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이종석
드라마 <빅마우스>는 이종석의 복귀를 알리는 강렬한 한 방이었다. 새로운 라운드를 맞이한 그는 전보다 여유가 넘친다. 그리고 여전히 젊다.
이종석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제대 후 첫 작품인 <빅마우스>는 방영 내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지켰고 그의 이름은 3년 4개월이라는 ‘군백기’가 무색하게 브랜드 평판 2위로 점프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순정 만화 주인공의 얼굴을 하고 강철 펀치를 날리는 생계형 슈퍼히어로다. 전작 <당신이 잠든 사이에>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오충환 감독은 드라마 제작 전부터 캐스팅 1순위로 그를 염두에 두었다. 대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많이 신뢰하는 배우”로 이종석을 언급한 오 감독은 그의 세밀하고 영리한 연기에 모든 공을 돌렸다. 감독의 말처럼 때론 만만해 보이고 어느 순간엔 사악해 보이고 그러다 미쳐 날뛰기도 하는 박창호는 감정 전환이 많은 꽤 까다로운 캐릭터다. 승률 10%의 별 볼 일 없는 변호사가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잡혀간 뒤 슈퍼맨처럼 각성한다는 설정은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게다가 극 중 아내는 소녀시대 윤아다. 촬영이 시작된 지난해 9월부터 꼬박 1년의 시간을 박창호로 살아온 이종석은 이제야 성공적인 복귀의 부담을 내려놓는다.
이종석과 <보그>는 2013년 9월에도 만난 적이 있다. 모델 출신의 데뷔 3년 차 신인 배우인 그를 슈퍼루키로 만든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종영하고 영화 <관상>이 개봉을 앞둔 때였다. 당시 영화에 함께 출연한 이정재는 이날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화보 촬영이 끝난 후 이종석에게 반가운 속보를 전하자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와! 끝내주네요.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선배님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헌트>를 보면서도 감탄했거든요.” 모두가 알다시피 <관상>의 또 다른 주인공 송강호는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다. 채 10년이 되지 않은 사이에 정말 많은 게 변했다. 앳된 얼굴 탓에 자꾸 고등학생 역할만 들어와 기왕 하는 김에 교복을 입고 할 수 있는 가장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해 보이겠다고 말했던 그가 비록 드라마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등장한 것만 봐도 그렇다. 송강호는 영화에서 자신의 아들로 출연했던 이종석이 이후 <닥터 이방인>으로 첫 단독 주연을 맡자 모니터링을 해주며 ‘잘하고 있다’는 응원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번엔 이종석의 차례다. “아직은 다른 세상 일 같아요. 신기해요. 영어로 대사를 하지 않아도 자국 콘텐츠로 세계 어디서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배우로서는 너무 좋은 일이죠. 어떻게 보면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웃음)?” 답은 이미 그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이번 드라마에서 이종석은 본격적인 액션을 선보였다. 교도소 안에서 죄수들과 거친 몸싸움을 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무술 팀에게 지도를 받고, 촬영 중엔 무릎 부상을 크게 당하기도 했다. “살아서 잘 마쳤으니 다행이죠.” 촬영이 고된 만큼 보람은 물론 함께 긴 시간을 보낸 배우, 스태프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도 크다. 이종석은 특히 4회의 엔딩 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죄수들이 박창호를 둘러싸고 ‘빅! 빅! 빅’을 연호하는 장면이다. “대본에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이라고 지문이 적혀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거예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실제 방송분을 보면서 안심했어요. 만화 같기도 하고, 카메라 앵글이나 음악, 분위기까지 연출하면서 신경을 많이 쓰셨더라고요. ‘아, 뭔가 멋있다!’ 작품을 만드는 구성원들을 의지하게 됐다는 것. 전과는 좀 달라진 부분이에요.” 일단 한번 믿음이 싹트면 자신감은 덩달아 자란다. 그는 혼자 자책하고 걱정하는 대신 팀원들과 고민을 나눈다고 했다. 막연히 불안해하기보다 일단 한번 도전한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올해 하반기 개봉을 앞둔 도심 테러를 둘러싼 액션 영화 <데시벨>에서 그는 해군으로 분한다. 이전의 이종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조금 다른 결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재미있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하는 거죠. <빅마우스> <데시벨> 모두 그래요. 아직은 젊은 패기랄까. 물론 그렇게 촬영해놓고 ‘괜찮은 걸까? 나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은 꽤 하죠.”
