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브레이커, 슬기!
발칙한 클래식의 도시 런던에서 레드벨벳 슬기를 마주했다. 솔로 앨범 <28 Reasons> 발매를 앞둔 슬기는 처음으로 규칙을 깨보려고 한다. 펑키하게 또 재밌게.
화보를 런던에서 촬영했어요. 특히 인상적인 게 있었나요?
런던은 첫 방문이었죠. 도착해서 가장 눈에 띈 건 건물이었어요. 그 도시에만 있는 건물을 둘러보길 좋아해요. 옛날 건물만 있는 게 아니라 최신의 펑키한 건물도 많았는데 그 조화가 좋더라고요. 아침에 잠깐이라도 숙소 앞에 나가려고 했고, 전시회도 많이 보러 다녔고, 영화 <노팅 힐> <해리 포터>의 흔적도 찾으러 다녔어요. 사진첩이 완전 포화 상태예요.
여행의 소소한 순간을 그리는 걸 좋아하죠.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나요?
실제로 그렸어요! 제가 너무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공원에 앉아서 커피 한 잔과 함께 노래 들으며 그림 그리는 거(웃음). ‘나는 지금 영국과 함께 있다’ 그런 느낌(웃음)? 공원에 가서 각자 하고 싶은 거 하자며 매니저 오빠랑 주현 언니(아이린)랑 나갔어요. 공원 한 바퀴 돈 다음에 타워 브리지 앞에서 이어폰 끼고 감성에 취해 그 다리를 그려봤어요. 제 마음처럼 잘되진 않았는데 뒤에서 어떤 아이가 제 그림을 보더니 “Nice!” 그러더라고요. 저, 칭찬받았어요.
영국 왕립미술원에서 촬영했죠. 그곳은 어땠나요?
공간이 주는 힘이 엄청나다는 걸 느꼈어요. 건축물과 가구, 그림이 어우러져 아주 예쁘더라고요. 그 공간에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그런 점도 좋았어요. 작품을 관람하는 귀여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실까도 궁금했어요.
기억나는 작품도 있나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작품이 많았어요. 그림을 잘 못 보지만 그래도 그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요. (사진첩을 보여주며) 이건 커다란 레몬에 보석을 박은 작품(캐슬린 라이언의 ‘Bad Lemon’)인데 레몬에 핀 곰팡이까지 다 보석으로 표현했어요. 이렇게 마네킹을 꽃으로 뒤덮은 조각(벤 에지의 작품 ‘Man Made Nature’)도 있었고요.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레드벨벳의 ‘Rookie’ 뮤직비디오에 나온 인물과 비슷한데요?
그렇죠? 저도 ‘루키다!’ 이러면서 찍었어요.
드디어 솔로 데뷔예요. 이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나요?
오래 기다려왔어요. 근데 제가 준비될 때쯤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전 지금 이 시기가 좋아요. 그간 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더 좋은 곡을 찾기 위해, 더 완성도 있게 내놓기 위해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솔로 앨범 <28 Reasons>를 준비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집중했을 텐데,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나요?
타이틀곡 ‘28 Reasons’ 자체가 양면성을 가진 느낌이라 제 안의 여러 감정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어요. 그간 활동하면서 그런 감정을 끄집어낸 적이 거의 없어요. 이 곡에서만큼은 제 안의 다양한 모습을 다 보여주려고 했어요.
이전의 솔로곡 ‘Uncover’와도 연결되는 듯해요.
오, 그런 것 같아요. ‘Uncover’는 콘서트를 위해 만든 곡으로, 제가 가진 생각으로 구성했어요. 누구나 사회생활을 할 때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잖아요.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기 싫다고 표현하기 어렵고요. 그런 모습을 ‘Uncover’에 녹여냈다면 ‘28 Reasons’에서는 내면의 여러 감정을 더 극대화했어요.
런던에서 앨범 재킷도 찍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컨셉으로 진행했나요?
