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진과 민아, 우리 이대로가 좋아요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내온 효진과 민아. 이들이 함께 주연한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디지털 리마스터링본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한다.
부지영 감독이 연출하고, 공효진, 신민아 배우가 주연한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2009년 지금은 사라진 중앙시네마, 시네코아 등에서 상영했다. 오는 8월 25일 개막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본을 상영한다. 이를 주도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김현민 프로그래머는 지금은 폐간된 영화 잡지 <스크린>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부지영 감독을 인터뷰했다. 좌담을 위해 탁자에 마주한 네 여성은 인연이 씨실과 날실처럼 오랫동안 얽혀, 나누는 얘기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에서 공효진이 입은 패치워크 치마처럼 포근했다.
부지영 감독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배우들이 고맙다고 말을 꺼냈다. “모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좋은 배우로 성장해줬어요. ‘나부터 더 열심히 해야지’란 동력이 생겨요.” 공효진은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어릴 때는 인간관계를 쉽게 생각했어요. 나이 먹으면서 오랜 친구들이 참 소중해요. 교복 입은 민아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도 목이 쉬도록 수다를 떨곤 해요. 무엇보다 민아나 저나 크게 안타까운 일 없이 여전히 일하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우리 참 잘 버텼구나 싶어요.”
그러고 보니 둘의 인연은 20년을 넘겼다. 공효진이 고등학교 3학년, 신민아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당시 <쎄씨> <키키> 등의 10대 잡지를 평정한 모델이었다. 둘은 성인이 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민아가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성숙해서 친구 같은 사이가 됐죠.” 함께 출연한 첫 영화는 신민아의 데뷔작이기도 한 <화산고>(2001)다. 무술에 능통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배경으로, 두 배우 역시 판타지 같은 액션을 선보인다. 8년 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에서 재회했다. 개봉 시점으로 보면 당시 공효진은 30세, 신민아는 26세다. 부지영 감독에겐 데뷔작이지만 두 배우는 이미 주목받던 스타였다. 저예산 영화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당시 20여 개 상영관에서 개봉했는데, 그마저도 촬영 시점보다 개봉이 1~2년 미뤄졌다. 공효진은 “정말 바쁜 때였어요”라고 회상했다. 당시 신민아는 영화만 해도 <무림여대생>(2008), <고고70>(2008), <키친>(2009), <10억>(2009) 등을 찍었다. 유튜브에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무대 인사를 보면 까무잡잡하게 탔는데, 오지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영화 <10억>의 촬영을 마친 뒤였기 때문이다. 공효진 역시 영화 <가족의 탄생>(2006), <M>(2007),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미쓰 홍당무>(2008) 등을 선보였다. 이들이 말 그대로 작은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동생 민아, 내가 따르는 효진 언니와 자매로 출연한다는 것. “민아와 자매로 나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극 중 자매 사이가 좋지 않아서 현장에서도 안 친한 척해야 하나 걱정할 정도였죠.” 신민아도 “우리끼리 함께 찍을 수 있는 영화라서 좋았죠. 당시 여성 배우가 함께 주연으로 나오는 여성 감독의 영화가 드물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우연찮게도 이 작품 다음으로 두 사람은 또 한 번 여성 감독과 일했다. <키친>의 홍지영 감독,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이다. 여성 감독이 영화계에 조금씩 등장하던 때였다. <세 친구>(1996),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 등의 임순례 감독의 뒤를 이어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정재은 감독, <질투는 나의 힘>(2002)의 박찬옥 감독, <…ing>(2003)의 이언희 감독, <6년째 연애중>(2007)의 박현진 감독, 앞서 언급한 부지영, 홍지영, 이경미 감독 등이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개봉 20주년을 맞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디지털 리마스터링본을 상영했고, 올해 선정 영화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인 것이다. 김현민 프로그래머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임순례 감독님 이후로 2000년대에 조금씩 여성 감독들이 활약했는데, 그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어요. 디지털 리마스터링본 영화 대부분은 남성 중심의, 남성 감독의 것들이죠. 그렇지 못한 영화는 잊혀가고요.” 오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복원된 여성 감독의 작품을 상영하는 특별전 ‘복원: 아카이브의 맹점들’을 통해 10편을 상영한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비롯해 박수남 감독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 다나카 기누요 감독의 <연애편지>(1953), 클라우디아 폰 알레만 감독의 <리옹으로의 여행>(1980) 등이다. 공효진은 부지영 감독에게 디지털 리마스터링본 상영을 축하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이야기 나누면서 그 시절에 여성 영화가 많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좋은 영화는 오래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 작품에 신민아 배우와 함께했다니 기뻐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단순히 여성 감독과 여성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와 언제 봐도 현재진형형일 것 같은 세련된 전개 때문에라도 보존해야 할 작품이다. “글이 정말 좋아요.” 공효진은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영화에는 아버지가 다른 자매인 명주(공효진)와 명은(신민아), 어머니, 이모, 명주의 딸이 등장한다. 자매의 성격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명주는 고향인 제주에서 생선 가게를 하고, 명은은 집에 발길을 끊고 도시에서 회사에 다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상을 치르러 온 명은은 언니에게 아버지를 함께 찾아 나서길 부탁한다. 자매의 로드 무비가 시작되면서 가족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간다. 부지영 감독은 시간이 흘렀으니 결말을 숨길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아직 못 본 관객을 위해 함구한다. 공효진, 신민아도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결말이 놀라워 다시 첫 장으로 넘겼다고 했다. 부지영 감독은 “당시 엄청난 비밀을 숨기듯이 홍보했죠”라고 말하며 웃었다.
