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네일만 받는 여자
손가락 끝의 딱딱한 조각.
아이돌에겐 극도의 치장이며 누군가에겐 기분 전환, 정체성 또는 학대의 대상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손톱을 고찰하는 <보그> 유니버스.
새빨간 한 수
아이즈미(I’zemi)의 58번 레드, 손톱 모양은 하얀 부분이 없도록 완전히 짧고 둥글게. 7년째 같은 네일 숍에서 해온 내 취향이다. 특별할 것도, 트렌디할 것도 없는 나의 네일에 대한 글을 <보그>에서 의뢰했을 때, 과연 내가 적합할지 고민이 시작됐다. 구매해본 피부 표현 제품 0개, 섀도 0개, 시술 경험 무, 스파 경험 무에 빛나는 내가 뷰티 기사를? 그때부터 스스로의 뷰티 루틴(이랄 것도 없지만)에 대해 점검했다. 네일은 언급한 대로 7년째 같음. 메이크업은 두 개 제품만 쓰는데 같은 브랜드 마스카라 20년째, 특정 브랜드 특정 컬러 립스틱 하나만 10년째, 기초도 별반 다르지 않음, 샴푸도 한 제품만. 그렇게 꼽다 보니 의외의 ‘뚝심’ 제품이 하나 등장했다. 바로 B사의 ‘큐티클 크림’. 동그란 철제 케이스에 들어 있는 이걸 몇 년째 쓰나(출장길이나 여행길에도 당연히 동행!) 생각해보니 15년은 된 듯했다. 순간 내가 손톱에 꽤 진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언제부터? 왜?
“나는 소개팅에서 손톱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데 흰 부분이 길거나, 각질이 그득하면 집에 가고 싶어.” 이 이야기를 20대 초반에 ‘남사친’에게 들은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칼각’을 좋아하던 내 친구. ‘남자에게 대시 받는 옷차림’ 따위에 관심이 있긴커녕 레게 머리 하고, 스포츠 머리도 하고, 입고 싶은 거 다 입던 패션 암흑기의 나였지만, 깔끔함과 정리 면에서 늘 나와 의견을 같이해온 남사친의 이 이야기에만은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손톱의 흰 부분은 가혹하리만치 빠르게 생성과 동시에 잘려 나가고, 큐티클 크림은 보디 크림만큼 생필품이 되었다.그렇다면 레드는 왜 인생 네일 컬러가 되었냐고? 답은 간단하다. 블랙과 네이비를 주로 입는 내게 힘이 되어줄 컬러였으니까. 인생 네일을 찾기 위한 여정은 2008년부터였다. 우리 모두가 ‘파리지엔 시크’에 미쳐 있던 시절, 내가 일하던 매거진에 ‘망사 스타킹을 신는 여자’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당시 어느 선배는 데님 팬츠에 망사나 레이스 삭스, 샌들의 조합을 즐겼는데, 그 조합은 꽤나 탐나는 ‘으른 여자’의 느낌이었다. 망사와 레이스의 ‘한 끗 차이’ 역할이 인상적이었달까? 그때 결심했다. 나도 언젠가 별거 없는 내 옷에 포인트가 되어줄 무언가를 찾고 말겠다고!
그렇게 슬슬 네일 숍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네일 했을 때 드는 성숙해진 느낌도 좋았고, 룩에 네일이 포인트가 되어주는 기분도 만족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젤보다 매니큐어가 대세였는데, 그땐 또 블랙만 발랐다. 메이크업도 지금과 달랐다. 립스틱보다 아이라인이었고, 발망식의 록 시크가 힙했으니까. 그러다 ‘꾸안꾸’ 시대로 넘어왔고, 아이라인 대신 레드 립스틱을 택하면서 비로소 ‘색’에 대해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사실 이때 핑크 기가 도는 레드 립스틱으로 <달려라 하니>의 고은애 여사가 되어보고 나서야 오렌지 기가 도는 레드가 나의 컬러라는 것을 처절히 깨달았다. 메이크업도 옷만큼 어릴 때 온갖 걸 미리 다 해봤어야 한다고 후회했던 것 같다.
퍼스널 레드 컬러를 찾은 뒤 립스틱이 주는 재미를 담뿍 느끼고 나니, 관심은 손톱으로 확장되었다. ‘얼굴에 하나만 색이 더해져도 이렇게 화사해지는데, 손에 하나 더 생기면 룩이 확 살겠는데?’ 이렇듯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된 나의 레드 네일. 간만에 잘한다는 숍에 찾아가 “오렌지 기가 살짝 도는 레드 젤 네일을 해보고 싶어요. 길이는 아주 짧게 라운드가 좋아요”라고 말했고, 결과는 대만족. 똑같은 룩을 입어도 더 신경 쓴 사람처럼 만드는 업그레이드 효과란! 맨 얼굴에 찍기 가장 쉬운 방점이 레드 립스틱이라면, 몸에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활용도 놓은 방점은 레드 네일이라는 느낌? 또 레드 립스틱이 99%의 옷 컬러에 잘 스며들듯, 레드 네일 역시 대부분의 옷 색에 잘 어우러지기에 조화가 중요한 나는 더더욱 매료되고 말았다. 비즈 장식 등 디테일이 있는 네일 아트는 생각해본 적 없느냐고? 그건 어릴 때 온갖 옷을 실컷 입어본 뒤 기본에 정착한 지금의 내 옷장을 보면 각이 나오는, 절대 내가 넘지 않을 산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7년간 심플한 레드 외엔 다른 네일 아트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도 손톱 건강을 위해 네일의 힘이 가장 필요한 여름(옷이 단순하니까!)을 피해 1년에 4개월 정도는 쉬는 편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손톱은 평화롭게 휴식 중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쓰게 되는 시점에 맞춰 바로 그 레드 네일을 하게 됐다. 곧 있을 동생 결혼식에 축의금 담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객이 전해주는 소중한 봉투를 받을 때 벌거숭이 손톱으로 마중하고 싶진 않으니까. 소소하지만 소중하고 중요한 ‘룩의 마무리 악센트’. 레드 네일은 그런 의미다. 이경은 스타일리스트, 패션 에디터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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