런던 외곽에 있는 오래된 저택에서 찍었는데, 거기에 있는 귀신처럼 나왔어요(웃음). 고풍스럽게 잘 나왔어요. 타이틀곡 ‘28 Reasons’가 가진 분위기를 선과 악의 느낌으로 해석해봤어요. 곡이 주는 분위기에서 키워드를 생각하다 보니 그런 테마를 상상하게 됐는데요. 그 곡을 선과 악으로 분류해 그에 따라 착장도 다르게, 제 표정도 다르게 했어요. 분위기조차 달라요.
선과 악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을까요?
‘선은 이렇다, 악은 이렇다’라고 명확하게 구분하진 않았고요. 곡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의 가사를 표정으로 연기했어요. 모든 걸 부수겠다는 악보다는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장난기에서 비롯된 악, 순수한 느낌의 선이 아니라 나른하고 멍한 느낌의 선, 이런 식으로요. ‘난 괴롭히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넌 괴로워하며 망가져버렸네? 난 아무것도 몰라, 난 그런 뜻이 아닌데’ 이런 뉘앙스예요. 상당히 복합적이죠. 녹음할 때도, 멋있게만 부르진 않았어요. 감정도 들어가고 연기도 했어요. 어려우면서도 재밌었어요.
슬기의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가 높아요. 아이린&슬기 때는 터팅, 보깅 등을 활용해 신선한 무대를 만들었어요. 솔로곡 ‘Uncover’의 자유로운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이번 무대의 퍼포먼스는 어떻게 다른가요?
그간 다양한 춤을 춰왔는데 이만큼 감정을 쏟은 춤은 없었어요. 감정을 쏟는 게 진짜 힘들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과해 보이고 부담스럽게 보일 수 있어서 그 적정선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속도를 절제하고 조절하기도 했어요. 강약도 있고요. 평소에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좀 더 녹여냈죠. 언젠가 터팅 퍼포먼스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미 아이린&슬기 때 보여줬으니 그 요소는 조금만 넣었어요. 레드벨벳 때는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평상시에 춤을 많이 배우기도 하고 많이 연습해요. 이번에는 무대에 설 때마다 제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게 될 거예요. 나약해졌다가 모든 걸 망치겠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순간순간 계속 변할 거예요.
기존 솔로 가수와도 달라야 하고, 레드벨벳의 기존 이미지와 연결되면서도 또 다르게 해야 했을 텐데, 어떤 식으로 솔로 무대를 그렸나요?
레드벨벳의 이미지를 이어가려고 하진 않았어요. 새로운 시작, 새로운 슬기만의 컨셉이에요. 아이린&슬기 때와도 달라요. 저만 할 수 있는 걸 하자 싶었어요.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야죠.
당신만 할 수 있는 게 뭔가요?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퍼포먼스와 보컬, 둘 다 잘 가져갈 수 있는 곡을 선택하자 싶었어요. 좀 더 진지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곡이면 했어요. 저의 다양한 보컬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혼자 곡 전체를 부르니 아무래도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듯한데요.
유영진 이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솔로는 한 사람이 노래를 끝까지 다 부르는 거니 재미없게 들릴 수 있다, 변주를 줘야 한다고요. 레드벨벳 때는 듣는 사람이 지루할 만하면 새로운 멤버의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하잖아요.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소리를 바꾸는 연구를 계속했어요. 소리 내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소리를 긁어서 내보기도 하고요. ‘28 Reasons’의 경우, 애드리브가 상당해요(웃음).
이번 음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뭔가요?
제가 작사에 참여한 곡인데요. 사내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제가 쓴 가사가 뽑힌 거예요. 생각도 못했어요.
어떤 걸 상상하면서 썼나요?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빌런이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조커> 같은 빌런 영화를 다시 봤어요. ‘28 Reasons’와 비슷하게 양면성이 있는 노래라고 느껴졌어요. 흑화 전과 흑화 후라는 양면성요. 제가 이런 가사를 썼는데요. “거울 속 내 모습의 그 눈빛은 싸늘해, 아무것도 없는데 뭘 그리 찾는지 (…) 신선한 어둠 속으로 끌려가 날 멈추긴 아직 부족해 뭐가 더 남았니.”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무너지고 나약해진 모습에서 에너지가 생기며 빌런으로 흑화되는 흐름이에요. 힘 빠지게 부른 부분도 있고, 울부짖으며 부른 부분도 있어요. 아름다웠던 내 세상이 무너졌다는 내용이에요.