김현민 프로그래머는 “반전은 거들 뿐 가족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면서 관계에 대한 심리 드라마”라고 평한다. 그렇기에 신민아는 배우이자 관객으로서 더 많은 이가 작품을 보길 바란다. “요즘 젊은 관객에게도 깊이 다가갈 거예요. 이전에 적은 상영관으로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도 함께하면 좋을 거 같아요.” 공효진은 자신이 출연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를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2009년에 특별 상영한 사례를 꺼냈다. “오래전에 찍은 영화를 다시 보는 건 무척 긴장돼요.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띌까 편하게 앉아 있지 못하죠. 하지만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니 소중하죠.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재개봉하면 몰래 가서 볼 거예요. 관객들도 민아의 까칠한 연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웃음).”
신민아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다. 데뷔 후 어리고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강했는데, 다양한 작품을 해서 배우로서 확장되길 갈망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크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던 시기였죠.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명은이란 역할도 그중 하나였어요.” 당시 신민아 측이 먼저 출연을 희망했다. 본래 부지영 감독은 동생 역할에 공효진을 염두에 두었고, 미혼모라는 설정의 언니 역할에는 나이가 더 든 배우를 찾았다. 하지만 신민아를 직접 만나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귀여운 스타라는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죠. 너무나 진지하고 열정 있는 배우였어요. 직접 만난 뒤 언니 역할에 공효진, 동생 역할에 신민아가 자연스럽게 안착됐죠. 캐스팅에는 운명적인 뭔가가 작용하는 것 같아요.” 감독이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명은이가 병원에서 “내가 왜 그 작자를 찾느냐면 복수하려는 거거든”이라고 말할 때다. “시나리오를 쓸 때 상상한 대로 민아가 똑같이 연기해줬어요. 다시 봐도 놀랍죠.”
감독이 고마워한 또 하나는 미혼모 역할을 선뜻 맡아준 공효진의 대범함이다. 공효진은 촬영 당시 20대 후반이었다. 정작 배우에겐 별문제가 아니었다. “어렸지만 미혼모 역할이라고 망설인 적 없어요. 그보다는 어떤 작품인지가 더 중요했죠.” 당시 공효진은 드라마 <고맙습니다>(2007)에서 아픈 아이를 키웠고, 근래엔 <동백꽃 필 무렵>(2019)에서 초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이미지 때문에 어머니 역할을 기피하는 배우들이 있는 반면에, 공효진의 선택은 언제나 용감했고, 스스로는 가뿐했다. 벌겋게 튼 얼굴로 “내가 뭐 어때서!”라고 외치는 <미쓰 홍당무>만 봐도 그러하다.
영화는 둘이 얼마나 다른지, 그럼에도 어딘가 닮았음을 보여준다. 외양만 봐도 자매의 차이가 확연히 들어온다. 공효진은 ‘어디까지 촌스러워질 수 있나’ 싶은 마음으로 명주를 스타일링했다. “그 보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니까요(웃음).” 그런가 하면 명은은 무채색 트렌치 코트와 터틀넥 차림에 짧은 생머리다. 당연히 화법도 다르다. 명주는 평소 생선을 칼로 내려칠 때처럼 단호한 어투지만 동생 앞에서는 목소리가 작게 떨린다. 명은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아픔을 감추려 더 차갑게 말한다. 교통사고 후 비를 맞고 싸우며 감정을 터트리는 장면도 대단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둘이 다른 만큼 같았음이 느껴진다. 실제 공효진, 신민아와도 비슷하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찍을 때 민아는 혼자 자고 싶어 했고 저는 함께 있자고 졸랐죠. 보름 정도 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만큼 대화가 잘 통하고 유머 코드가 맞기는 쉽지 않을걸요. 생일도 민아가 4월 5일, 제가 4월 4일, 우리 정말 가까이 있죠?” 두 배우는 제주, 목포 등지에서 한 달 반 정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촬영할 때 둘이 얼마나 달랐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재밌었는지 얘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공효진은 “우리의 추억 때문에라도 영화를 빨리 다시 보고 싶어요”라고, 신민아는 “우리 둘이 함께 이런 영화를 또 찍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세 번째로 함께할 그 영화가 언제 만들어질지 모르지만, 둘은 지금처럼 부침 없이 작품을 하는 배우로, 여전히 말간 얼굴의 친구로 수십 년의 추억을 이야기할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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