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의 고난 그리고 영광
중요한 것은 고난과 영광 모두 임지연을 성장시켰다는 사실이다.
임지연에겐 확신이 있었다. <더 글로리>의 박연진이 뜨거운 사랑을 받는 악역이 될 거라고, 데뷔 13년 차에 처음 도전한 악역 연기가 성공적으로 완수될 거라고 말이다. 김은숙 작가의 말맛과 스토리텔링을 믿었고, <비밀의 숲> <청춘기록> <해피니스>를 연출한 안길호 감독의 섬세한 눈을 믿었다. 무엇보다 도전 앞에서 강해지는 스스로를 믿었다. “맨 처음 대본을 읽으며 ‘이 정도의 악역이 있었나?’ ‘내 나이 또래가 맡은 역할 중에 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나쁜 여자가 존재했나?’ 떠올려봤어요. 없더라고요. 누구라도 욕심났을 거예요. 잘만 해낸다면 거머쥘 건 영광뿐이었죠.” 임지연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심장이 뛰는 편이다.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 하나로 연기에 뛰어든 그는 데뷔작 <인간중독>(2014)으로 아름답고 신비한 여배우의 이미지를 수월하게 손에 넣었으나 결코 그에 갇히지는 않았다. “대중이 항상 저를 처음 보는 배우처럼 의아하게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런 이미지는 안 돼’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뭐가 나랑 맞고, 안 맞는 옷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과몰입 중인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임지연과 박연진은 꽤나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새까만 밤, 새카만 눈동자로 “이제 시작입니다”라며 싱긋 웃던 임지연의 존재감은 혼란스러웠다. 점점 강해질 거란 사실만큼은 임지연과 박연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첫 악역 연기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대단한 활약으로 <더 글로리>의 박연진을 아이코닉한 존재로 만들었어요.
뜨거운 반응을 아직 실감하진 못해요. 이미 촬영 중인 작품이 있고, 이런저런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없이 일상이 흘러가거든요. 평가에 좀 무던한 편이기도 하고요. 다만 배우끼리 단체 대화방에서 각자의 소식을 공유할 때, “파트 2는 도대체 언제 나오냐”는 지인의 재촉을 받을 땐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는 게 기분 좋아요. 연기에 대한 칭찬은 언제 들어도 뿌듯하고요.
박연진을 매력적인 역할로 빚어내기 위해 남몰래 고민한 것이 있나요?
첫 촬영이 (송)혜교 언니와 따귀 한 대씩을 주고받는 결코 쉽지 않은 신이었는데 그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연진이만큼은 쉽게 흔들리거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반응은 하되 무너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어려운 주문처럼 들렸지만 함께 고민하며 캐릭터를 잘 만들어갔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살리는 악역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짜증 내거나 화를 낼 때, 남자 친구에게 애교 부릴 때 등 제가 가진 모습과 에너지를 많이 끌어다 썼죠.
분노와 복수, 질투와 광기 등 악역에겐 금기시되는 감정이 많이 허용되죠. 연기할 때 느낀 희열이 있었나요?
연진이는 맞으면 맞고, 아닌 건 아닌 거라고 항상 속 시원히 말하잖아요. 그 점이 통쾌할 때가 많았어요. 극 중에서 본심을 추궁하는 재준이에게 목이 졸리자 움츠러들거나 씩씩거리는 게 아니라 “실핏줄 터지면 나 내일 방송 못해!”라며 악쓰는 그 본능적인 솔직함이 솔직히 너무 속 시원하더라고요.
‘일진 5인방’의 케미를 보여준 박성훈,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배우와는 작품 안팎에서 끈끈하게 교류하더군요. 본의 아니게 열혈 시청자들의 과몰입을 도우면서요.(웃음)
건우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후배고, 주영이와는 동갑이에요. 다들 또래다 보니 자연스러운 케미가 나왔죠. 사실 이렇게까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 데는 제 공이 크답니다. 감독님도 고마워하셨어요. 먼저 밥 먹자, 놀자, 술 마시자고 하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제대로 했거든요. 혜교 언니에게도 같이 밥 먹자고 하고, 어느 날 은 또 여자끼리 모이고, 최근에는 시간 맞는 배우들과 춘천으로 MT도 다녀왔어요. 소중한 인연을 참 많이 얻었죠.
