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에서 예술가로, ‘마르탱 마르지엘라’展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주제인 ‘예술, 물질과 인체, 시간의 영속성, 젠더, 관객 참여’를 기반으로 완성한 <마르탱 마르지엘라>展을 <보그 코리아>가 한발 앞서 만났습니다.
이번 전시의 키워드는 ‘머리카락’과 ‘은폐’,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와 그 이발소에서 향수를 판매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지엘라는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절, 가발로 만든 코트를 선보였죠.
입구를 지나 관람객을 처음 맞이하는 작품은 ‘헤어 포트레이츠(Hair Portraits)’. 마르지엘라표 매거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커버는 무성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장식했습니다.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벽에 매거진을 걸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연기자의 정체 역시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죠. 마르지엘라는 작품 사이사이에 블라인드를 설치해 관람객이 오롯이 하나의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커버의 인물들이 얼굴을 가린 것도, 스태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작품 자체를 느끼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죠.
다섯 개의 실리콘 구체 위에 각기 다른 색깔의 자연 모발을 하나하나 이식해 완성한 작품 ‘바니타스(Vanitas)’는 인간의 생애를 머리카락의 색상만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마르지엘라는 실리콘 구체를 전부 모발로 가리며 이들에게 역시 익명성을 부여합니다. 관람객은 시간은 어쩔 수 없이 흐르며, 그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상기하게 되죠.
마르지엘라는 인간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동물의 털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버스 정류장이라는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하기’ 위해서죠. 커피 잔과 접시, 스푼에 털을 입힌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의 ‘모피 잔의 아침식사’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은폐. 마르지엘라는 작품 전체를 가죽 커버로 가리거나 작품 일부를 흰 천으로 덮기도 합니다. 관람객이 ‘어떤 것이 숨겨져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전시에 더욱 몰입하고, 본인만의 해석을 내놓거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르지엘라가 직접 선택한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 ‘데오도란트(Deodorant)’ 역시 같은 키워드로 설명 가능합니다. 체취를 덮기 위해 존재하는 데오도란트는 형태의 변형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염색약의 라벨을 연상시키는 삼면의 제단화를 통해 개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의 색깔을 인위적으로 은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꼬집기도 하죠.
패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마르지엘라가 벗어야만 하는 옷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의류라는 제한적인 표현의 틀에서 벗어난 그는 온갖 무기를 동원해 창의성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디자이너’에서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로 거듭나고 있는 마르지엘라의 전시는 12월 24일부터 2023년 3월 26일까지, 롯데뮤지엄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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