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비누가 예술이 될 때 #친절한도슨트 #신미경
조각가 신미경의 개인전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오는 6월 10일까지)이 열리는 스페이스 씨에 들어서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일단 보통의 전시장에서는 맡을 수 없는 비누 향이 공간에 진동합니다. 그 향이 거대한 그림 앞으로 나를 이끄는데, 표면만 봐서는 캔버스와 물감으로 구성된 회화가 아니라 비누로 만든 조각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풍스러운 미술관을 재현한 전시장에서는 서양 미술사의 걸작과 작가가 비누로 만든 조각상이 서로 헷갈릴 수도 있을 거고요. 당연히 유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작가가 브론즈로 만들어낸 작업이구나 할 땐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겁니다. 감각과 사유가 번번이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순간, 작가가 의도한 혼란이 깊어질수록 비로소 이곳은 진정한 ‘공감각적 공간’으로 거듭납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신미경 작가는 고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며 대륙, 문화,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를 다뤄왔습니다. 1996년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된 그리스 고전 조각에 영감을 받은 ‘번역 시리즈’를 비롯해 특정 문화권의 역사적 특수성을 띤 오브제를 본인만의 언어와 기법으로 재창조합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적인 동시에 비미술적 재료인 비누를 활용합니다. 쉽게 마모되고 녹아 사라지는 비누는 영원성을 갈구하는 예술 작품의 본성 혹은 시간성을 진리로 삼은 고대 유물의 태생 등을 만나 흥미로운 역설을 도출합니다. 이렇게 고전과 전통의 상징성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문화적 시차가 발생하는데, 작가는 이 간극을 동력 삼아 원본과 복제, 진짜와 가짜, 문화와 역사, 번역과 해석 등의 다양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올해로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스페이스 씨는 신미경이라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름으로써 기념과 자축의 메시지를 대신합니다. 덕분에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초기 조각상은 물론 비누 도자기에 은박, 동박을 씌워 시간의 흔적을 기록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 투명한 유리 도자기를 번역한 ‘고스트 시리즈’(2007~2013), 앤티크 프레임과 비누가 대조를 이루는 ‘페인팅 시리즈’(2014~),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에서 영감을 받은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등 주요 대표작을 한눈에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소장품과 신작 등이 어우러질 때 에너지처럼 생겨나는 일종의 환영이 어제와 오늘을 오가는 작가 작업에 생동감을 더합니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는 잊지 말고 화장실에 들러보세요. 여자 화장실에 들어서면 세면대 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각상이 당신을 맞이할 겁니다. 앙투아네트의 양 볼을 쓰다듬고, 그 유명한 가체를 마구 문질러도 좋습니다. 이건 다름 아닌 비누니까요. 신미경이 오래전부터 진행 중인 ‘화장실 프로젝트’의 일환인 이 작업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직접 비누 조각상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형태를 소비 혹은 소멸시키는 과정, 즉 시간성을 몸소 체험하게 합니다. 앙투아네트의 얼굴에 남은 거품을 보면서, 천천히 손을 씻으면서, 만약 예술의 가치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이라는 전시 제목이 나의 경험과 감각으로 완성되는 순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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