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형의 두 얼굴, 오묘한 경계
앞모습은 신중하고 뒷모습은 대담하다. 이 매력적인 경계에 김서형이 있다.
전력을 다해 자신을 몰아붙인 흔적은 역력했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다정은 이미 많이 아픈 상태로 시작한다. 더없이 말갛고, 한없이 수척하다. 그런데 연민이나 안쓰러운 마음은 불어넣어지지 않는다. 대신 ‘다정’의 그 저릿한 마음을 조금씩 공감하게 되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애씀을 나누게 된다.
음식을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음식을 이야기의 주제로 던지는 방법과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이혼을 앞둔 부부, 입시를 막 끝낸 아들, ‘다정’을 중심으로 흩어졌던 가족이라는 감정의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는 과정을 아주 담백하게 담아냈다. “원작을 읽지 않았어요. 선입견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내게 전해지는 ‘다정’의 감정을 깨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처음 대본을 전달받았을 때는 살짝 물음표가 없지 않았는데, 자극적인 장면이나 꽂히는 대사 한 줄이 없는데도 후루룩 읽혀 내려갔죠. 읽는 행위 자체가 힐링이 된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오랜 기간 공들여 기다리던 작품처럼 그렇게 ‘다정’을 만났다. 대본을 읽었을 때 감정 그대로 배우들과의 상견례, 대본 리딩, 마지막 촬영까지 김서형은 매 순간이 감정적으로 평온했다. 암 환자라는 ‘다정’의 컨디션만 제외하면 현장 분위기와 배우들의 밀도 높은 감정적인 친밀감은 그녀를 ‘다정’ 그 자체로 생활하게 했다.
“한석규 선배의 편안함이 가장 중요했죠. 존재 자체로 안정감을 주는 배우잖아요. 아들 역할을 맡은 ‘(진)호은’이와도 첫 만남부터 이상하게 편했어요.” 그래서인지 처음엔 어색하고 데면데면한 세 사람이 조금씩 서로의 감정에 스며드는 모습이 이질감 없이 잘 담겼다. “그냥 이 드라마에서는 아프고 슬프고 그런 걸 일부러 보여주지는 말자, 했어요. 말기 암 환자는 당연히 육체적, 감정적으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데 그걸 굳이 외형적으로 시청자 눈에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정이 전달하는 말이나 톤만으로도 충분히 그 상황이 배어 나올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이유로 김서형은 오랜만에 어깨를 덮는 긴 헤어스타일로 등장한다. 감독은 그녀 특유의 짧은 헤어스타일을 선호했지만, 병세가 깊어질수록 변화를 줘야 한다면 처음부터 병색 짙은 환자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생각한 헤어와 의상까지 갖춰 입은 모습에 감독도 공감했고 당연한 것을 비트는 조금 다른 시선이 지금의 단단한 ‘다정’을 만들어냈다.
김서형은 캐릭터를 분석할 때 감정의 이해와 설득만큼 비주얼에 대한 해석력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김서형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때 비주얼을 제외할 수 없는 건 모두 그녀의 이런 노력 덕분이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어떤 형태로든 음악과 일상을 공유하며, 잡지를 뒤적이고 영화를 보는 노력은 모두 캐릭터에 힘을 보태기 위함이다. “공연 보는 걸 좋아하는데, 공연장 주변은 복잡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자주 타는데, 앉아서 가만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마주하게 될 캐릭터가 겹쳐지죠.” 그런 모습이 기억 저장소에 쌓여 새로운 인물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대입해본다. 대사 톤과 감정의 깊이를 설정하기 전에 외형적인 캐릭터를 정립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되는 걸 알기에 이 작업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오늘 <보그> 촬영에도 헤어와 메이크업을 준비하는 사이 그녀의 뒤로 걸린 촬영용 의상을 보고 포즈를 상상했다. 입어보지 않은 옷을 상대로 이미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머릿속으로 동작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실제로 촬영을 훨씬 더 매끄럽게 했다.
돌이켜보면 김서형의 최근 몇 년은 강력하고 강렬했다. 가장 혹독하고 강인한 캐릭터였던 <SKY 캐슬>의 ‘김주영’은 김서형을 제일 많이 덜어낸 작품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시작할 때는 내가 과연 ‘차영진’만큼 괜찮은 어른인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끝까지 고민했고, <마인>의 ‘정서현’은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과 논리로만 버텨낸 인물이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누르고 삼켜서 절제하는 연기가 배우에게는 서너 배 힘들다. 연달아 이런 작품을 뱉어내다 보니, 세포 하나하나까지 쥐어짜낸 느낌이다.
“책임감이 강한 편이에요. 배우라면 물론 누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품에 임하겠지만, 스스로가 숨 쉴 구멍을 막아버리고 시작한다고 해야 하나. 정말 끝까지 밀어붙여요. 감정적으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작은 틈새마저 막아버리니 결국은 도망치지 않고 울면서라도 작품 안에서만 움직이죠.” 김서형이 90% 담긴 캐릭터든 90% 빠진 캐릭터든,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건 이런 집요함 때문이다. “시작하기 전에는 ‘질문봇’이 돼요.(웃음) 드라마 현장에 가면 정말 많은 사람이 움직이잖아요. 배우의 연기가 빛날 수 있게 엄청난 조력자들이 되어주죠. 그런 사람들 앞에서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끝날 때까지 믿고 함께할 수 있죠. 그러려면 처음에 모든 불안 요소를 체크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어요.” 오랜 경력에 비해 필모그래피가 다양하지 않은 이유다. 그런 김서형에게 최근 1년은 변화가 많은 지점이다. 당장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두 편 이상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그걸 증명한다.
모든 걸 혼자 떠안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더 부지런히 연기하게 됐다. 이제 막 끝낸 지 일주일이 된 드라마 <종이달>은 혼자서 70% 이상의 분량을 소화해냈다.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모두 끌어다 쓰고 방전된 상태. 그래서 재빨리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려고 노력하는 참이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한 방향 전환. “예전에는 작품 하나 끝내면 적어도 6개월 이상은 누워 있었어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가 아니라 체력적으로 버틸 힘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마지막 ‘컷’ 소리가 끝나면 바로 일상의 김서형으로 돌아와버려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집 앞으로 나가 한강을 걷고, 사이클을 타고, 필라테스를 하기 위해 달려가죠.”
김서형은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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