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근석의 ‘꽃길’
비바람이 지나갔다. 무지개가 나타났고, 앞으로는 꽃길뿐일 장근석의 시간.
날이 잘 드는 칼일수록 다루기가 쉽지 않다. 살짝만 칼을 들이대도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성능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주 촘촘히 세밀하게 간격을 조절해야 한다. ‘장근석’이라는 배우가 그렇다. 칼등과 칼날, 어느 한쪽도 무딘 구석이 없다. 연기, 노래, 진행 능력까지 멀티가 가능한 연예인. 그러니 소비되는 속도는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 “시소의 무게를 조절하는 데 5년이 걸렸어요. 하늘 높이 치솟았다 땅끝까지 떨어졌죠. 기회와 기대가 충돌했고, 의욕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 시간이었어요. 이대로 매몰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했지만, 결국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쌓이는 거더라고요.”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곧 데뷔 30주년, 베테랑 경력자의 무게를 내려놓으니 그동안의 루틴이 제대로 다이어트됐다. “OTT 플랫폼 시장이 흥미로웠어요. 선택을 기다리는 배우들 입장에서 채널이 다양해졌다는 건 분명히 반길 일이죠. 아, 배우들의 연기도 훨씬 더 자연스럽고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배우의 일상을 카메라 안으로 그대로 끌어들인 느낌이랄까. 예전에는 주어진 상황이 있고, 거기에 맞게 캐릭터를 창조했다면, 요즘은 배우가 그 캐릭터 자체가 되어 움직이는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훨씬 더 내추럴하고, 이질감도 없고.” 이제 막 파트 1을 끝낸 드라마 <미끼>의 ‘구도한’은 이런 생각이 모여 만들어낸 캐릭터다. 구겨진 셔츠와 낡은 가죽 점퍼, 날렵한 턱선을 반쯤 덮어버린 수염 기른 장근석의 모습이 우리 눈에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근석의 필모그래피가 로맨스를 주축으로 채워진 것만은 아니다. 캐릭터와 장르의 구분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우리의 선택권이 트렌디한 이미지에 정착했을 뿐. “누군가 저에게 멜로 눈깔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하하.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는데 확실한 한 가지를 가졌다는 것도 배우에겐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이번에 ‘구도한’ 형사를 연기하면서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찡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형사라고 꼭 날카로운 눈빛으로 범인을 쏘아보아야 할까요? 하하. 억지로 물리적인 힘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어요.” <미끼>에서 범인을 취조하는 구도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감미롭다. 꿀성대 보유자인 그에게 눈빛만큼 보이스도 고민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시각을 갖고 접근하느냐의 차이인데, 장근석이 택한 방법은 ‘장근석답게’. <미끼>가 오픈된 후에 호평 일색이라는 건 거짓말을 조금 보탠 반응일 것이다. 쏟아지는 ‘좋아요’와 칭찬 일색의 댓글에 녹아내릴 만큼 장근석은 어리석지 않다. 다음을 위한 한발 또는 반보의 움직임이면 충분하다. 당분이 가득 밴 말이 결국 자신을 멍들게 했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우리 직업은 칭찬을 먹고살죠. 사람들의 반응이 결국은 제가 받는 성적표니까요. 어릴 때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기 위해 연기를 했어요. 좋아해주니까 더 잘하고 싶고, 잘한다고 하니까 더 많은 작품을 하면 칭찬이 배가 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오히려 냉기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결국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걸. 대중의 반응은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 흡수되기 시작하면 본질을 잊게 되죠.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여전히 쉽지만은 않군요.” 서른다섯, 모든 행동엔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모르지 않을 나이다. 드라마 홍보차 출연한 <SNL>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20대에 남긴 몇 줄의 글은 다시 한번 ‘허세’를 달고 방송에 소환되었다. 이미 오랫동안 여러 번 개그 소재로 활용된 허세 월드는 장근석의 단골 연관 검색어다. “내가 한 말이니까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 말을 안 했을 것 같진 않아요. 스무 살의 저는 그랬으니까요. 솔직하고 싶어요. 대중한테든 자신한테든.” 장근석은 여전히 정면 돌파다. 미루고 피해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SNL> 오프닝에 쏟아진 추억 소환에 장근석은 세련된 위트로 응수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예능의 감이 최대치로 발휘된 순간, 장근석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SNL>과 유튜브 ‘다나카’에서 장근석은 그야말로 훨훨 날았다. 조회 수는 폭발했고, 댓글은 남녀노소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장근석이 증발한 것처럼 다 보여줬다. “주변에서 너무 내려놓은 거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어요. 사실 어느 정도 하한선을 정하고 움직였어야 했나 싶기도 한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그 시간을 준비한 분들에게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SNL> 같은 경우 굉장히 여러 각도로 아이디어 회의를 거친 후에 콘티를 짜요. 심지어 녹화 직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죠. 그 과정을 아니까 선을 지키는 게 무의미해져요. 그런데 너무 내려놓긴 했어요. 하하.” 지상파나 케이블이 아니라 OTT 플랫폼이나 유튜브를 통해 홍보를 한다는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너무 날것을 보여준 게 아닌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그 솔직함에 사람들은 후한 점수를 주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조명과 카메라 장비 없이 간단한 휴대폰 촬영 영상으로 홍보가 되는 세상, 이 새로움이 장근석을 움직이게 했다. 새롭고 흥이 돋는 일에 진심인 사람. 오랜 기간 인터뷰를 핑계 삼아 지켜본 장근석은 모든 것이 즐거워야 한다. 그 흥미로움이 자신을 공격해오더라도 일단은 Go. 본인이 즐거워야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지금의 위치에 그를 올려놓았다. 어떤 연기를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특별히 잘생기고 대단한 가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기면서 하다 보니 아시아 프린스가 됐다. 물론 노력으로 채워진 시간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실력을 뒷받침해주었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스크린과 휴대폰 화면의 크기가 저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도쿄 돔 공연을 할 때와 소극장 공연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즐기면서 연기하고 노래했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후회하지 않아요. 예능도 마찬가지고요.” 이 다채로운 즐거움 중에서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연기다. 아직까지 짝사랑하는 기분으로 매달려 있고, 매 순간 설레고 긴장된다. 오래 하면 좀 느슨해질 만도 한데 카메라 앞에 서면 언제나 타이트해진다. 장근석은 굉장히 본능적으로 연기할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노력파다. “촬영 전에 연기 수업도 받고, 같이 하는 배우들에게 부탁해서 제 작업실에서 따로 대본 리딩도 몇 번 했어요. 시간이 주는 공백이 분명히 있는 걸 알기 때문에, 제가 더 노력해서 맞추는 게 맞다고 여겼죠. 다들 도와주신 덕분에 현장에서 버퍼링 없이 적응했어요.” 이번 드라마를 하는 동안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지방 촬영에는 무조건 하루 먼저 가서 적응하기, 촬영 전날은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기. 다칠까 봐 좋아하는 스키도 멈추고 운동도 쉬고 있다. 이렇게까지 노력했다가 아니라 이만큼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옮긴 행동. 진짜 보상은 대중이 인정해주는 순간이다. 쿠팡플레이의 유저 유입 수 증가로 장근석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장근석은 불행은 다 당겨 쓴 것 같으니 이제 남은 건 행운뿐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부턴 책임이 따르는 자유 안에서 스스로를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같은 문제를 다시 틀리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 장근석은 정신적 근육이 단단한 사람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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