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
정재일의 새로운 음악에 대해,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
열일곱 살에 밴드 긱스 베이시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넘나드는 연주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해온 정재일. <기생충>, <오징어 게임>의 음악 감독으로 세계적인 음악가 반열에 오른 그가 수많은 클래식 명반을 제작해온 레이블 데카(DECCA)에서 데뷔 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했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정재일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피아노 중심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펼쳐냈는데요. 앨범 발매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그가 나눈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전합니다.
Q. 어떤 계기로 이번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나요?
지난 2003년에 싱어송 라이터의 꿈을 안고 <눈물꽃>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는데요. 그때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꿈을 접고 무대 뒤에서 다른 예술가들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작년에 클래식을 좋아하거나 음악을 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만한 레이블인 데카에서 ‘당신만의 것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을 때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제가 쌓아온 것을 바탕으로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Q. <리슨>은 피아노 중심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앨범인데요. 이번 앨범의 음악 스타일이 앞으로 데카에서의 음악 생활을 보여주는 청사진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음, 청사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첫 앨범이기 때문에 저한테 가장 내밀하고 편안한 악기를 고르고자 했습니다. 가장 편한 언어로 시작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아노를 선택했고요. 사실 피아노는 저의 모국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더 편하거든요. 또 제 첫 음반이고, 첫 음악이기에 더 깊은 얘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을 때, 오롯이 혼자서 얘기할 수 있는 편성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Q. ‘말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더 편하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피아노는 가장 크고 가장 긴 울림을 지닌 악기이자, 가장 낮은 음부터 가장 높은 음까지, 가장 약한 음부터 가장 강한 음까지 표현할 수 있는 악기입니다. 또 완성된 음악에 가장 가까운 악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좋은 악기들도 많지만, 피아노 한 대로 음악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저의 마음과 가장 많이 닮은 악기라고 생각합니다.
Q. 솔로 앨범 작업은 영화 음악이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을 텐데요.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장점은 컨펌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행복한 일이죠.(웃음) 하지만 그런 만큼 맨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극을 한다면 스크립트가 있고, 무용을 한다면 안무가 있지만 오직 음악만을 위해서 구상부터 믹싱까지 해야 하니까 더 오래 걸리고 쉬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청자들이 시각적 요소 없이 음악만 듣게 되니 숨을 곳이 없습니다. 장인 정신을 더 발휘해야 하죠. 그래도 장점이 모든 단점을 상쇄해줍니다.
Q. 앨범 재킷에 파도치는 밤바다 사진을 담으셨는데요. 이 사진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 얼굴보다는 풍경이 나오길 바랐습니다. 저랑 오래 협업해온 장민승 작가가 촬영해둔 사진 중 이번 앨범 속 음악들과 어울릴 만한 것을 찾다가 골랐습니다.
Q. 앨범의 첫 곡 ‘The River’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셨나요?
한없이 침잠하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강 하구에 있는 시골에 사는데,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물이 이리저리로 흐릅니다. 남북으로는 습지와 갈대밭이 있고요. 겨울에는 철새가 수천 마리 모여들어 하늘을 휘젓는 풍경을 산책하며 멍하니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 풍경에서 사람이 만든 자동차와 고층 빌딩 같은 요소만 없으면 너무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면서 계속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 순간을 담고자 했습니다.
Q. 현악 사운드는 <기생충>과 <옥자> 작업에 참여했던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고, 피아노 연주는 전설적인 녹음실로 유명한 노르웨이 오슬로의 레인보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셨다고요.
피아노 하나로 앨범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최상의 악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관리 잘된 악기가 있는 녹음실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몇 군데뿐입니다. 그중 하나가 레인보 스튜디오고요. 너무 감사하게도 거기 치프 엔지니어인 마틴 아브라함센(Martin Abrahamsen)이라는 분께서 저를 위해서 시간을 빼주셨습니다. 열흘간 계속 그 공간에 머물면서 하루에 7시간 정도씩 연주했습니다.