이종석표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워하는 이라면 조금 아쉽겠지만 독특한 아우라의 사이코패스 연기로 모두를 놀라게 했던 영화 <브이아이피> 이후 확실히 그는 과감해졌다. 최근 박훈정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마녀 2>에서는 장발의 미스터리 맨으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을 오래 유지하는 타입이다. 비대면으로 진행된 지난해 서울 패션 위크에선 비욘드 클로젯 쇼에 모델로 등장해 고태용 디자이너와의 의리를 지켰다. 군 복무가 막 끝난 후였다. “태용이 형이 디자이너로 첫 쇼를 할 때 제가 모델이었거든요. 데뷔 시기로 보면 제가 선배죠(웃음). 예전엔 어떤 조급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기꺼이 해보려고요. 저로 인해 한 분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은 일이잖아요.” 현재 이종석의 소속사인 하이지음스튜디오의 황기용 대표 역시 <당신이 잠든 사이에> <피노키오> 등의 드라마 제작자로 그와는 오래 신뢰를 쌓아온 사이다. “저에겐 좋은 형이고 든든한 대표님이죠. 가끔 만나서 밥 먹고 드라마 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올 초부터 함께하게 됐어요.” 보통 남자들의 인간관계가 술로 흘러간다면 그에게는 커피가 있다. 술을 전혀 못하는 그는 바리스타의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직접 커피를 내린다. “아주 전문적이진 않아요. 친구가 블렌딩한 원두를 보내주면 산미니 보디감이니 아는 척은 하는데, 전 그냥 강배전으로 태워서 쓴맛 나는 커피가 좋아요.” 그가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운영했던 가로수길의 ‘89맨션’은 팬데믹으로 인해 문을 닫았지만 카페는 언젠가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사실 그 무렵 이종석은 연기 외에도 뭔가 많은 일에 도전했다. 드라마에서 그가 읊었던 시 ‘풀꽃’의 주인공 나태주 시인과 함께 시집을 내기도 했고, 소속사를 설립하고, 89맨션이라는 아지트 같은 공간도 만들었다. “조용하고 예쁜 공간을 좋아하다 보니 카페를 여는 건 제 오랜 꿈이었어요. 인테리어 소품이나 가구 보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꾸민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죠. 이런 경험이 연기에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지만, 연기 외적으로, 한 개인으로서 제 삶이 좀 더 충만해졌어요.”
89맨션을 가장 그리워하는 건 아마 팬들일 것이다. 지난 9월 12일 이종석은 오랜만에 무대에서 팬들과 만났다.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이번 팬 미팅은 오랜 시간 기다려준 그들을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100분으로 예정된 공연은 묵혀두었던 얘기가 길어지며 3시간까지 연장되었다. <빅마우스> 출연진도 게스트로 나와 멋지게 노래까지 뽑았다. 박창호의 유일한 친구이자 오른팔인 김순태 역의 오의식, 매력적인 빌런 공지훈을 연기한 양경원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형들인데 인간적으로 성숙한 분들이라 제가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특히 제가 ‘코리안 조커’라고 부르는 경원이 형은 첫 촬영 때 로브 하나만 걸치고 나타났는데 되게 섹시해서 ‘뭐지?’ 싶더라고요.” 눈 밝은 시청자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빅마우스> 공지훈과 <사랑의 불시착>의 북한 군인 표치수는 동일 인물이다.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는데 두 분 모두 흔쾌히 와주시겠다고 해서 감사했죠. 팬들이 좋아해주시는 건 물론 형들 덕분에 저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종석의 팬 미팅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그 역시 가슴 뭉클한 시간이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나라의 팬들이 오직 그를 만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네코미미라는 요즘 유행하는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한 진실 게임을 할 때는 추첨을 통해 관객 중 두 명을 무대 위로 초대했는데 독일과 중국에서 온 해외 팬들이었다. 통역이 필요해 즉석에서 도움을 구하자 이번엔 4개 국어가 가능한 인도 팬이 등장해 그를 놀라게 했다. 공연이 끝날 즈음 이종석은 오늘의 기억 덕분에 앞으로 몇 개월, 몇 년은 기운 내 어깨 펴고 활동할 것 같다고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건 진심이다. “제가 자존감이 낮은 인간인데 팬 미팅을 하고 나면 충전이 돼요. 살다 보면 스스로가 조그맣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팬들과 만나면 ‘그래, 내가 쓸 만한 인간이지’ 힘이 나는 거예요. 저한텐 의미가 커요.”
우리가 인터뷰를 나눈 다음 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몰랐어요. 그렇게 축하 인사를 많이 받고선 또 잊고 있었네요. 아직은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여주시겠죠?”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그는 딱히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물건도 없다. 옷 세 벌이면 1년을 난다고 할 정도다. “번 돈을 어디에 쓰냐고요? 음, 참신한 질문이군요. 그나마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 거창한 건 아니고 최근에는 향초를 꽂는 오브제와 새로 나온 핸디 청소기 하나 샀어요. 그리고 진짜 맛있는 고구마!” 그의 한 달 소비 목록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배달 앱이다.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렇듯이. 그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아직은 생각하는 중입니다.” 당장은 <데시벨>의 후시 녹음과 포스터 촬영 일정이 잡혀 있다. 영화를 개봉하면 홍보로 또 바빠질 것이다. “당분간은 좀 쉬어도 되지 않나 싶어요. 천천히 숨을 고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려고요.” 한때 그는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대중적인 인기도 유지하는 그런 불변의 스타. “맞아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그런 말을 했죠. 지금은 어떤 목표라기보다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냥 매일매일이 마음 편했으면 좋겠고, 평화로운 거요. 그래야 제 삶에 더 집중하게 되니까.”
9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 그리고 성숙해졌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10년 후에 또 보자’는 말에 ‘10년 후에나 보자’는 거냐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좋아했던 청춘스타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보며 그가 출연했던 작품으로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큼 낭만적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만약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또 운이 따라준다면, 언젠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와도 같은 숱한 필모그래피를 지닌 관록의 배우이자 여전히 모두가 만나고 싶어 하는 최고의 스타로 다시 만나 오늘의 대화를 웃으며 떠올릴 것이다. 그의 마지막 답변은 명쾌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종석의 다음 라운드는 이제 막 시작됐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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