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내가 있으려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는 자기 각성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삶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눈을 안으로 돌려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는 봄에도 질문이 계속될 거다. 그 전까지 해가 바뀌면 연례행사처럼 계획을 세웠다. 영어 공부를 한다든가, 책 100권을 읽는다든가, 주 3회 ‘홈트’를 한다든가. 매년 실패한 이유는 대주제가 안 정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오그라들지만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우리 40대잖아. 친구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를 추천했다. 추리소설은 별로라고 했지만, 이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필명으로 낸 범죄 없는 소설이다. 스타 작가 애거사는 1926년 차량만 버려진 채 실종된 적 있다. 열흘 후 한 호텔에서 발견됐다. 남편과 외도한 여성의 성(姓)으로 체크인한 상태였다.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증이라고 말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4년 뒤부터 애거사는 메리 웨스트매콧이란 이름으로 소설 여섯 편을 발표했고, <봄에 나는 없었다>가 세 번째다. 읽을수록 그녀의 자전소설 같았다. 주인공 조앤은 변호사 남편과 장성한 자녀를 둔 중산층 여성이다. 허름한 차림의 동창을 보고 나는 잘살고 있다며 안심하는 부류다. 그녀는 딸을 보러 바그다드에 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우로 사막에 발이 묶인다. 그곳의 유일한 숙소엔 직원 서넛뿐이며 가져온 책은 다 읽었고 뜨갯감도 없다. 조앤은 머무는 동안 도리 없이 지난날을 떠올리며 ‘생각’이란 걸 한다. 남편과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던 이웃 부인, 자식들이 건넨 말의 진실이 보이며 자기기만으로 살았음을 깨닫는다. ‘사방 천지 구멍에서 도마뱀들이 기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각성을 겪는다.
작중 학창 시절 선생님이 조앤에게 한 당부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 같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돼!” 조앤은 집으로 돌아가며 결심한다. 자신을, 현실을 직시하겠다고. 하지만 결말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나온다. 조앤은 다시 원하는 것만 보는 안락함으로 돌아간다. 매트릭스의 파란 약을 먹기로 한 것이다.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고립된 적이 있다. 페루 마추픽추에서 도심으로 돌아가던 중 폭우로 다리가 끊겼다. 운전사와 나는 초원에서 누구든 지나치길 기다렸다. (놀랍게도 운전사는 다리가 놓일 때까지 있자고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비를 피해 앉는 것뿐이었다. 지난 기억이 물고기처럼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서로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보인 표정, 커리어 우먼인 줄 알았는데 얼마나 초라한 나날이었는지. 괜찮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나는 참 모지리다, 울었다. 운전사는 쟤가 짜증 내다 지쳤구나 싶었을 거다. 그 후 이런 시간의 공백에는 종종 과거 사건이, 평범해 보이던 어느 날이, 당시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떠올랐다. 거짓 포장지를 풀라고 나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 안이 너무 어둡고 초라해 더 들여다보기 무서웠다.
장폴 사르트르는 대부분 허위의식이 있다고, 즉 자기가 사는 세상을 좋게 여긴다고 비판했다.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프고 힘들다. 작가 전혜린도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고 했다. 그녀는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그것을 회피한다면 우리 삶에 죄를 짓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을 응시하는 것, 자신을 견디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비극인 이 생을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이라고. 나도 조앤처럼 결심했다. 돌아가면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나를 기만하지 않겠어. 생각 없이 살지 않겠어. 나를 들여다보겠어. 하지만 애거사 크리스티의 결론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귀하게 얻은 각성을 더 파고들기엔 바쁘고 피곤했다.
직장에 다니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내 집 마련과 주식 투자를 했다. 평균치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많구나. 머리를 감고 손톱을 깎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몰입의 즐거움>을 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의 생은 생산, 유지, 여가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출근하고 돈을 버는 생산 활동, 집안일을 하고 몸을 씻고 가진 것을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유지 활동, 그리고 남는 시간에 벌이는 여가 활동. 미하이는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루가 안개처럼 사라지거나 예술 작품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살려면 몰입 활동이 많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이 몰입 활동이다. 어렵다. 친구와의 술 한잔이 즐겁다가도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해 화가 나기도 한다. 이 세 가지는 자주 충동하면서 인생을 흩트린다. 우린 보통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세 가지가 일치하는 몰입의 경험을 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때 몰입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알고 싶어 했고, 누군가가 판단하고 규정해주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심리 테스트를 하지 않았던가. 아이가 울고 욕조에 물이 넘치고 누군가 벨을 누르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가 같은 질문에 답하며 말이다. 혈액형과 별자리로 나뉜 인간 유형을 신뢰했다. 모든 12월생은 사수자리의 모험심과 독립성을 타고나야 한다. 난 아닌데. 요즘엔 MBTI에 집착한다. 어느 나라보다 한국인이 열광적이다. 트렌드모니터 설문에서 ‘MBTI를 신뢰하는가’란 질문에 75.2%가 ‘그렇다’고 했고, 80.6%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같은 MBTI에 동질감을 느끼고 인사 채용자가 특정 MBTI를 피한다고 밝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젠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해 대리 검사해주는 ‘너비티아이’까지 나왔다. 학자들은 MBTI 열풍이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사회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나를 탐구하기엔 할 일은 많고 방법도 모르겠다. 맞든 그르든 나를 신속히 판단하는 MBTI 검사는 매력적이다. 간편한 자아 찾기다. MBTI는 칼 융의 심리학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느 모녀가 만들었을 뿐이며, 칼 융조차 인간은 완전히 내향적, 외향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직시해야 할까. 조앤처럼 사막에 갇혀야 할까, 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예상치 못한 일을 겪어야 할까. 일상에서 ‘자발적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물학자 최재천은 혼자 있는 시간을 기획한다. <최재천의 공부>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중략) 물론 함께 모여서 해야 할 일도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고 조사하고 읽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 안희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고독과 고립을 혼동합니다. 고독이란 자발적 홀로 있음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 홀로는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고요. 내가 나와 온전히 함께하면서 내 안에 스며든 세상의 요소도 바라보도록 안내하지요. 혼자 있는 시간은 세상과 연결된 적극적 나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시간이 아닐까요?”
나는 어젯밤 휴대폰을 비행기 탑승 모드로 한 뒤 촛불을 켜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자발적 고독에 들어갔다. 비워내는 명상과 달리 나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맞춰둔 알람 30분이 울렸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넷플릭스 보고 싶다. 자신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넷플릭스는 편하다. 우린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의 불멍인 유튜브와 OTT(규격화된 자극, 수동성 오락)로 시간을 보낸다. 미하이의 말처럼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머릿속의 혼돈을 금방 잠재우지만 지나면 허무와 불쾌감이 남는다. 사람을 이완시키는 대신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미하이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밤에 일기를 쓰거나 하루를 돌아보며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찾아내라고. 무엇이 날 우울하게 만들고 즐겁게 했는가. 매일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해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포착하라고.
나는 주 3회 요가처럼, 주 3회 자발적 고독의 시간,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되새겨본다. 눈을 안으로 돌려라. 나라는 우주의 전문가가 되고, 내 안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돼라. 맑은 눈과 굳건한 용기로 자신을 탐험하라. (VK)
- 포토그래퍼
- Patrick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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