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미와 전소니, 봄처럼 가까이
어느새 친근하게 부르게 된 서로의 이름. 영화 <소울메이트>의 두 주인공으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머문 김다미와 전소니가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며 눈을 반짝였다.
순간에 물든 김다미
“제주도의 분홍색 하늘이 아주 예뻤어요. 여름날, 주로 야외에서 촬영하다 보니 피부도 살짝 까무잡잡해지고, 잘 먹고 다녀서 살짝 살이 올라서는 언니랑 저랑 진짜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죠(웃음).” 전소니와 함께 영화 <소울메이트> 촬영을 위해 한동안 제주도에 머문 김다미가 그때를 떠올리며 ‘흐흐’ 웃었다. <소울메이트>는 제주도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1988년생 두 여자가 어른이 되어가며 겪게 되는 관계와 삶의 변화를 찬찬히 따라간다. 일찍이 중국에서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와 굵직한 줄기는 유사하지만 배경과 정서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극 중에서 김다미는 ‘안미소’를, 전소니는 ‘고하은’을 연기한다. “미소는 이제까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진짜’처럼 느껴졌어요.” 살인 병기(<마녀>)와 소시오패스(<이태원 클라쓰>), 사랑에 서툰 커리어 우먼(<그 해 우리는>) 등 그간 감정적으로 결핍된 역할을 자주 맡은 김다미에게 씩씩하고, 밝고, 따뜻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미소와의 교신은 반가웠다. “미소가 처한 상황과 마음 상태에 푹 빠져서 연기했어요. 자유분방한 미소 덕분에 현장에서 장난도 스스럼없이 치고, 많이 웃을 수 있어 좋았죠.” 동시에 다른 사람은 쉽게 보지 못하는 미소의 외로움에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미소는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어요. 안 그런 척하지만 하은이에게 의지도 많이 하죠. 매번 괜찮다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미소가 정말 많이 외로웠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직접 겪어보니 미소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참 많더라고요.”
그런 미소에게 하은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존재였다. ‘영혼의 동반자’. 떨어져 있어도 함께임을 느끼고, 말하지 않아도 진심이 통하는 관계인 ‘소울메이트’가 미소와 하은의 관계를 그나마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김다미는 말했다. “친구, 연인, 가족이라고 해서 항상 마음이 통하는 건 아니잖아요. 미소와 하은이의 다채로운 관계를 가리킬 수 있는 완벽한 표현은 없는 것 같아요. 우정도, 사랑도, 어딘가 부족하죠.” 미묘한 엇갈림과 의도치 않은 침묵은 어느 순간 두 여자의 삶을 비집고 들어와 틈을 벌린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에요. 서로를 정말 사랑하고 배려하다 보니 오해가 쌓인 거죠. 우정 역시 사랑이라고, 이건 미소와 하은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때 사랑이란 뭘까, 사랑을 ‘잘’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소울메이트>를 촬영하며 자주 고민했어요.” 미소로 살며 김다미는 기꺼이 흔들리고, 고민했다. 흔한 일은 아니다. 무려 1,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마녀>(2018)의 주인공 ‘구자윤’이 되었을 때도, <이태원 클라쓰>(2020)로 그녀의 존재감이 일본까지 뻗어갔을 때도, <그 해 우리는>(2021)으로 한반도에 ‘첫사랑 로맨스’ 열풍을 몰고 왔을 때도 김다미는 항상 덤덤하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잘 흔들리지 않아요. 왠지 모르게 정해진 결말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너무 하고 싶어도 안될 때도 있고, 예상 못한 데서 큰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잖아요. 오디션에도 늘 그런 마음으로 임했어요.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결과와 반응 때문에 휘청거리지 않죠.” 서울로 촬영지를 옮겨가며 <소울메이트>의 제주도 촬영분을 봤을 때도 김다미는 충분히 만족했다. “당연히 서툴고 아쉬운 부분이야 있죠. 그래도 후회는 안 했어요. 소니 언니랑 민용근 감독님이랑 정말 푹 빠져서 그 시간을 살았으니 그걸로 만족해요. 그건 그때의 저만 할 수 있는 연기였으니까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촬영했다는 것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지겠죠.”
