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과 발레의 상관관계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무용 예술과 샤넬은 20세기 초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샤넬과 발레의 그 각별한 우정.
<지젤>은 내가 관람한 첫 정통 발레 공연이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튀튀와 화관을 착용한 무용수들의 군무를 보는 동안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무대를 떠다니듯 사뿐거리는 발끝부터 매끈하게 뻗은 손끝까지 우아함이 넘쳤다. 최근 샤넬 후원으로 30년 만에 한국을 찾은 파리 오페라 발레(Paris Opera Ballet)의 <지젤>은 럭셔리 하우스와 예술이 서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샤넬과 무용 예술의 역사는 길고도 풍부하다. 그 시작은 1913년, 가브리엘 샤넬이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가 안무를 맡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을 보게 된 순간이다. 공연을 보고 심미적 충격을 받은 샤넬은 <봄의 제전> 재연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발레 뤼스 설립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를 도와 자신에게 깊은 감동을 안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샤넬의 첫 후원 활동이자 발레 뤼스와 함께한 수많은 협업의 시작이다.
편안함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중시한 샤넬의 철학은 무대의상에도 반영됐다. 1924년 당시 유행하던 스포츠를 풍자적으로 다룬 작품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에서 수영, 골프, 테니스 등에서 영감을 얻어 일상에도 입을 수 있는 현대적인 의상을 선보인 것. 격식을 중시하는 무용계에서 그녀의 디자인은 혁명 그 자체였지만, 이때 등장한 니트 소재 수영복은 그 후 칼 라거펠트의 1998 S/S 컬렉션에 영향을 미쳤다. 1929년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안무의 <아폴로 뮈자제트(Apollon Musagète)>부터 레오니드 마신(Léonide Massine),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구상한 1939년 <바카날(Bacchanale)>에 이르기까지, 샤넬은 계속 발레 의상을 제작하며 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오직 완벽함만 인정됩니다.” 칼 라거펠트 역시 재임 기간에 하우스의 전통을 이어갔다. 1986년에는 독일 안무가 우베 숄츠(Uwe Scholz)의 발레 공연 의상을 2년 연속 만들었으며, 2009년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의 엘레나 글루드지즈(Elena Glurdjidze) 의상에 100시간이 넘게 공을 들였고, 2016년에는 당시 파리 오페라 발레 예술감독이었던 벤자민 마일피드(Benjamin Millepied)의 요청으로 <브람스-쇤베르크 콰르텟(Brahms-Schoenberg Quartet)> 의상을 제작하는 등 수많은 안무가와 지속적으로 협업하며 무용 예술에 열정을 쏟았다. 사망 1년 전인 2018년에도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 안무의 <데카당스(Decadence)> ‘볼레로(Boléro)’ 섹션 의상을 맡았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볼레로’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입니다. 열여섯 살 때 처음 구입한 클래식 음반이기도 합니다.”
창립자의 예술 후원 정신을 이어받은 샤넬 하우스는 2000년 모나코에서 열리는 ‘니진스키 어워드(Nijinsky Awards)’의 공식 파트너가 되었다. 2018년부터는 파리 국립 오페라단(Opéra National de Paris Ballet)의 오프닝 갈라를, 2020년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무용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다. 2019년 시즌 오프닝 갈라에서 가브리엘 샤넬의 친구이자 파리 오페라 발레 예술감독을 지낸 안무가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의 <바리아시옹(Variations)>이 상연될 당시, 버지니 비아르는 무용수 여섯 명에게 각각 장미, 백합, 튤립, 등꽃, 수레국화, 제비꽃을 형상화한 드레스를 입혔다. 2021년 갈라로 선정된 빅토르 그소브스키(Victor Gsovsky)의 <그랑 파 클래식(Grand Pas Classique)> 공연을 위해 제작한 의상 역시 샤넬의 자수 공방 르사주, 깃털 공방 르마리에 장인의 솜씨가 깃들어 있다. “발레복은 매우 많은 요구 사항이 있기 때문에, 꾸뛰르 하우스에서 무용수를 위한 의상을 만드는 건 일종의 도전과 같습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알(Étoile, 수석 무용수) 레오노르 볼락(Léonore Baulac)이 샤넬의 위업을 뒷받침한다. 2021년부터 데필레(Défilé, 행진)에 에투알로 데뷔하는 단원은 샤넬에서 제작한 의상과 티아라를 착용하고 있다. 지난 3월 11일 서울 공연 직후 새로운 에투알로 지명된 기욤 디옵(Guillaume Diop)을 비롯해 현재 에투알 무용수는 18명이다. 그만큼 영광의 순간을 샤넬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팬데믹으로 2021년 내한 공연이 미뤄진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모댄스(Modanse)>는 가브리엘 샤넬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2019년 6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했으며, 당연히 샤넬이 후원한다. 무용수들은 샤넬이 제작한 의상 80여 벌을 입고 춤을 춘다. 샤넬의 삶과 업적을 발레 무대에 올린 인물은 현존하는 최고의 발레리나로 꼽히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Svetlana Zakharova).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를 두 번이나 수상한 그녀는 2019년 <보그 이탈리아> 인터뷰에서 샤넬에 대한 인상을 털어놨다. “샤넬은 강한 성격과 힘을 지닌 동시에 연약함도 지녔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예술성을 끊임없이 추구했지만, 결국 혼자 남겨진 여성이죠. 그 이미지를 발레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춤은 하나의 움직임이자 자유에 대한 은유이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다. 춤이 멈추지 않는 한 예술과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샤넬의 정신도 계속 이어진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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