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 창
윈도 디스플레이의 역할은 확장될 수 있을까? 설치미술가 최재은과 에르메스의 만남이 가능성을 제시한다.
윈도 디스플레이는 기본 역할이 있다. 상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 소비를 촉진하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알린다. 그것이 공적 메시지를 전하는 창도 겸할 수 있을까? 설치미술가 최재은이 작업한 현대백화점 판교점 에르메스의 스페셜 윈도 디스플레이를 취재하면서 든 생각이다. 처음엔 푸른 초원을 연상케 하는 윈도가 팬데믹에 지친 우리에게 보내는 위로 같았다. 하지만 작업 의도를 들으면서 의미가 확장됐다. 그간 최재은이 추구해온 생태적 메시지와 에르메스가 올해 내건 주제 ‘가벼움의 미학(Lighthearted)’이 결합하면서 ‘당신은 어떻게 소비하고, 지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최재은은 1976년 도쿄로 건너가 일본 전위예술의 근거지인 소게쓰 아트센터에서 이케바나, 조각, 사진, 영상, 건축 등을 공부했다. (이케바나는 일본 전통 꽃꽂이 이상의 예술이다.) 당시 요셉 보이스, 백남준, 오노 요코, 존 케이지 등의 활동을 지켜보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거대한 건축물, 조형물 등을 천으로 감싸는 작업을 해온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Christo and Jeanne-Claude)의 워크숍에 참여하는 등 실내에서 벗어나 외부의 대형 작업으로 확장시켜나갔다. 첫 번째 개인전 작품도 1970년대 초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와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의 공동 작업인 소게쓰 아트센터 실내 정원 ‘천국’(1977~1978)을 흙으로 덮어 이사무의 조각을 또 다른 형태로 탄생시키며 그 위에 씨앗을 뿌린 작품 ‘대지’(1985)다. 그가 세로 3.5m, 가로 10m의 쇼윈도라는 공간에서 펼쳐낸 이상은 규모만 다를 뿐 맥을 같이한다.
네 개의 윈도 모두 ‘저 푸른 초원 위에’ 같습니다. 유리가 햇빛처럼 반짝이고 새, 강아지, 풀이 자리하는데요. 이런 구상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에르메스의 올해 주제는 ‘가벼움의 미학’이에요. 물리적인 가벼움 이상의 현시대에 필요한 철학을 품고 있어요. 이 주제에 공감해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현대인은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생산과 소비라는 쳇바퀴의 스피드가 끊어낸 삶이 팬데믹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의식을 전환할 때입니다. 저는 부모가 쓰던 에르메스 가방을 자식이 들고 다니는 풍경이 아름다웠어요.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 덕분에 물건과 사람이 오래 관계를 맺는 것이 좋았고, 그 시간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이지요. 이번 윈도 디스플레이에는 유리라는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의 투명함, 단순함은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한다는 것으로, 넘쳐나는 공산품을 멀리하고 사물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습니다. 또한 전반적으로 ‘초원의 아침 빛’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리쬐는 빛 아래 어디에나 생명이 자리합니다. 강아지가 산책하고 새가 날지요.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가장 그리운 것이 이런 자연의 감동, 희망이 아닐까요?
파리 건축 에이전시 RDAI는 에르메스 매장을 디자인할 때 그 지역 문화를 반영해왔습니다. 최재은 작가의 윈도 디스플레이 또한 ‘에르메스, 판교(板橋)를 건너다’라 명한 작품이 있군요.
판교라는 지명은 강에 널(판자)로 다리를 놓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어요(널다리를 한자 ‘板橋’로 표기). 이에 유리로 다리 형상을 만들고 사람들이 오갔다는 상징성으로 구두를 놓았습니다.
윈도 디스플레이는 가방, 신발 등의 상품을 필수로 들여야 합니다. 작가로서 이 점이 어렵지 않았나요?
앞서 말했듯이 에르메스는 하나를 소유하면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와는 상반되는 지점이죠. 이들 상품이 가진 시간성을 높이 평가하기에 작업이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간 자연과 시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생태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왔습니다. 몇몇 예를 들면, 1993년 대전 엑스포의 ‘재생조형관’은 버려진 유리병으로 만든 조형적 건축물이죠. 1995년 일본 대표로 참여한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Micro-Macro(미시-거시)’에선 플라스틱과 미생물의 관계를 탐구했고,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또한 땅속 미생물이 만들어낸 종이의 흔적을 보여줬습니다. 이번 윈도 디스플레이도 맥을 같이하나요?
