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이후의 정은채
경쾌하고 흥미로운 에너지, 정은채의 컬러 코드.
<파친코> 시즌 1이 막 끝났어요.
여정이 꽤 긴 작품이었어요. 프리 단계도 굉장히 세밀하게 진행됐고, 배우들 또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참여했죠.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드는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라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주제가 갖는 무게감 때문인지 상당한 책임감이 동반되기도 했어요. 아마 이 부분은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다양한 국적의 스태프가 모인 만큼 우리만의 정서나 울림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만족스럽고, 놀라워요.
다른 방식의 참여라는 것은 오디션 시스템을 말하는 건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참여 방식부터 말하자면 그래요. 제게 이번 오디션은 ‘반드시 캐릭터를 따내겠다’는 목적형 오디션은 아니었어요. 과정을 함께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연기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대본도 오픈되지 않았고, 함께 할 배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여서인지 제가 맡은 캐릭터에만 오롯이 몰입해서 오디션을 봤어요. 배우마다 몇 개의 문턱을 넘어섰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저는 큰 휘청거림 없이 합류한 듯해요. 하하.
<파친코>의 ‘경희’는 그간 보여온 작품 캐릭터와 또 다른 감정을 품고 있죠. 시즌 1을 마치고 보니, ‘정은채’란 배우는 변화구를 좋아하거나 변화구에 강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직구보다는 변화구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일이든 상황이든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익숙하고 잘하는 걸 계속 내보이는 것만큼 배우로서 부끄러운 일도 없으니까. 몸에 꼭 맞지 않아도 자꾸 도전하고 시도하다 보면 내 옷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프레임 안에서든 밖에서든 잦은 변주를 주는 게 좋아요. 비슷한 연결 고리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배우의 목소리를 빌려 조금이라도 변화의 무게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파친코>에서는 조금 달랐어요. 이번만큼은 ‘경희’의 감정에 제가 분석한 심리를 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제 나름의 해석으로 감정을 확장하고 나면, 오히려 ‘경희’의 진짜 감정이 줄어들 것 같았거든요. 감독님이나 작가님도 그저 ‘경희’ 자체로 존재하기를 바랐고,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4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인 만큼 캐릭터마다 서사가 깊을 수밖에 없는데 그 자체로 녹아들지 않으면 오히려 시청자에게 혼란을 줄 것 같았거든요. 간결하고 심플하게 접근한다고 해서 캐릭터의 감정 폭발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새롭게 선보일 <안나>의 ‘현주’는 어때요. 본인과 일치하는 흐름이 있나요.
<안나>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시작된 거짓말,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의 이야기예요. 무엇보다 제가 연기한 ‘현주’는 저와 굉장히 반대되는 성격이고요. 저는 눈치도 잘 보는 편이고, 원하는 게 있어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현주’는 굉장히 직접적이거든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이질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어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상황에만 집중하는 인물인데, 모든 관계를 굉장히 일방적으로 시작하죠.
어떻게 보면 감정 표현에 굉장히 방어적인 인물이네요.
매력적인 면은 확실히 있어요. 이번만큼 현장에서 제멋대로 연기한 적이 없어요, 제가. 하하. 보통은 상대 배우와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감정을 끌어 올리기도 하고, 분위기를 조절하는 편인데 <안나>에서만큼은 독단적인 감정선으로 움직였죠. ‘현주’ 자체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그 느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는 과정까지 도달하지 못하거든요. 덕분에 촬영 내내 상대 배우의 리액션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오롯이 ‘현주’의 감정선에만 기대서 연기했어요. 이런 식의 일방적인 연기도 처음 해봤지만, <안나>는 출발부터 마음가짐을 달리 먹은 작품이에요.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었겠군요.
사실 <안나>는 오래전부터 알던 프로젝트예요. 영화 <싱글라이더>를 연출한 이주영 감독님이 꽤 오랜 기간 준비하신 작품이거든요. 워낙 좋아하는 감독님이라 사석에서 볼 기회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안나>의 캐릭터들이 갖는 세계관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현주’와 저를 하나로 연결해서 말씀하셨죠. 이야기를 건네받은 시점이 굉장히 과거형인데, 과연 이 프로젝트가 현실화된다면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어요. 인물의 감정을 관통하는 감독님의 정교한 연출력도 기대되지만, ‘현주’가 품은 캐릭터의 힘을 기존 작품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거든요.
