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 시몬스를 추억하며, ‘베스트 런웨이 모먼트’ 7
완전히 은퇴를 선언한 것도 아니고, 브랜드 중단을 선언한 지 고작 며칠 지난 디자이너를 ‘추억한다’는 표현은 어쩌면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자고로 무언가를 추억한다는 것은 시간이 충분히 지나 기억에 먼지가 쌓일 때쯤 이를 털어내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디자이너가 라프 시몬스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런웨이에 후드와 봄버 재킷을 등장시키며 스트리트 웨어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고, 그가 데뷔한 이래 수많은 디자이너가 라프처럼 ‘본인이 사랑하는 문화’를 컬렉션에 녹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을 자랑스레 내걸고 27년간 이어온 브랜드의 ‘베스트 런웨이 모먼트’를 되돌아보며 그가 남긴 족적을 살펴보자.
1. 절제된 아나키즘, 1998 S/S ‘Black Palms’
라프 시몬스의 두 번째 피지컬 쇼였던 ‘Black Palms’를 요약하자면? 등에 야자수를 그려 넣고, 삭막하고 건조한 아스팔트 바닥 위를 걷는 스케이터와 레이버. 쇼장을 채운 레이브 비트에서는 젊은 라프 시몬스의 세상을 향한 분노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라프는 그 분노를 단순히 뿜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교한 테일러링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일종의 ‘절제된 아나키즘’을 선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슬림 수트’ 실루엣이 헬무트 랭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받았다면, 당시 만연하던 반항 정신과 그런지 룩의 시초는 라프 시몬스다.
2. 프레피 라프, 2000 S/S ‘Summa Cum Laude’
‘수석 졸업’이라는 제목 아래 펼쳐진 2000 S/S 컬렉션은 라프 시몬스식 실루엣의 집합체와도 같다. 적절한 컬러 활용, 슬림한 실루엣과 특유의 품이 큰 봄버 재킷까지. 이 컬렉션이 더 흥미로운 점은 라프 시몬스의 상징과도 같은 프린트 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패턴을 연상시키는 니트 톱을 선보인 라프는 어쩌면 이때부터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3. 하이패션이 된 후디와 봄버 재킷, 2001 F/W ‘Riot! Riot! Riot!’
이 컬렉션에 대한 부연 설명이 굳이 필요할까? 패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값비싼 봄버 재킷을 탄생시킴은 물론, 라프를 슈퍼스타로 만든 컬렉션이다. 특유의 오버사이즈 톱, 디스트레스트 디테일과 레이어드는 지금도 훌륭한 레퍼런스 소재다.
4. 자유를 향한 외침, 2002 S/S ‘Woe Unto Those Who Spit on the Fear Generation… The Wind Will Blow it Back’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을 살펴볼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쇼 타이틀이다. ‘공포의 세대를 향해 침을 뱉는 자들이여,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그의 2002 S/S 컬렉션은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패션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길을 제시한다. 뎀나가 ‘패션은 세계를 반영해야 한다’고 했던가. 라프 시몬스는 홍염을 치켜들고 ‘우리는 불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단지 조금 늦게 태어났을 뿐’이라는 문구가 적힌 톱을 입은 모델들을 통해 영원히 유효할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해 초, 브랜드의 아카이브 피스를 재발매한 ‘아카이브 리덕스’ 제품군 중 해당 컬렉션의 제품이 상당수였다는 점만 봐도, 라프가 던진 자유의 메시지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유효하다.
5. 소비주의에 대한 고찰, 2003 S/S ‘Consumed’
소비주의에 대한 라프 시몬스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컬렉션. 해당 컬렉션에 대해 그는 “모두가 소비하고, 또 소비되는 세상이다. 누구는 이런 상황이 세상의 종말을 앞당길 것이라 하지만, 다른 누구는 소비를 통해 자아를 재창조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그는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말보로 로고와 얼굴을 가린 모델들을 통해 몰개성화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하지만 페인트칠을 한 알루미늄 캔을 목에 걸고 있는 모델들을 통해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완전히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는 희망 어린 메시지 역시 동시에 던진다.
6. I love you, Post-Punk. 2003 F/W ‘Closer’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마지막 정규 앨범 타이틀을 그대로 따온 그의 2003 F/W 컬렉션.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Peter Saville)과 협업으로 완성한 이 컬렉션은 ‘뮤직 키드’로 자라온 라프 시몬스가 포스트 펑크라는 장르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았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의 컬렉션이 수많은 뮤직 키드를 길러냈음은 물론이다.
7. 아트가 된 패션, 패션이 된 아트. 2014 F/W ‘Raf Simons / Sterling Ruby’
스털링 루비와 협업으로 완성한 라프 시몬스의 2014 F/W 컬렉션은 패션 브랜드와 아티스트 간의 ‘협업 모범 사례’와도 같다. 스털링 루비는 본인의 예술품을 더 광범위한 관객이 즐겼으면 했고, 라프 시몬스는 2008년 도쿄에서 매장을 오픈하며 스털링 루비에게 디자인을 맡길 때부터 그의 팬임을 숨기지 않았다. 가장 컬트적인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스털링 루비는 원하던 바를 이뤘고, 라프 시몬스는 스털링 루비의 아트워크를 단순히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완벽하게 ‘패션으로’ 녹여냈다.
프라다를 통해 라프 시몬스의 디자인을 앞으로도 만나볼 수 있지만, 브랜드 라프 시몬스가 빠진 패션 위크는 허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브랜드 중단을 발표한 라프 시몬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Forward Always’였다. 이 말처럼 브랜드를 중단하는 것 역시 그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한 걸음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뮤직 키드’ 라프 시몬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방문하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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