작품으로 처음 마주한 배우 전소니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약속하며 김다미의 삶에 성큼 들어왔다. “소니 언니는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항상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연기하죠. 대사 하나를 놓고도 굉장히 다양한 갈래로 생각하고, 질문도 많아요. 연기에 정말 깊이 몰두한다고 느꼈어요. 그런 진심이 연기할 때도 배어 나오더라고요.” 글쓰기를 좋아하는 전소니는 김다미에게 손 편지를 써서 건네기도 했다. 반짝반짝한 단어와 예쁜 표현으로 꾹꾹 눌러 담은 글이었다. 서로의 속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두 사람의 우정을 바라보며 민용근 감독은 “소니가 각본 쓰고, 다미가 연출해라”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표현을 잘 못하는 편인데 언니가 먼저 다가와줘서 너무 고마웠죠. 요즘도 가끔 언니가 써준 편지를 꺼내 봐요. 덕분에 내가 진짜 좋은 현장에 있었다는 걸 잊지 않게 되죠.” 기분 좋은 현장 분위기는 김다미에게 중요하다. 그녀는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만 그렇더라도 마음을 열고 기다리려 노력하는 배우다. “과정이 재미있어야 해요. 매번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모이는 것이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는 일이잖아요. 촬영하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와 일하고 싶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상대 배우가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만드는 동료요.” 성격과 취향을 비롯해 연기할 때의 목표와 배우로서 가진 포부 등 자신에 대한 질문에는 ‘별다를 것 없다’며 호탕한 웃음으로 말끝을 감싸던 김다미가 현장과 동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짐짓 단호한 어투로 소신 있게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건 사람과 관계였다.
김다미는 작품이 끝나면 한동안 깊이 몰입하던 인물로부터 곧잘 빠져나오는 편이다. 여행을 사랑하고 하루 한 끼를 맛있게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며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녀는 과거를 즐겨 추억하는 편도 아니다. <그 해 우리는>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차기작 <대홍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주어진 휴식기에 그녀는 조용한 여유를 만끽하며 일상에 집중했다. 하지만 일찍이 촬영을 마친 <소울메이트>에 얽힌 기억은 그녀의 마음을 가끔씩 두드렸다. “여운이 있어요. 30대의 미소를 살아본 제가 어린 시절의 미소를 돌이켜볼 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린 구석이 있는데 애틋하게 추억할 만한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마음인지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김다미는 가끔 미소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립다. “언젠가 미소 같은 캐릭터를 또 만나고 싶을 것 같아요. 정말 행복하게 연기했거든요. 제주도와 좋은 사람들 품에서 순간에 푹 빠져 연기했기에 후회도 없고요.” 지금 김다미를 가장 설레게 만드는 것은 오랜만의 봄이다. <소울메이트>로 인해 한층 짙은 그리움으로 채색될 2023년의 봄.
전소니의 용감한 고백
영화 <소울메이트> 홍보 활동을 시작하며 전소니는 촬영 당시 쓰던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특히 행복한 기록이 담긴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같은 기억을 공유한 배우와 제작진 몇몇에게 보냈다. 물론 다미에게도. “철없고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나 이때 더없이 행복했다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너무 좋으면 떠들고 자랑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전소니는 표현에 능하다. 좋은 건 왜 좋은지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골몰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지녔다. 제주도에서 <소울메이트>를 촬영한 나날은 왜 그리 행복했는지 곱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떠오르는 장면이 많다. 딱 하나를 꼽아달라고 졸랐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진짜 많아서 조급해하는 전소니는 참 예뻐 보였다. “출퇴근길이 제일 먼저 생각나요. 새벽에 해 뜰 때, 저녁 촬영을 기다리는데 마침 노을이 질 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훌훌 갔죠. 제주도 풍경은 하늘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말 크더라고요. 다미랑 ‘아, 너무 예쁘다’면서 많이 걸어 다녔어요.” 전소니는 제주도에서의 기억이 실제 어린 시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만큼 순수하게 몰두한 시간이었다.
“촬영 시작되기 전에 원래 다미랑 저랑 둘이 먼저 제주도에서 지내려고 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와 태풍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반나절의 화보 촬영 일정도 맞추기 힘든 두 배우가 서로 그런 마음을 공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미랑 저랑 표현 방식과 정도는 다른데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서로의 언어를 잘 이해하니까 다미에게는 어떤 생각이든 운을 떼기가 두렵지 않아요.” 네 살 차이 나는 동생이지만 부러운 면도 많다. “다미는 정말 똑똑해요.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갖고 있죠. 저에게는 그게 책임감으로 보이더라고요. 항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그 확신으로 움직이는 배우예요.” 극 중에서 하은은 미소가 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며 맘껏 그림 그리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고백한다. 상상만으로도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라고. 전소니에게 김다미도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친구였다.