이주영 감독이 각본과 감독을 겸했어요. 한 사람의 손끝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무리된다는 건 그만큼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죠.
제가 함께 하지 않는다 해도 이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했죠. 그만큼 좋은 작품이고, 충분히 새로운 시도일 테니까요. 감독님의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그림이 현실화된다는 게 가장 반가웠고, 실제로 작업하면서 그 정교함에 더 놀랐죠. 배우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호흡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셨고, 덕분에 큰 온도 차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캐릭터의 컬러가 분명한 만큼, 디렉션의 세밀함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실제로는 자유롭게 풀어주셨어요. 그래서 캐릭터의 볼륨을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디렉팅 받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변주하고 스스로 변곡점을 넘어섰을 때 느끼는 쾌감을 즐기거든요. 하지만 이주영 감독님은 배우들에게 자율적 선택권을 쥐여주셨고, 그 안에서 포인트만 잡아주셨어요. 덕분에 처음 보는 나의 낯선 얼굴과 태도를 마주했죠. 그걸 맞닥뜨리는 게 재미있었고. 위치를 바꿔보면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인다잖아요, 새로웠어요.
<파친코>와 <안나>,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OTT 플랫폼으로 만나게 됐어요.
매체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배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무대가 넓어진다는 거죠. 소재의 제한이 풀리고, 상상력의 한계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해졌으니까. 처음엔 작은 사이즈의 화면에 내가 쏟아놓은 감정이 잘 전달될 수 있을지, <파친코>처럼 완벽에 가까운 미장센이 주는 감동이 너무 사소하게 전달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그 방식으로 시청하는 사람 중 한 명이고, 결국 스토리에 집중하면 스크린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작품만 잘 만들어놓으면 전달 방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좋은 물건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쓰임새가 다양하니까요. 작품도 같은 원리라고 생각해요.
점점 현장에 후배들이 많아지죠. 어떤 어른이고 싶나요?
입 밖으로 내뱉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잖아요. 책임감의 무게를 줄이려면 말의 무게에 신중해야 하고, 그러면 말수가 줄지 않을까요. 하하. 경험치가 많다고 해서 선배의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지는 않아요. 실수와 수정을 반복하는 건 선배도 후배도 마찬가지니까.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그게 누구든 저는 신뢰가 중요해요. 신뢰가 바탕이 된 거리 두기에선 절대로 무례하게 선을 넘지 않거든요. 시간이 쌓인다고 가능한 건 아닌 것 같고,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며 노력하는 게 중요해요.
관계 설정에 까다로운 편인가요? 사람들과 부침이 많은 곳이잖아요.
혼자서는 절대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없는 곳이죠. 많은 사람과 작업하는 환경에서 중요한 건 상대에 대한 배려예요. 아주 사소한 거지만 약속은 중요하죠. 작은 것부터 지켜지지 않으면, 허물어지는 건 순간이에요.
<파친코>의 ‘경희’와 결이 같군요.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상대도 배려하는.
일방적인 ‘현주’와는 다르다고만 말할게요. 하하.
10년 차쯤 되면, 한 번쯤 고비가 오죠.
고비라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게 될 속도와 방향, 효율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돼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나누어 생각해보면 연기를 하기 전에 나는 꽤 단단했어요. 어떤 정의를 내린 건 아니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거든요. 배우가 되고 서른을 넘기면서는 좀 더 유연해진 것 같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여유 공간이 생겼죠. 잘 휘지 않는 편인데, 20대의 단단함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 좋고 이 컨디션을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지만 변화할 나에 대한 호기심은 열어두고 싶어요. 단순한 건데 <파친코>를 촬영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굉장히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결국 우리 인생에서 버려도 되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죠. 그렇게 생각하니 매 순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나를 믿고 움직여야 내 미래도 나아지는구나 싶고.
정은채는 단단한 사람이군요.
정은채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하.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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