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키드가 디자이너가 될 때, 라프 시몬스 이야기
패션과 음악을 떼어놓는 건 불가능하다. ‘기타 히어로’ 존 메이어는 비즈빔을 컬렉팅하고, 래퍼들은 릭 오웬스와 베르사체를 입으며, 본인의 취향을 드러낸다. 준 다카하시는 스포티파이를 통해 ‘Kosmic Musik’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고, 더 로우와 버버리 같은 브랜드 역시 직접 큐레이팅한 플레이리스트를 제작한다.
패션계와 뮤지션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디자이너는 단연 라프 시몬스다. 유스 컬처와 그로부터 파생된 음악 장르에 뿌리를 둔 그는 음악이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서브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며 자라온 ‘뮤직 키드’였음을, 컬렉션을 통해 자랑스럽게 표출하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라프는 본인의 첫 번째 런웨이 쇼였던 1997 F/W 컬렉션의 곡으로 얼터너티브 록 밴드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의 노래 ‘Tonight, Tonight’을 재생했다. 그 후 1998 S/S 컬렉션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스래시 메탈 밴드, 레이저(Razor)의 로고와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앨범 커버가 그려진 슬리브리스 톱을 선보인 것. 이때 라프는 단순히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커버를 프린트한 것이 아니었다. 스래시 메탈과 펑크란 장르가 담고 있는 자유로운 정서에 공감을 표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스래시 메탈, 펑크와 같은 장르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공감했다는 증거 역시 또렷이 남아 있다. 라프 시몬스 2002 S/S 컬렉션의 오프닝은 홍염을 치켜든 맨발의 모델들이 장식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게릴라에게 영감을 받은 퍼포먼스였다. 이를 두고 <타임>지는 해당 컬렉션이 “테러리스트 단체를 연상시킨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정작 라프는 “컬렉션은 자유에 관한 것”이라는 코멘트로 논란을 일축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은 항상 자유와 젊음을 향한 외침, 그 자체였다는 것을.
검정 배경 위에 전파 방출 스펙트럼을 프린트한 티셔츠나 에코백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정체는 밴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앨범 <Unknown Pleasures>의 커버 아트다. ‘역대 최고의 앨범 커버’ 순위에 빠지지 않는 이 아트워크가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된 이유 역시 라프 시몬스의 런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과 바우하우스(Bauhaus), 뉴 오더 (New Order) 등의 앨범 아트를 담당한 피터 사빌(Peter Saville)과의 협업으로 완성한 2003 F/W 컬렉션은 포스트 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헌사였다.
20년이 지났지만, 해당 컬렉션의 피시테일 재킷은 지금도 500만원에 가까운 가격에 거래된다. 전설로 남은 이 컬렉션으로 인해 포스트 펑크라는 장르에 빠지게 된 ‘패션 키드’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포스트 펑크와 신스 팝을 소개한 것 역시 라프 시몬스였다.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내내 유스 컬처와 서브 장르 음악의 치기 어린 반항심을 패션으로 풀어낸 라프 시몬스의 노고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래퍼 에이셉 라키는 2017년 ‘Raf’라는 곡을 발매했다. “부탁인데, 내 라프에 손대지 마”가 반복되는 곡의 뮤직비디오 역시 라프 시몬스가 처음 선보인 컬렉션 1995-1996 F/W 영상과 동일한 포맷을 가진다. 래퍼 릴 우지 버트 역시 ‘The Way Life Goes’라는 노래에서 “내가 라프를 신을 때, 너는 릭(오웬스)을 신었지”라는 가사를 쓴 적이 있다. 라프 시몬스가 본인의 컬렉션을 통해 다양한 음악 장르를 ‘샤라웃’한 것처럼, 래퍼들 역시 라프를 ‘샤라웃’하며 그가 컬트적 위치를 더 견고히 하도록 도왔다.
디자이너는 컬렉션을 통해 본인이 가진 생각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아티스트는 음악을 통해 본인의 감정이나 메시지를 전달한다. 벨기에의 작은 마을 네이르펄트(Neerpelt)에서 나고 자란 라프 시몬스는 유년기에 작은 레코드 가게에 들러 커버 아트가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매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아티스트를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고, 그 결과물인 컬렉션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패션과 음악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때 라프 시몬스가 완벽한 예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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