평소의 슬기를 떠올리면 밝고 맑고 성실한 느낌인데 이번 솔로 앨범에서 어둡고 소외된 면을 특히 더 표현하려고 한 이유가 있을까요?
곡이 주는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니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그걸 표현하는 게 짜릿하더라고요. 배우가 연기할 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곡 분위기가 다 달라요. 편안하게 들을 만한 곡도 있고 서늘한 곡도 있고요. 이번 앨범에 수록된 여섯 곡의 분위기를 시각화한 트레일러 영상도 만들었는데, 총 여섯 개 시퀀스가 담겨 있어요. 아직은 숙제로 남아 있죠. 계속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 앨범 이후 제가 많이 성장하고 발전할 것 같아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제 안의 뭔가를 깨부수고 싶었거든요. 이전에는 회사가 제안하는 것들을 잘 표현해내는 데 좀 더 집중했어요. 이번 솔로 활동을 통해서는 제 생각을 좀 더 얘기하고 제 색깔을 더 표현해내고 있어요. 그룹 활동할 때는 회사가 만든 색깔을 잘 소화해 우리가 흡수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제가 직접 밭에 씨앗을 뿌려서 새로운 것을 자라나게 해야죠. 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요.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과 무대는 어떤 건가요?
빌리 아일리시와 멜라니 마르티네즈처럼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걸 좋아해요. 그 곡들로 사람들이 안무를 짠 영상이 있는데 목소리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그런 춤도 좋아해요. 몽환적인 노래도 좋아하고요.
그림을 그리고 가사를 쓰는데, 이런 다양한 표현 욕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건가요?
사실 전 표현하는 걸 너무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회사에서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연습생 때도 노래해야 하면 열심히 노래하고 춤춰야 하면 열심히 춤추고 그랬어요. 저는 항상 FM대로 했어요. 네모를 그리라고 하면 늘 네모만 그렸어요. 근데 이제 똑같은 네모만 그려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 것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춤도 다양하게 배워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사진도 찍어보면서 자신을 깨부수는 노력을 한 거죠. 어쩌면 이번 앨범에 드로잉이나 아트워크를 할 수도 있어요. 앨범에 재능을 다 쏟아부었어요. 열심히 제 자아를 찾아가고 제 목소리를 표현해보고 싶어요. 제가 발전해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주면 좋겠어요.
나를 바꾸기 위해 일상에서 하는 노력이 또 있나요?
저를 깨부수는 것 중 하나가 술이에요(웃음). 잘 못 마시는데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술이긴 해요. 전 늘 감정이 똑같은 사람이거든요. 근데 술을 마시며 울어보기도 하고, 생각도 깊이 해보고, 평소에는 부끄러워서 표현 못한 것들도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회식으로 처음 술을 마시게 됐는데 그때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많이 표현했어요. 술 마시니까 낯가림이 없어지면서 ‘이래서 고마웠고, 이래서 고마웠어’라고 얘기하게 되더라고요. 전시회도 자주 보러 다니고 영화도 많이 봐요.
이상하게 자주 보게 되는 영화가 있나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요. 한 사람과 여러 주제에 대해 그렇게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기차 여행도 꿈꾸게 되고요. 내 옆자리에 혹시 운명의 상대가(웃음)? 스물서너 살 즈음 봤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얘기를 잘 못했어요. 술도 안 마셨고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재미도 잘 몰랐죠. 나이가 들고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영화 내용에 점점 더 공감이 갔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재밌는 영화, 시간 날 때마다 보는 영화예요.
가수이자 퍼포먼서,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자 솔로 아티스트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긴장하지 않고 여유롭게 무대에 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직도 긴장을 하더라고요. 긴장하니까 자꾸 열심히 하는 거예요. 더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요. 열심히 하는 모습 말고 느긋하게 즐기는 모습이고 싶어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진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늘 열심히 했으니까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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