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킴의 하얀 한옥
새하얀 도화지 같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 가회동에 문을 연 민주킴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디자이너 김민주와 만났다.
‘민주킴’ 론칭 8년 만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누군가는 왜 이제야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냐고 했지만 나에겐 지금이 적기였다. 점점 많은 분이 민주킴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온라인 스토어로만 제품을 보여주기엔 아쉬움이 크던 때였다. 마침 실제로 만져보고 직접 입어보고 싶다는 의견이 많아서,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획했다. 민주킴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1년여간 준비를 거쳐 드디어 문을 열었다.
강남이나 한남동, 성수동이 아닌 북촌을 선택했다.
서울의 모든 곳을 살폈다. 두루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북촌만큼 마음이 가고 애틋한 곳이 없었다. 앤트워프를 떠나 한국에 돌아온 후부터 8년간 줄곧 이 부근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이 너무 익숙하고, 저녁이 되면 찾아오는 고요함이 앤트워프랑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곳의 변치 않는 문화와 건축양식이 민주킴과 잘 어우러지는 듯했다. 내가 민주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이곳에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넥스트 인 패션>을 통해 해외에 알려졌는데, 해외에서 나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컸다.
1980년대에 지어진 구옥이 플래그십 스토어로 변했다.
누군가와 협업할 때 상대방이 민주킴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듣는 과정이 즐겁다. 민주킴 플래그십 스토어를 함께 작업한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프래그먼트’와 처음 만났을 때 민주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은지 많은 질문을 던졌다. 프래그먼트의 관점에서 민주킴은 항상 새로운 패턴과 컬러가 등장하는 브랜드인데, 민주킴의 어떤 것이라도 함께 잘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결과가 바로 ‘하얀 한옥’으로 탄생했다. 한옥의 기둥은 살리고 벽은 제거한 뒤 탁 트인 유리로 외관을 감싸 공간의 조도와 시각적 확장성까지 모두 확보했고, 플래그십 스토어의 내·외부를 하얗게 칠해 공간을 하나의 도화지처럼 완성한 것이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디자인과 설계에는 얼마나 관여했나.
거의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스튜디오 프래그먼트는 주로 차가운 물성의 자재를 활용해 담백한 공간을 설계하는 스튜디오다. 그들이 자주 활용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민주킴의 해석을 더하려고 노력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소재로 부드럽고 둥근 형태와 질감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공간 구성은 물론 공간을 채우는 물건 하나하나에도 세세하게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 프래그먼트 역시 그들의 디자인에 민주킴의 정체성을 어떻게 녹여낼지 많이 고민했다. 무엇보다 스튜디오 프래그먼트와 함께한 건 완벽한 피니싱 때문이었다. 플래그십 스토어의 처음과 끝을 책임감 있게 이끌어간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공간 구성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여러 방면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됐다.
민주킴의 모든 것이 집약된 곳이라 공간을 구획할 때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담긴 곳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구성을 결정지었다. 지상 2층은 내가 생활하는 주거 공간이고, 지상 1층부터 지하 1층까지 업무 공간으로 사용한다. 지상 1층엔 쇼룸과 매장이 있고, 중문을 열면 디자인실과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지하 1층은 높은 층고가 특징이다. 열여섯 차례 컬렉션을 진행하는 동안 완성된 드로잉 북으로 한쪽 벽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매 시즌 개발한 독자적인 원단,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자료와 민주킴의 상징적인 컬렉션 피스로 채운 아카이브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장 마음을 쏟은 공간은 어디인가.
쇼룸과 매장이 함께 있는 1층. 플래그십 스토어를 지은 가장 큰 목적은 매장이었다. 디자인실과 쇼룸, 매장을 한곳에서 운영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지만, 민주킴의 고객을 직접, 자주 보고 싶었다. 디자이너로 살면서 늘 기다려온 순간이다. 예전에는 부티크에서 디자이너가 직접 고객의 치수를 재주고 재단을 해주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그런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통해 그 문화를 재현하고 싶었다. 1층 매장을 호텔 라운지처럼 꾸민 것도 그런 이유다. 스튜디오 프래그먼트와 함께 제작한 이동식 선반도 호텔의 벨보이 카트처럼 디자인했다. 이 선반 하나가 한 사람의 옷장이 되는 거다. 입고 온 옷을 벗어두고, 짐을 놓고, 원하는 옷을 차곡차곡 걸어서 피팅 룸으로 향하는 동선까지 섬세하게 고려했다. 단순하지만 어딘가 미묘한 재미가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
지하 1층은 민주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는 아카이브 공간이다.
민주킴 첫 컬렉션은 나의 친언니 방에서 시작됐다. 8년간 여러 변화를 겪으며 이제야 민주킴의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고객에게 접근해보고 싶다. 짧지 않은 8년의 시간, 16번의 컬렉션을 통해 쌓아온 민주킴의 역사와 크리에이티브를 바탕으로 새 시즌이 탄생한다. 이 모든 과정과 디테일을 지하 1층 아카이브 공간에서 공개하고 민주킴의 모든 것을 직접 설명하려고 한다. 예전엔 런웨이 프런트 로에 사람들을 앉혀서 컬렉션을 소개했다면, 이제는 왜 이런 컬렉션을 완성했고, 이를 위해 어떤 소재를 개발했고, 어떤 스케치를 그렸는지 한 공간에서 보여주며 소개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 브랜드는 다른 브랜드보다 남다른 마케팅으로 접근해야 하니까. 이런 접근 방식을 취하고 널리 알리는 게 이 시대의 디자이너로서 내 역할이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구상하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전통성을 민주킴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공간이면서 모두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공간. 나조차도 매장에 들어가서 옷을 입어보는 경험이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공간은 어느 누구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길 원했다. 공간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공간 안에서의 경험이 더 귀중하니까. 언젠가 중요한 날, 이곳의 거울에서 마주한 본인의 모습과 이 공간에서의 따스하던 기억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다.
하얀 한옥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도화지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킴의 공간은 되게 귀엽고 아기자기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거다. 이 부분에 대해 나와 스튜디오 프래그먼트 모두 골똘히 고민했다. 모두의 기대를 뒤엎으려 한 건 아니지만, 매 시즌 변화하는 민주킴을 담아내려면 최대한 도화지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는 최대한 장식적인 것을 배제하고 하얀 내·외부와 필요한 가구만 배치해 군더더기 없이 공간을 구성했지만 매 시즌 변화하는 민주킴처럼 이 공간 역시도 조금씩, 계속 변화할 것이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처음 공개하는 지금은 우선 이 공간 자체가 지닌 강인함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다.
지극히 ‘민주킴다운’ 공간을 완성한 지금, 여전히 디자이너 김민주를 설레게 하는 건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상 깊은 디자이너를 물었을 때, 이 세대에서는 내 이름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좋은 경험을 하고 이를 발판으로 국내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너그러워지길 바란다. 요즘은 다방면에서 K-패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러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오래 사랑받으려면 자국민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 이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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