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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풍선’에서 박복한 서지혜를 보는 기분

2022.12.23

‘빨간풍선’에서 박복한 서지혜를 보는 기분

비가 내리는 여름의 교정,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교복 입은 소녀들. 뉴진스의 신곡 ‘Ditto’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 아니다. <왕가네 식구들>, <왜그래 풍상씨>, <오케이 광자매> 등을 집필한 문영남 작가의 신작인 TV조선 주말 미니시리즈 <빨간풍선>도 그렇게 시작한다. 물론 문영남 작가가 10대 소녀들의 감성을 세밀하게 포착한 이야기를 들려줄 리는 없다. <빨간풍선>이 학창 시절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그때부터 20여 년에 걸쳐 부풀어 오른 자격지심과 욕망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주인공은 박복하다.

TV조선 ‘빨간풍선’

배우 서지혜가 연기하는 주인공 조은강은 당연히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가난하게 사는 여자다. 혼자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지만, 그가 은강의 친구를 더 좋아해서 그와 결혼하지 못했다. 현재 애인은 연하의 공시생인데, 4년 동안 뒷바라지하며 공부시켰더니 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자기를 버리려고 한다. 그런데도 하염없이 그와의 결혼을 꿈꾸며 맛있는 저녁을 만들고 있으니 복장이 터진다. 박복한 주인공 곁에는 그를 박복하게 만든 인물들이 있다. 바람기 많은 아버지, 그런 남편에게 속 썩는 억척 엄마, 누님들에게 돈을 빌리며 사는 삼촌, 별다른 직장이 없는 동생. 당연히 이들은 주인공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나도 안 하지만, 주인공 속 긁는 소리를 자주 한다. 이런 가족과 살아온 주인공은 어떻게든 생존을 꿈꾸기 마련이다. 그래서 은강은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온 친구 한바다(홍수현)의 곁에 있었고, 지금은 바다를 포함해 그의 가족 곁에 붙어서 대소사를 대신 해주며 살고 있다. 이런 은강에게 세상이 친절할 리 없다. 문영남 작가가 그리는 세계이니 더더욱 그렇다. <빨간풍선>이 그리는 세상은 과장된 동시에 오래된 위계에 의해 움직인다. 부자와 빈자의 위계, 시댁 식구와 며느리 사이의 위계, 친손주와 외손주의 위계, 직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위계 등등. <빨간풍선>은 그런 현실을 버티던 주인공이 어느 날 ‘현타’를 느낀 후 오랫동안 상상만 해온 것을 실현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표면적으로 볼 때 주인공 은강의 목표는 잘생긴 데다, 직업은 의사이고, 자상하기까지 한 첫사랑이자 친구의 남편인 남자를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은강의 진짜 목적은 자신이 위에 올라서는 새로운 위계질서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역시 불륜과 복수가 빠질 수 없다.

TV조선 '빨간풍선'

TV조선 '빨간풍선'

TV조선 '빨간풍선'

아직 1·2화만 방영했지만 기본 구성상 <빨간풍선> 역시 문영남 작가의 전작뿐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를 껴안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글에서 그걸 비난할 생각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비난에 약발이 남아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이 나온 게 2008년이었다). 또한 클리셰는 고색창연한 관습인 동시에 ‘약속’이기 때문이다. 문영남 작가가 집필한 주말드라마의 약속을 즐겨온 시청자는 <빨간풍선>에서도 주인공을 괴롭히는 몰지각한 인물들 때문에 짜증과 분노를 느끼면서 주인공이 그런 사람들과 맞서는 상황에 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빨간풍선>은 그런 약속으로 점철된 드라마인 동시에 철저하게 약속을 어긴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바로 박복의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가 서지혜라는 것이다.

tvN ‘아다마스’

tvN ‘사랑의 불시착’ 

<빨간풍선> 1·2화는 <질투의 화신>, <사랑의 불시착> 등에서 차갑고 도도한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온 서지혜가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가난한 서지혜. 변변한 직업 없이 낡은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는 서지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고지순한 서지혜. 남자 친구가 다른 마음을 가진 줄도 모른 채 그의 자취방에서 청소를 하고, 음식을 준비한다. 심지어 남자에게 면박당하는 서지혜도 볼 수 있다. “겨우 이 꼬라지로 무슨… 너 내복까지 입었지?” 오랜만에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말을 함부로 하는 데다 그녀를 침대 밖으로 밀쳐내기까지 한다. 그녀가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꾸며 이야기하자 남자는 “뭐가 그리 급하냐, 할 게 결혼밖에 없냐”고 말하는데, 그런데도 여자는 꾹 참는다. 그런 언니에게 동생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그래봤자. 언니는 가성비 여친일 뿐이야.” 전작과 CF 등에서 서지혜가 보여준 모습을 떠올릴 때 <빨간풍선>의 조은강은 익숙한 캐릭터인 동시에 매우 낯선 캐릭터다.

TV조선 ‘빨간풍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짤’ 중에 ‘죽어도 한국 드라마에 나올 수 없는 장면’이란 게 있다. 예를 들어 ‘정의롭지 않은 이종석’, ‘가난한 이민호’,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철없는 박신혜’ 등이다. 그처럼 특정 배우가 주로 맡아온 캐릭터를 역으로 설명한 짤인데,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헌신한 남자에게 배신당하는 서지혜’도 그중 하나가 될 법하다. 그만큼  ‘차갑고 도도한 서지혜’라는 것 또한 여러 작품을 통해 이어져온 일종의 ‘약속’이란 얘기다. 이렇게 볼 때 <빨간풍선>은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와 배우 서지혜의 캐릭터가 각각 시청자와 맺어왔던 약속이 부딪치는 드라마가 된다. 그래서 문영남 작가와의 약속을 즐기지 못한 시청자에게도 서지혜와의 약속이 배반당하는 상황의 흥미는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욕망을 발현해 갈수록 차갑고 도도한 서지혜가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도 무릎이 까지는 줄도 모르고 잔디밭을 기어 다니는 서지혜를 보는 건 생경하다 못해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한국 드라마에서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던 장면을 보는 기분. 그래서 내심 주인공 조은강이 좀 더 박복한 상태로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프리랜스 에디터
강병진(대중문화 저널리스트)
포토
TV조선,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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