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앤 올’ 피와 뼈와 심장을 삼킨 러브 스토리
결국 모든 걸 내줌으로써 완전해지는 사랑. ‘잇 미 바이 유어 러브(Eat me by your love).’
목가적인 풍경 그림이 한 컷씩 나열된다.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을 하나하나 근접해서 바라보던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자 12점의 풍경화가 걸린 벽의 풍경이 드러난다. 각기 다른 풍경 하나하나를 살피던 시선이 쫙 펼쳐져 방금까지 본 풍경들이 오와 열을 맞춰 걸린 12개의 액자에 걸린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대단히 사소해 보여서 간과하기 쉬운 오프닝 시퀀스지만 이는 일종의 선언 같다. 같은 것을 보고 있음에도 그 대상을 향해 얼마나 접근하는가에 따라 정보와 감각은 상이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며 <본즈 앤 올>은 시작된다.
대부분의 학생이 수업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학교에서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친구로부터 저녁 파티 초대를 받는다. 아빠에게 허락받기 어려울 거라는 매런에게 친구는 저녁에 몰래 빠져나오길 권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매런은 양치 후 아빠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러자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선잠을 자던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잘 자라고 답하며 딸의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다. 그러나 매런은 방 창문을 통해 집을 빠져나가 송전선을 따라가면 나오는 꼭대기 집에 사는 친구를 찾아간다. 그렇게 부모가 비운 집에 3명의 친구를 초대한 밤의 분위기는 여느 하이틴 무비처럼 명랑하기만 할 것 같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결코 초대해서도, 초대에 응해서도 안 될 불청객이 끼어 있었고,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다. 그저 발그레한 웃음으로 점철될 것 같았던 밤은 자지러지는 비명으로 찢긴 악몽처럼 내려앉고, 매런은 부리나케 달아난다.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서스페리아>, <위 아 후 위 아>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 <본즈 앤 올>은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식인 본능이 있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공통적이지만 원작 소설이 자신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는 소녀의 독립에 방점을 찍으며 매혹적인 장르적 쾌감으로 상승하는 인상이라면, 영화는 동일한 욕구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와 교감하고 연대하는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보다 드라마틱한 서정적 여운으로 하강하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판이하다.
전자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과 독립에 초점을 맞춘 카타르시스로 나아간다면 후자는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성숙과 상실의 통증을 여운처럼 남기는 파토스로 파고든다. 전자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괴물의 삶을 신비롭게 채색하는 괴벽한 공상이라면 후자는 괴물로 태어난 운명을 밀어내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의 고독한 현실을 소묘하는 가련한 애수에 가깝다.
“내게 가장 매력적이라고 여겨지는 캐릭터는 독불장군이다. 약자들이지. 중심에서 벗어난 가장자리에 자리한 사람들. 그리고 이 영화는 극단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주는 영화다. 다만 그들을 판단하는 대신, 그들 사이에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본즈 앤 올>을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말처럼 영화는 생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식욕을 타고났기에 은밀하게 자기 정체를 숨겨야 하는 식인자,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을 먹는 ‘이터’에 관한 영화다.
육식동물이 육식을 하고, 초식동물이 초식을 하듯, 이터도 사람을 먹는 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동족 사회에서 취향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끔찍한 욕구를 타고난 운명이기에 필연적으로 억제해야만 하는 욕구지만, 말 그대로 타고난 욕구를 마냥 억누르기도 힘든 법이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그리는 <본즈 앤 올>의 매런은 자신의 욕구를 끔찍하게 여긴다. 자신의 본성을 혐오한다. 아빠는 그런 매런의 욕망을 억누르고 사고를 수습하는 조력자였다. 결국 매런이 먼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만나는 두 식인자는 자신의 식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존한다. 매런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자신의 식성을 보존하는 노하우를 쌓아온 것으로 보이는 설리(마크 라이런스)는 살아 있는 자를 먹지 않고 죽은 자만 섭취한다고 한다.
