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 테리블, 리 알렉산더 맥퀸을 그리워하며
‘고트(GOAT)’라는 표현을 들어봤나? 흔히 스포츠계에서 사용하는 용어 고트는 ‘Greatest Of All Time’의 약자로, 해석하자면 ‘역대 최고’ 정도다. 그렇다면 패션이라는 그라운드에서 ‘고트’는 누구일까?
실은 이런 질문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길고 긴 ‘후보 목록’ 중에서 꼭 거론해야 하는 인물들은 분명 존재한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무슈 디올, 이브 생 로랑, 가브리엘 샤넬, 칼 라거펠트, 위베르 드 지방시, 미우치아 프라다… 이들은 패션계의 ‘역대 최고’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그리고 다른 디자이너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짧은 커리어로 이 리스트에 든 인물도 있다. 살아 있다면 지난 17일, 만 54세의 생일을 맞이했을 알렉산더 맥퀸이 그 주인공이다. 이른 나이에 단절한 천재를 그리워하며, 당신이 몰랐을 맥퀸에 관한 다섯 가지 얘깃거리를 선정해봤다.
1. 시네필, 맥퀸
맥퀸은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구상하곤 했다. 1993 F/W 컬렉션은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영감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쇼의 모든 피스를 담았던 검정 쓰레기봉투를 도난당하는 바람에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영화의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이 시퀸, 깃털 등으로 수놓은 피스가 여럿 존재했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1999 F/W 컬렉션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장면을 런웨이에 그대로 옮겨온다. 극의 막바지에 잭 니콜슨이 헤매던 눈밭을 재현해 모델들이 걷도록 한 것! <샤이닝>이 고독에 몸부림치며 파멸을 향해 가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맥퀸이 이 영화에 끌린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2. 체모에 매료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가장 매력적이라 생각한 남성의 신체 부위는 체모였다. 위대한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한다고 했던가? 알렉산더 맥퀸 역시 체모에 매료되었다. 1992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며 ‘희생자들을 쫓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Stalks His Victims)’라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검정과 빨강이 주를 이루는 이 괴기한 컬렉션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빅토리아 시대의 매춘부들이 본인의 머리카락을 판매하던 것에서 영감을 받아 라벨에 실제 사람의 머리카락(마르탱 마르지엘라 역시 이발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발로 만든 코트를 선보이기도 했고, 아티스트로 변신한 지금은 머리카락을 주제로 아트 피스를 제작하고 있다)을 잘라 넣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이자벨라 블로우는 그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고 해당 컬렉션의 옷을 5,000파운드에 전부 구매했고, 이자벨라와 맥퀸은 절친 이상으로 거듭난다. 그녀의 자살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맥퀸이 3년 뒤 목숨을 끊을 만큼.
그 후로도 맥퀸은 체모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그의 시그니처 중 하나였던 범스터 팬츠는 모델들의 음모를 그대로 노출했고, 1990년대 후반에도 재킷, 스커트 등의 라벨에 머리카락을 넣어 출시했다. 전설로 남은 그의 ‘머리카락 라벨’로 출시된 제품은 지금도 수천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된다.
3. 새가 된 맥퀸
그는 체모뿐 아니라 새에게도 환상을 품었다. 어릴 때부터 새를 좋아한 그가 고등학생 때 새를 관찰하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다. 이자벨라 블로우는 그의 졸업 컬렉션을 통째로 구매하기 전, 남편에게 맥퀸의 옷이 “새처럼 움직인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의 1995 S/S 컬렉션 ‘새(The Birds)’ 역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새>에게서 영감을 받아 완성했다.
이자벨라 블로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맥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2008 S/S 컬렉션의 베뉴를 새 모양의 LED로 장식한 것은 한 마리의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그녀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4. 충격요법
패션계에서 ‘앙팡 테리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장 폴 고티에와 알렉산더 맥퀸이다. 맥퀸은 충격적인 비주얼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데 누구보다 능했고, 그렇기에 ‘불경스럽다’ 혹은 ‘외설적이다’라는 논란이 커리어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제국주의와 폭력에 반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1995 F/W 컬렉션 ‘하일랜드 유린(Highland Rapes)’에서 모델에게 멍이 든 듯한 화장을 시키기도 한다. 당시 이 화장으로 인해 여성 혐오자라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1998 S/S 컬렉션을 후원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컬렉션에 ‘골든 샤워’라는 성적인 레퍼런스가 다분한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던 맥퀸을 필사적으로 말려야만 했다. 해당 컬렉션의 정식 제목은 ‘무제(Untitled)’였지만, 쇼의 막바지에 그는 노란 조명을 깔고 베뉴에 비를 흩뿌렸다.
그뿐일까? 엄숙한 교회에서 열린 1996 F/W 컬렉션 ‘단테(Dante)’의 프런트 로에는 해골이 앉아 있었고, 모델들이 뿔을 달고 등장하는 등 ‘악마적인’ 레퍼런스로 가득했다. 2001 S/S 컬렉션 ‘보스(Voss)’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나체로 마스크만 뒤집어쓴 채 튜브로 호흡하던 저널리스트 미셸 올리(Michelle Olley)였다.
5. 기술과 패션의 공존
맥퀸의 ‘베스트 프렌드’ 중 한 명이자 현시대를 대표하는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는 맥퀸의 생일을 맞아 자신이 설립한 쇼 스튜디오를 통해 2003년 맥퀸 인터뷰 영상을 전격 공개했다. 인터뷰 중 영국 작가 제임스 G. 발라드(James G. Ballard)가 “패션이 언제 ‘컴퓨터화’될 것이라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맥퀸은 “내가 컴퓨터에 익숙해지면”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의 말처럼, 맥퀸은 첨단 기술에 큰 흥미를 느낌과 동시에 패션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알렉산더 맥퀸’의 상징과도 같은 ‘스프레이 페인트 드레스’다. 로봇이 원피스에 페인트를 분사해 완성하는 드레스로 1999 S/S 컬렉션에서 처음 선보인 기법이었다(2023 S/S 컬렉션에서 코페르니가 벨라 하디드와 선보인 퍼포먼스 역시 알렉산더 맥퀸을 레퍼런스로 했다).
당시 흰색 민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샬롬 할로우에게 로봇이 페인트를 분사하는 퍼포먼스는 모든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두렵다는 듯 몸을 숨기는 샬롬의 주위로 거리낌 없이 페인트를 분사하는 로봇의 모습이란! 완성된 드레스를 입은 샬롬은 발레리나 같은 우아한 자태와 함께 내면이 꽉 찬 듯 충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패션쇼를 공연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첨단 기술과 인간, 패션이 모두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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