차기작 <마당이 있는 집>에서는 김태희 배우와 기묘한 관계로 마주합니다. 최근 여배우들끼리 보여주는 시너지가 눈에 띄기도 해요.
데뷔 때부터 줄곧 남자 배우와의 호흡이 많았는데 덕분에 저도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있어요. 이번에 만난 혜교 언니의 능숙한 모습을 보고 후배로서, 같은 여배우로서 느끼고 배운 것이 많았어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2에서 함께 연기한 (전)종서 씨에게는 나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배우로부터 받는 에너지가 있었고요. 몇 번 경험해봤다고, 덕분에 태희 언니와의 이번 만남이 조금은 수월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나중에는 여자들끼리의 우정을 제대로 다룬 작품에도 출연하고 싶어요.
적절한 품위가 느껴지는 풍성하고 검은 웨이브 헤어스타일과 컬러풀한 의상, <더 글로리>는 배우 임지연이 오랜만에 ‘각 잡고’ 아름답게 등장하는 작품이라고도 느꼈습니다.
화려하되 우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재준이, 명오, 혜정이, 사라까지,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반짝반짝하거든요. 무리를 이끄는 연진이에겐 남다른 한 끗이 있었으면 했는데, 고급스러움에서 답을 찾았죠. 정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겉으로 뽐내지 않을 거라고 간주했어요. 오히려 그래서 더 여유로워 보일 테고요.
특별히 신경 쓴 패션 아이템이 있을까요?
블랙은 피했어요. 채도가 너무 낮거나 무채색인 의상도요. 어둡고 쓸쓸하고 무거운 동은의 삶과 한눈에 대비되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기상 캐스터로 일할 때 입은 옐로 트렌치 코트부터 강렬한 레드 드레스까지, 온갖 컬러에 도전했어요. 솔직히 저는 옷에 큰 관심도 없고, 20대까지만 해도 스타일링의 힘을 별로 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형사 역할을 위해 머리를 과감하게 자르고, 액션 연기하며 피 분장을 해보니 전략적인 스타일링이 몰입하는 데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죠. 몸매가 드러나는 의상을 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어렵지 않게 연진이가 될 수 있었어요.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를 충실하게 다룬 복수극이기도 합니다. 아역이 등장하는 초반부의 몇몇 장면은 똑바로 응시하기가 힘들더군요. 시청자 입장에서 가슴 아픈 장면이 있었나요?
뛰어내리겠다는 각오로 옥상에 올라간 동은이가 결국 울면서 상처 입은 몸으로 눈 쌓인 바닥을 뒹구는 장면은 쉽게 못 보겠더라고요. 사실 ‘학폭’을 다룬 작품은 많았잖아요. 심지어 대본도 다 본 상황이라 익숙할 법한데도 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어요. 아역을 연기한 배우들이 정말 많이 고생했을 텐데 그 점이 고맙기도 하면서, 어쩐지 이상한 마음으로 관전했죠.
새삼스럽지만 실제 학창 시절엔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주 나서긴 했지만 결코 일진은 아니었답니다.(웃음) 늘 반장이나 오락 부장을 하고 싶었고, 심지어 합창 대회에 나가도 지휘자를 맡았어요. 운동도 좋아하고, 눈에 띄는거 좋아하고, 굉장히 활발한 학생이었어요.
비슷한 시기 공개된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2에서는 유일하게 원작에 없던 인물인 ‘서울’로 등장해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뽐냈습니다. 어느 순간, 임지연이라는 배우가 지닌 스펙트럼이 확 넓어졌다는 느낌도 들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죠. 나만의 색깔보다 매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게 훨씬 중요해요. 요즘 하는 고민도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작품에서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까 하는 거예요. 가족 스릴러물인 <마당이 있는 집>에서는 미스터리하고, 감정을 꾹 누르며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하는 게 즐겁고, 또 다른 차기작 <국민사형투표>에서는 4년 전 <웰컴2라이프>에서 보여준 경찰 연기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설레죠.
김은숙 작가는 당신을 두고 ‘천사의 얼굴’이라 표현했어요. ‘예쁘다’는 데뷔 이래 꾸준히 들어온 말일 텐데 여전히 듣고 싶은 말인가요?