자신의 후각으로 죽을 때가 다가온 자를 가려내고, 자신과 동족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만난 또래 소년 리는 신원이 불분명해 보이는 자를 유인하거나 습격해서 사냥하듯 배를 채운다. 둘 다 자신의 본능을 숨기되 억누르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양식대로 선택하고 습성대로 먹을 뿐이다. 그 와중에 식인자가 아니지만 식인자의 본능에 호감을 느끼고 추앙하는 이와 동행하며 식인의 습성을 유지하는 제이크(마이클 스털버그) 같은 이를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동일한 식욕으로 수렴하는 운명 안에서도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리고 매런은 그들과는 좀 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본즈 앤 올>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지난 영화처럼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 관계와 세계의 온도를 탐색한다. 이탈리아 패션 명문가의 외국계 며느리,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록 스타, 낯선 남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소년, 명성이 자자한 현대무용단에서 재능을 인정받고자 하는 무용수, 엄마의 직업 때문에 타국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소년까지, 각기 다른 삶에서 예기치 못한 욕망과 대면하게 된 이들이 감당하는 충동은 예기치 못한 충돌과 필연적인 갈등을 빚어내지만, 끝내 자신에 대한 물음과 자아의 각성으로 다다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다만 카니발리즘이라는 식인 풍습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해당 소재가 두드러지는 장르물을 예감하기 쉽고, 그런 면에서는 전작 <서스페리아>의 연장선에 있는 경력 같기도 하지만 10대 소녀의 방황과 성장과 사랑과 상실을 그린다는 점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나 <위 아 후 위 아>의 중력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사람을 먹고자 하는 매런의 욕망은 일찍이 행해서는 안 될 금기였고,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이는 가족의 헌신을 통해 가까스로 봉인됐지만 가끔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충동은 한동안 쌓아온 일상을 허물어버린다. 결국 가족의 헌신이 사라지고 나서야 시작된 홀로서기는 자신의 욕구를 물려준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욕구를 지닌 자들을 거듭 만난다. 그럼으로써 식인 습성이 있는 이가 자신만이 아니며 자신이 비정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타고난 습성을 거부하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자라나고 뿌리내린다. 친밀해진 이들을 본의 아니게 먹고 싶다는 충동으로 해치고 싶지 않다. 저주 같은 본능을 끊고, 떠돌이 같은 삶 대신 지속 가능한 일상에 뿌리내리고 싶다. 동반자가 됐지만 먹여야 하는 것을 먹인다는 리와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맞닥뜨리며 필연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로드 무비이자 성장 서사이며 로맨스물인 <본즈 앤 올>은 같은 본성을 타고났기에 운명처럼 서로를 허용하면서도 본성을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각기 다른 탓에 반목을 경험하고, 그렇게 서로를 밀어낸 뒤 서로를 끌어당기는 마음의 자장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체감하는 소녀와 소년의 사랑과 성장을 그린다.
타고난 본능으로 매일을 연명하며 떠도는 삶을 지나 함께 한데 자리하고 공존하고 상생하며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약한다. 운명이 지정한 정체성을 지우고 자신들이 선택한 정체성으로 새로운 삶을 선언하듯 살아간다. 그렇게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는 식성을 타고난 이들은 공포스러운 식성 덕분에 은둔한 존재로서 그림자처럼 살아가야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자이며 사회적 주류가 될 수 없는 약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불가능의 가능성,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불가능 속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사랑이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말은 <본즈 앤 올>이 로맨스물이라는 장르적 세계를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교감과 연대를 통해 성장하는 어린 소수자들이 다다를 수밖에 없는 궁극적 감정을 그리는 영화라는 사실을 대변한다.
동시에 이는 <본즈 앤 올>이 감독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형상을 구현해낸 결과물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원작 소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결말부의 선택은 파괴적인 동시에 완전하게 감정을 보존한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며, 그 운명의 굴레를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결국 그 너머의 삶은 다시 칠흑처럼 깜깜해졌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아닌 사랑을 삼킨 이후의 삶은 결코 예전 같진 않을 것이다. 사랑 너머의 삶을 살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낭만적인 비극이자 매혹적인 모순이 <본즈 앤 올>에는 있다. 그렇게 모든 걸 내준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정체성이다. 그것만이 전부다. 전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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