감쌌고요. 2012년 쿠사마 야요이와 만든 동그란 점으로 가득한 스피디 또한 빼놓을 수 없죠. 그런가 하면 2017년엔 제프 쿤스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을 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다빈치, 반 고흐, 고갱 등의 그림이 그려진 스피디를 선보이기도 했어요.
패션과 예술 간의 협업은 사실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20세기 화가이자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초현실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가 함께 만든 랍스터 드레스, 구두 모자 등이 그 예죠. 하지만 협업을 현대 패션의 한가운데로 끌어온 건 루이 비통 스피디 백의 공이 큽니다.
스피디 백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선 기능적 업데이트로 2011년에 어깨에 둘러멜 수 있는 스피디 반둘리에 모델을 출시한 바 있고, 2015년엔 내부 지퍼 포켓을 만들었어요. 사이즈도 나노, 20, 25, 30, 35, 40 등 여섯 가지로 세분화되었고요. 디자인도 꾸준해요. 루이 비통의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매 시즌 새로운 테마의 스피디 백을 선보이고 있으며, 2018년부터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버질 아블로 역시 키폴과 스피디 백에 특유의 색다른 접근법으로 어필한 바 있죠.
길을 가다 3초에 한 번씩 보일 정도라고 해서 한때 ‘3초 가방’이라고 불리던 스피디 백. 꾸준한 인기의 비결로 협업 마케팅을 빼놓을 순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기저엔 유연한 형태가 주는 자율성과 놀라운 수납력, 탁월한 내구성과 시대를 초월하는 우아함이 있습니다. 가방의 본질에 충실한 가방. 스피디 백이 모든 여성의 가방 컬렉션에 자리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이선영
- 포토
- Courtesy of Louis Vuitton,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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