20대에는 화면에 잘 가꾼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게 무섭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꼭 예뻐야 하나?’란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 말에 갇히기 싫은 거예요. 배우는 연기를 잘하면 예뻐 보이겠죠. 지금은 생각한 것보다 못생기게 나와도, 못 보던 주름이나 여드름이 눈에 띄어도 별로 개의치 않아요. 제가 지닌 매력을 믿거든요. 50대에도, 60대에도 예뻐 보일 수 있다고 믿게 된 스스로가 갑자기 좀 기특하네요.
마인드가 정말 건강해 보입니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으하하.
인터뷰 준비를 위해 오랜만에 과거 인터뷰를 찾아 읽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솔직하고 거침없더군요. 그런 당신에게도 마음 같지 않아 힘든 순간이 있었나요?
지난해 방영한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장미맨션>은 심리적으로 힘들던 시기에 만난 작품이라 의미가 남달라요. 슬럼프까지는 아니고, 뚜렷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한 자격지심에 사로잡혀서는 취미도 잃고, 활력도 잃던 때였어요. 그때만큼은 뭘 시작해도 금방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장미맨션>을 통해 처음으로 극을 이끄는 입장에 서서, 그런 때를 이겨내며 배우로서 확실히 성숙해졌죠. 엄마 말로는 제가 사춘기가 없었다는데 뒤늦게 온 건지도 몰라요.
어떤 식으로 상황을 돌파했나요?
그냥 인정해버렸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솔직하게 다 얘기했죠. 나 지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우울하다고. 일도, 연애도, 친구 관계도,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게 놔뒀어요.
운동도 즐기는 편이잖아요. 생각 없이 몸을 쓰는 것도 기분 전환에 큰 도움이 되죠.
맞아요! 그런 다음 맛있는 걸 먹으면 완벽합니다. 제가 식탐이 좀 있거든요. (임지연은 인터뷰 내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인 ‘젤리’를 먹으며 응했다.) 등산할 땐 정상, 헬스장에서는 무게, 골프 할 때는 구멍. 운동을 하다 보면 눈앞의 목표 하나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확실히 잡념이 정리되더라고요.
지난해에 ‘한예종 찐친’과 함께한 SBS 예능 프로그램 <찐친 이상 출발, 딱 한 번 간다면>에 출연했죠. 개인적으로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노란 캐리어를 되찾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얼마 만에 나가는 바다고, 얼마 만에 타보는 비행기입니까.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하필 제 짐만 없어졌다는 거예요. 짜증 나면서도 결국 짐은 찾았으니까 다행스러운 마음에 왈칵 눈물이 났죠. 행복한 마음으로 잘 다녀왔어요. (이)유영 언니와 만나고 싶었고,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대학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 나이가 들어서 함께 여행을 간다는 사실도 기분 좋았어요.
‘내 사람’에게 잘하는 편인가요?
의리도 있고, 연락도 먼저 자주 해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도 많이 하죠. 특히 엄마랑 친해서 좋은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얘기하고, 고민 상담도 자주 해요. 현장에서도 스스럼없는 편이에요. ‘저 선배님이랑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도대체 언제 마음을 열어주실 거예요?’ 하며 잘 다가가죠. 항상 솔직하게 임해요. 연기도, 인간관계도.
13년째 연기하며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뭘까요?
혼자 해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역할이 사랑받았다면 그건 옆에 있는 배우들이 잘 살려줬기 때문이라고 인정했죠. 어릴 때는 이 신은 이렇게 보여야 하고, 내 캐릭터는 이렇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먼저였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살아야 저도 산다는 것을 알아요. 감독 및 스태프, 배우들과 더 깊이 호흡할수록 연기가 잘되더라고요.
당신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언제였나요?
<인간중독> 시사회 날, 엄마가 저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너무 수고했다고 얘기해주는데,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가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도 많이 하셨고, 엄마가 그렇게 표현이 많은 스타일도 아닌데 그날, 꾹꾹 눌러온 서로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렸죠. 죽을 때까지 연기할 거라고 다짐한 순간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나날이 많이 찾아올까요?
좌절과 고난의 순간이 훨씬 많겠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지만 순간순간 저도 많이 흔들려요. 모를 땐 답답하고, 마음처럼 연기가 안되는 날은 현장에서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그 또한 행복이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주저앉지는 않게 되더라고요. 지금의 고난을 기약 없는 영광을 위해 참아내야 하는 걸로만 여기고 싶지 않아요. 즐겁게 도전하고, 연기하려고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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