“처음엔 미소가 빨간색이고, 하은이는 파란색 같다고 생각했어요. 미소는 열정적이고 충동적이고, 하은이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죠.” 그리고 미소는 제주도의 삶에 만족하는 하은을 자꾸만 밖으로 끌어낸다. 처음으로 귀에 피어싱을 뚫도록 부추기고,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는 꿈을 꾸게 만든 것처럼. 서로로 인해 두 사람은 조금씩 변화한다. 미소는 하은이 되고, 하은은 미소가 되어간다. “두 사람은 너무 닮은 동시에 너무 달라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초반에 미소가 싫어하는 브로콜리를 하은이 먹고, 하은이가 싫어하는 당근을 미소가 집어 먹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네가 싫어하는 거 내가 좋아할 테니 내가 싫어하는 건 네가 좋아해줘’라는 고백처럼 들렸거든요.” 꿈을 위해(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실은 여기에도 오해가 있다) 제주도를 떠나는 미소, 진우와 달리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고, 미워서, 그런 못난 모습을 미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하은은 변화한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다른 사람이 편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하은이가 품은 ‘뜨거움’인데 처음엔 그 열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은이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하은이에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전소니는 <소울메이트>에 몰두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들떠서 이야기하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얕게 울컥했다. 그녀는 감정의 진폭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침착한 하은이와 달리 전소니는 “슬플 때 더 슬프고, 행복할 때 더 많이 행복해하고 싶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안정적인 건 재미없었어요. 정말 많이 흔들리면서 살고 싶어요.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고요. 60대에도, 70대에도 매일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요.”
데뷔작 <여자들>(2017)에서도 전소니는 지금과 같은 처피 뱅 스타일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파라다이스 키스>에서 패션모델이 되기를 꿈꾸는 고등학생 주인공 하야사카 유카리를 모방한 스타일이었다. “고등학교 때였어요. 머리를 자른 것뿐인데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보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그 후 들어오는 대본도 달라졌어요. 주관이 뚜렷하고, 은근히 반항적인 캐릭터를 자주 만나게 됐죠.” 살기 위해 칼을 빼든 <밤의 문이 열린다>(2019)의 효연과 무서울 게 없는 불량소녀, <악질경찰>(2019)의 미나가 떠올랐다. 특히 첫 상업 영화 <악질경찰>은 그녀에게 무척 고마운 작품이다. “‘나는 연기가 너무 좋은데 이 길이 아니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방황하던 때 만난 작품이에요. 촬영을 끝낸 영화가 갑자기 공중분해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데뷔하자마자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는 걸 보며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던 때 ‘그래, 더 많이 사랑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게 됐죠.” 그 후 전소니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첫 드라마 주연작이었던 <화양연화 – 삶이 꽃이 되는 순간>(2020)에서 배우 박진영과의 애틋한 로맨스로 눈도장을 찍었고, 지금은 한창 방영 중인 청춘 사극 <청춘월담>에서 살인 누명을 쓴 천재 소녀 민재이로 극을 이끈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도 마쳤다.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기특해요. 하루하루가 몹시 감사하고요. 저한테는 모든 게 당연하지 않거든요.”
<소울메이트>에 대한 고마움도 각별하다. “상처받더라도 항상 용감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소울메이트>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줬어요. 어른이 된 하은이처럼 내 마음에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내가 다미를 더 좋아했더라도 그 시간과 마음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처럼요.” 다미에게 손 편지를 써서 건네던 전소니는 민용근 감독에게 좋아하는 영화 <남색대문>의 DVD를 선물하기도 했다. <남색대문>은 열일곱 청춘들의 짝사랑과 성장통을 비춘 대만 영화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계속 흔들리고, 부딪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영화 <문라이즈 킹덤>과 <미쓰 홍당무>,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좋아한다. “사춘기에서 ‘사춘’이 ‘눈뜨는 봄’이라는 뜻이래요.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눈뜨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소니는 <소울메이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봄에 개봉해 더 기쁘다고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만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따뜻한 봄과 <소울메이트>. 좋은 일이 생길 거란 확신으로 그때를 기다리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전소니가 내일을 그리며 눈을 반짝였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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