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가드너의 열대 정원 잔혹사
발리에 300㎡ 정도의 개인 정원을 갖게 된다면 어떤 식물을 심겠는가? 식물 집사들을 설레게 할 질문이다. 하지만 꿈은 꿈일 때 가장 아름답다.
나는 한국에서 주택 가진 어르신들이 왜 꽃과 채소 대신 자갈과 시멘트로 흙을 가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의 공동주택에 살 때 반려 식물을 석 달 이상 살려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정원이 있으면 다를 줄 알았다. ‘잔디와 나무는 손이 별로 안 가지 않나? 그 정도는 심어도 좋으련만’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나는 열대 관엽식물을 좋아했다. 그걸 한국에서 키울 엄두는 못 냈지만 식물원이나 카페나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건 좋았다. 그래서 열대지방에 스스로 가꿔야 할 300㎡의 정원이 생겼을 때 ‘Why not?’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열대지방에서의 가드닝은 시시포스(시지프스)의 형벌에 가깝다.
즐거운 얘기부터 해보자. 얼마 전 친구가 동네 정글을 뒤져서 몬스테라를 구해주었다. 여기선 원하는 식물이 있으면 주로 그렇게 해결한다. 부겐빌레아, 프랜지패니 같은 토착 꽃나무는 거의 집집마다 있는데 가지를 꺾어다가 땅에 꽂고 잊어버리면 알아서 자란다. 잡초를 뽑다가 유난히 떡잎이 크다 싶어 남겨두면 콜로카시아고, 담장 식물이 필요한데 인터넷에서 구매한 씨앗이 도통 발아하지 않아 속상할 때 마당을 두리번거리면 여주와 나팔꽃이 발을 휘감으면서 ‘저 찾으셨어요? 1,000포기 정도면 되겠습니까?’ 하는 식이다. 티크, 코코넛, 파파야는 씨앗이 땅을 스치기만 해도 자라는 수준이라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티크는 무섭게 잎을 떨궈서 매일 쓸어내는 게 일이고, 코코넛과 파파야는 뿌리가 얕아서 쉽게 쓰러진다. 내 정원에도 우기에 쓰러진 3m의 파파야나무가 있다. 전기톱으로 조각내서 치워야 하는데 다른 일이 급해서 두 달째 미루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무역업을 하는 지인은 간혹 식물을 컨테이너 가득 실어 한국이나 미국으로 수출한다. 한때 몬스테라나 칼라디움 같은 관엽식물이 유행했고, 난초는 꾸준히 수요가 있고, 요즘은 다음 트렌드가 될 식물을 찾고 있다고. 그렇게 보낸 식물이 30%만 살아서 도착해도 남는 장사라고 했다. 자연을 사랑해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탄소 발자국 남기면서 다른 기후로 식물을 이주시키는 건 아이러니다. 하지만 제 눈에 차는 반려를 욕망하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니겠나. 열대식물이 거저 자라는 발리에서도 일본 식물을 수입하고 분재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지인은 자카르타에서 패션 사업을 하다가 은퇴 후 요트나 타며 인생을 즐기겠다고 발리에 왔는데 막상 일이 없으니 심심하다며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고 있다. 연초에 묘목을 사서 키운 다음 12월에 가격표를 걸어 차고에 내놓으면 외국인들이 사간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이곳 토착 식물이 취향에 맞는다. 문제는, 여기서는 내가 원하는 식물이 잘 자라는 만큼 원치 않는 식물도 무섭게 자란다는 거다.
내 집은 산꼭대기에 홀로 있다. 주변은 개발되지 않은 정글이다. 그러니 사방에서 씨가 날아든다. 원래 이곳은 농사짓고 소 키우던 땅이다. 토양이 기름지다. 게다가 고도가 높아서 열대지방치고 선선하다. 농작물이 좋아하는 땅이다. 농작물이 좋아하는 땅은 잡초도 좋아한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덤불이 된다. 사람을 고용해서 땅을 갈아엎어보기도 했고, 약을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잡초는 돌아서면 자라고,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10㎡를 손보면 나머지 290㎡가 남아 있고, 열흘쯤 작업을 하면 첫날 작업한 공간은 다시 덤불이 되어 있다. 정원 일부에 잔디를 심은 후에는 약도 칠 수 없어서 손으로 잡초를 뽑고 있다. 덕분에 요통을 달고 산다. 물론 잔디밭에서도 잡초는 무럭무럭 자란다.
