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버크롬비는 왜 사라졌나?
애버크롬비의 흥망성쇠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화이트 핫: 애버크롬비 & 피치, 그 흥망의 기록> 리뷰.
마이크 제프리스의 공식
다큐멘터리는 1990년대 초, 미국 소매업계의 거장 레스 웩스너가 애버크롬비 & 피치(애버크롬비)를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웩스너는 낚시, 등산, 사냥 등 엘리트 스포츠맨에 특화된 아웃도어 웨어와 캠핑용품을 취급하던 애버크롬비를 인수해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이때 마이크 제프리스를 새로운 CEO로 영입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애버크롬비가 탄생한다. 그는 1892년 탄생한 애버크롬비 고유의 유산을 그대로 살려 사회 엘리트와 특권층의 느낌을 가미했다. 거기에 섹시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곁들였다. 식스팩을 가진 잘생긴 백인 남성, 마르고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백인 여성을 모델로 삼으며, 하나같이 미국 청소년이 생각하는 완벽한 몸매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에게 가장 쿨한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애버크롬비는 마이클 제프리스의 새로운 공식 ‘Heritage(유산)+Elitism(엘리트)+Sex(섹시)+Exclusivity(고급스러움)=$$$(매출 폭발)’ 덕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쿨함의 대명사가 된 애버크롬비
그렇다면 어떻게 애버크롬비는 시대를 이끈 ‘쿨함’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다큐멘터리에서 애버크롬비는 “캘빈 클라인이 강조하던 섹시한 매력과 랄프 로렌이 지향하던 프레피 룩의 중간 지점”이라고 말한다. 마이크 제프리스가 애버크롬비에 새로운 정체성을 주입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쇼핑백에 상의 탈의한 남자 모델의 사진을 넣은 것이다. 그리고 각 학교별로 남학생 사교 클럽을 찾아 잘생기고 인기 많은 학생에게 애버크롬비의 옷을 입혀 다른 학생들이 자연스레 따라 입게 만들었다. 그렇게 애버크롬비는 젊은이들이 쇼핑백의 사진을 오려 캐비닛을 꾸밀 만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아시아인 비하 티셔츠 제작
2002년 별생각 없이 만든 값싼 그래픽 티셔츠가 잘나가던 애버크롬비의 발목을 잡는다. 사건의 시작은 아시아인을 조롱하는 티셔츠를 제작하면서부터다. 아시아인을 묘사한 그림과 ‘웡 형제가 하얗게 해드립니다(Two Wongs Can Make It White)’라는 인종차별적 문제가 있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산다. “아시아인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는 애버크롬비 홍보 담당자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아시안 아메리칸 기자 협회나 스탠퍼드 대학 아시안 학생회 등은 강력한 항의와 함께 불매운동도 불사하겠다며 회사 측의 사과와 제품 회수를 요구했다. 결국 해당 티셔츠를 전국 50개 주 311개 매장으로부터 모두 회수해 없애지만, 그동안 애버크롬비의 행태에 이상함을 느끼던 소비자들이 분노하게 된다.
인종차별과 외모 지상주의
다큐멘터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쿨’과 ‘배타’다. 애버크롬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점차 달라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외모를 위주로 직원을 뽑았다. 판매량보다는 매장 직원들 사진을 찍어서 본사에 제출할 만큼 외모가 출중해야 했다. 심지어 유색인종은 청소와 같은 마감 근무만 가능했다. 또한 알게 모르게 아시아인 직원이 해고당하면 그 빈자리를 백인 직원으로 채웠다. 이와 같은 부당한 대우에 직원 아홉 명은 애버크롬비를 고소했고, 그들은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고 애버크롬비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애버크롬비는 직원 고용 방식과 마케팅 변경에 대한 내용 등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여전히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이때 마이크 제프리스는 온라인 매체 ‘살롱’과의 인터뷰에서 “애버크롬비 & 피치는 배타적인 브랜드이며, 누구나 입는 옷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애버크롬비 옷을 입을 필요도 없다. 우리의 타깃은 쿨한 아이들이다”라는 망언을 남긴다.
남자 모델들에 대한 성 추문
마이크 제프리스가 애버크롬비를 경영할 때 주 고객층은 여성이었지만, 대부분의 소비자가 애버크롬비를 보고 떠올린 건 남성의 이미지다. 그리고 브랜드의 화보나 영상을 모두 담당한 포토그래퍼 브루스 웨버의 성 추문 사건으로 애버크롬비는 또 한 번 뭇매를 맞게 된다. 그는 당대 최고의 포토그래퍼였고, 남자 모델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훗날 브루스 웨버는 수많은 남자 모델을 성추행한 혐의로 소송을 당했는데, 호흡 연습을 위한 터치였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한 촬영장에는 마이크 제프리스도 동행해 함께 즐겼다는 증언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일련의 사건과 함께 여태 쌓아온 애버크롬비 이미지를 나락으로 빠뜨렸고, 결국 마이크 제프리스는 화려한 영광의 시대를 뒤로한 채 애버크롬비 CEO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배타성 그 자체가 더 이상 쿨한 게 아닌 게 되어버린 애버크롬비 사건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화이트 핫: 애버크롬비 & 피치, 그 흥망의 기록>을 통해 본질적으로 당시 미국 문화가 얼마나 모순이 많았는지 보여준다. 날씬하고 어린 백인이 미의 기준이 된 문화, 백인이 이상적이라고 보는 모든 걸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대중문화를 지배한 애버크롬비의 흥망성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래서 “그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아요?”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답은 이거다. “아니요.”
- 프리랜스 에디터
- 주현욱
- 포토
-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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