1980년대 중반 작업부터 생명을 여러 소재로 다뤘어요. 이케바나의 영향도 있으나, 그것의 조형성보다는 무한과 부딪히는 생명의 유한성이 흥미로웠죠. 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이런 사고를 저뿐 아니라 많이 할 겁니다. 제 작업 중에 2015년부터 진행해온 DMZ 프로젝트 ‘대지를 꿈꾸며(DMZ Dreaming of Earth-Nature Rules)’가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우주, 세계,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파괴된 DMZ 자연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전문적인 조사와 기술적 해결 방안을 모색했어요. 이렇게 구축된 자료와 방법론은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과 2020년 하라미술관의 전시 <자연국가>를 통해 발표했고, 많은 이에게 영감과 문제의식을 던졌죠. 이 프로젝트에 20여 명의 작가, 건축가, 과학자, 생태학자 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는 ‘DMZ 생태 현황 분석도’를 만들었어요. 이 작업은 자연과의 이상적인 공존 관계에 초석을 두고 순환적인 개념으로 현실에 접근하는 프로젝트죠. DMZ의 생태 현황을 분석한 후 파편화된 나지에 상응하는 식재를 해 생태 숲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이는 자연 주권을 존중하는 환원적 의미로 ‘자연국가(Nature Rules)’라 명명했어요. 이 작업 전체가 DMZ라는 특수한 한계를 극복해야 했어요. 더 자세히 얘기하면, 수목 생리학자 홍성각을 비롯해 여러 산림학자와 그곳에 어떤 식물을 어떻게 심어야 자랄 수 있는지 조사해 배치도를 만들었습니다. 이것만 1년 가까이 소요됐죠. 당연히 지뢰가 있는 DMZ에 사람이 들어가 씨앗을 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자볼(Seed Bomb)’을 고안했습니다. 종자볼은 점토 흙에 씨앗을 혼합한 뒤 세심히 반죽해 공기를 빼가며 공 형태로 만든 것입니다. 종자볼은 씨앗 종류와 수량에 따라 사이즈가 달라지며 발아율은 50~80%입니다. 드론으로 종자볼을 DMZ에 투하하고자 합니다. 1㎡당 8~10개 심는 것이 이상적이라 DMZ에 18억6,504만 개가 필요하고 한 개당 약 100원이 듭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도네이션 형태가 될 거예요. 이 모델이 엄청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DMZ 생태계가 잘 보존됐으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DMZ는 생각 이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생태 현황 분석도에 표기된 크고 작은 나지는 총 638군데인데 인간의 간섭으로 그조차 뭉개져 형태를 상실해가고 있어요. 70여 년간 서로 증오를 멈춘 적 없는 한반도 DMZ… 이제 증오를 내려놓고 유연하게 자연국가의 주권을 찾아줘야 합니다.
‘대지를 꿈꾸며’뿐 아니라 워낙 방대한 규모의 설치 작품을 많이 선보여왔죠. 이번엔 윈도 디스플레이 작업이었습니다. 세로 3.5m, 가로 10m의 쇼윈도라는 공간에 제약은 없었나요?
설치미술이라는 장르는 늘 크고 작은 공간과 조우하며 확대와 축소를 거듭해 흥미롭죠. 그러한 의미에서 에르메스 윈도와의 만남도 흥미로웠어요. 소게쓰 아트센터에서 공부하면서 1980년대 일본의 현대미술,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만나 엄청난 영향을 받았어요. 저는 스승이신 데시가하라 히로시 덕분에 일본 건축의 특성인 실내 소형 미술관 도코노마에서 외부의 거대한 공간으로 확장했지요. 스승께서 워크숍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셨거든요.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아시죠? 대규모 건축물, 조형물 등을 천으로 감싸는 작가들인데, 그들의 마이애미 프로젝트 워크숍에 참가하고, 영국 조각가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의 제작 어시스턴트로 활동한 영향도 컸습니다. 저의 첫 전시 데뷔 또한 단게 겐조와 이사무 노구치의 소게쓰 아트센터 석조 실내 정원 ‘천국’을 기반으로 이뤄졌고요.
윈도 디스플레이는 상품 소비를 촉진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제 그 역할이 조금은 바뀔 때일까요?
광고나 윈도나 아름답게 보여 판매를 독려하는 기본 기능이 있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할 때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우니 빨리 사세요’는 더 이상 안 되죠. 이제 윈도 디스플레이는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고, 사물을 어떻게 대할지 제안하며, 브랜드 정체성의 전환을 담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후 변화를 보세요. 지구의 비명이 들리지 않나요?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을 전환해야 해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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