요즘 나의 가장 큰 적은 란타나다. 이 녀석들은 까칠한 잎과 튼튼한 뿌리를 가졌다. 성장이 너무 빨라서 한번 뿌리를 내리면 다른 식물이 자랄 공간도 남지 않는다. 줄기를 말끔히 제거해봤자 두 달이면 다시 사람 키만큼 자라고, 그 사이 깊고 넓은 뿌리에서 다른 줄기들이 솟는다. 그 지경이면 어지간히 독한 약으로는 뿌리를 제거할 수도 없다. 호미는 어림도 없고 장정들이 들러붙어 곡괭이질을 해야 간신히 성장을 멈추는데 그래봤자 어딘가 남아 있던 잔뿌리가 또 줄기를 낸다. 내가 이것과 사투 중이라니 에코 출판사를 운영하는 지인이 “란타나는 화분에 키워야 된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듣자니 란타나는 이미 가드너들 사이에서 악마의 정원 식물로 유명한 모양이다. 굳이 키워야겠다면 뿌리가 번지지 않게 가둬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왜? 이 무서운 녀석을? 집에서? 뉴욕에 사는 지인은 란타나를 꽃집에서 화분으로 사다가 길러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하, 뉴욕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나는 한국의 혹독한 겨울이 가드너들에게는 악몽일 거라 생각했는데 열대지방에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겨울이 있어야 잡초가 죽는다. 지인의 뉴요커 란타나도 화분에서 얌전히 꽃을 피우다가 고향을 그리며 동사했을 것이다. 원치 않는 것들을 제거한 뒤에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한 정원을 가질 수 있다.
사실 ‘잡초’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건 가드너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란타나가 내게는 잡초지만 뉴요커에게는 화초였듯 잡초의 기준은 상황마다 다르다. 마른땅보다야 잡초라도 자라주는 게 토양에도 이롭다. 하지만 나는 이곳 풀들이 무섭다. 덤불에서 뱀이 튀어나올까 봐 항상 조마조마하다. 잡초를 뽑다 보면 ‘타샤 튜더도, 정재형도, 겨울 있는 나라에 사니까 정원 일이 즐거운 거 아냐?’라는 심술궂은 생각마저 든다. 눈치챘겠지만 가드닝은 정서를 순화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땀 흘리고 노동하고 몰입하고 자연을 보는 게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걸로 천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아름다운 것들은 감상만 할 때 가장 좋다는 쪽이다. 관리가 내 책임이 되면 골치가 아프다. 토착 식물을 잘 아는 지역민을 정원사로 고용하는 건 쉬운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집에 타인을 들이는 데 익숙지 않은 도시 싱글 직장인 출신 여성에게 그것은 마지막까지 미루고픈 방법이다.
정원은 하루아침에 지어지지 않는다. 열대 정원을 갖는다는 건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필생의 대업이라는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나가떨어질 것이다. 체력, 노력, 시간 모두 상상 이상 소모된다. 나는 왜 한국 어르신들이 정원 대신 마당을 택하는지, 왜 초목 대신 자갈을 깔고 시멘트를 뿌리는지 이제야 이해한다. 식물은 화분보다 땅에 있을 때 멋지다는 순진한 생각도 버렸다. 자연은 각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반려하는 게 좋다. 하지만 불평만 해서는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풀을 뽑는다. 막상 땀을 흘리면 기분이 나아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장에 심은 블루 피가 얼마나 자랐나부터 확인하고, 한때 ‘긱’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자 기기에 쏟던 관심은 정원 도구로 옮겨갔고, 어딜 가나 식물부터 살핀다. 이렇게 살다 보면 10년 후 어느 날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이루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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