Q. 수록곡 중 ‘Anesthesia’와 ‘Esthesia’의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원래는 한 곡이었던 것을 나눈 건데요. ‘Esthesia’는 ‘미학적인’, ‘아름다운’ 등을 의미하는데, 그 반대말인 ‘Anesthesia’는 ‘추함’이 아니라 ‘마비’입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름다움의 반대인 거죠. 저에게 항상 열려 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단어들입니다. 데뷔 앨범의 제목을 단순하지만 ‘LISTEN’이라고 결정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예술을 위해 작업을 하기 때문에 원래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제 안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듣고 싶고, 사람들의 말도 듣고 싶고, 지구가 하는 말도 듣고 싶었습니다.
Q. ‘지구가 하는 말도 듣고 싶었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을 텐데요. 사실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걷잡을 수 없는 것도 있죠. 그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2021 P4G 서울 정상회의의 테마곡 ‘Wake up call’을 만들 기회가 생겼는데요. 작업을 하면서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고, 팬데믹과 전쟁을 겪으며 더욱 공고해졌죠. 이러한 상황에서 심오한 예술적 질문 대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때, ‘지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이번 앨범은 피지컬 앨범으로 발매할 계획이 없으시다고요.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저희 집에도 CD 플레이어가 없습니다. 턴테이블도 물론 없고요. 저만 해도 디지털로만 음악을 듣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지만, 피지컬 앨범을 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CD 시절엔 곡 순서와 곡과 곡 사이 침묵까지 앨범 전체를 하나의 아트워크처럼 디자인했습니다. 아마 제가 그 시절을 겪은 마지막 세대일 것 같은데요. 그런 것들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Q. 국악과 양악을 아우르는 음악적 시도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는데요.
한국 음악하고 협업을 많이 해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주위에 한국 음악을 하는 친구가 많기도 했고, 한국 음악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학습하고 탐닉했죠. 그래서 저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이번 앨범을 위해서도 한국적인 접근으로 몇 곡을 썼습니다. 앨범의 방향성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음악으로만 정직하게 가기로 결정하면서 빠지긴 했지만요. 다음에는 전통적이면서도 때로는 일렉트로닉적인 접근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Q. 작곡가님께 영감을 주는 작곡가나 음악이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처음으로 좋아했던 클래식 곡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입니다. 음악 안에서 구도자적인 느낌을 펼쳐내는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는 저의 10~20대를 지배한 음악가 중 하나고요. 또 크시슈토프 팬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의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라는 작품을 듣고 충격에 빠진 후로, 현대음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외에도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 류이치 사카모토, 진은숙 선생님 등 다양한 현대음악가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Q.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참여가 인생에 미친 영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저에게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로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삶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음악이라는 게 뭔지, 무엇을 더 학습해야 되는지,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더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을 통해 ‘성덕’이 될 수 있었는데요. 제가 너무 존경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과 <브로커>라는 영화를 통해 함께 작업할 기회를 얻었을 때, ‘나에게 굉장한 일이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웃음)
Q. 작곡가님께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뮤지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렇다 할 경제활동을 할 수 없던 중학생 때 생계 수단으로 시작했죠. 제게 음악의 시작은 노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비단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수많은 노동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에게 결여될 수 있는 근면함이나 책임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음악은 그냥 제 삶이고, 하루입니다.
Q. 긱스 멤버로 활동하던 청소년 시절, 인터뷰에서 앞으로 ‘슬픈 음악’과 ‘영화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어렸을 때 어두운 음악에 심취했었습니다. 장조보다는 단조가 좋았고요. 슬픔 속에 웃음이 있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는 음악에 끌렸습니다. 그리고 거의 시네마테크에서 살다시피 하는 굉장한 시네필이었는데요. 당시 보고 들은 영화와 음악이 제 10대와 20대를 형성한 것 같습니다. 현재 마흔두 살인데, 그때 학습하고 느낀 것들을 밑천으로 삼아 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Q.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앨범은 저만의 음악을 기록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구상하면서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고 싶어요. 지난 25년간의 음악 생활동안 안 해봤던 것들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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