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 칼: 죽어가던 샤넬을 되살리기까지
2023년 멧 갈라의 테마는 ‘칼 라거펠트: 라인 오브 뷰티(Karl Lagerfeld: A Line of Beauty)’입니다. 패션 역사상 최고의 디자이너로 칭송받는 그를 추억하기 위함이죠. 칼은 60년 넘도록 패션계의 왕으로 군림했지만, 오직 5개 브랜드만을 위해 디자인했는데요. 장 파투, 끌로에, 펜디, 샤넬 그리고 동명의 브랜드 칼 라거펠트가 바로 그것입니다. 패션계의 카이저, 칼을 그리워하며 그가 각 브랜드에 남긴 유산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 마지막 브랜드는 샤넬입니다.
1910년,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파리 캉봉가 21번지에 모자 부티크를 오픈한 것이 샤넬의 시작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은 1913년에 저지 소재를 활용한 여성용 스포츠웨어를 선보이고, 1930년대에는 파격적인 팬츠 스타일을 선보이는 등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표현해나갑니다. 이후로도 1955년 ‘2.55 백’을 발표하고, 바로 다음 해 브랜드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는 트위드 수트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성장을 거듭하죠.
하지만 가브리엘 샤넬이 생을 마감한 1971년 이후, 하우스는 크게 휘청입니다. 1983년, 샤넬의 아트 디렉터로 선임된 칼 라거펠트가 2007년에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처음 샤넬에 왔을 때, 그녀는 잠에 빠져 있었다. 그것도 코를 골면서 말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칼은 샤넬을 잠에서 깨운 것은 물론, 가장 클래식하면서도 동시대적인 하우스로 바꾸어나갑니다.
칼 라거펠트는 어떻게 샤넬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1983년, <WWD>와 나눈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가브리엘 샤넬과 똑같은 옷을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들은 매우 샤넬다울 것이다.” 이 말처럼 그는 하우스의 유산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변주하며 현대적으로 재해석합니다. 가브리엘 샤넬이 고안한 ‘더블 C’ 로고를 브랜드 전면에 내세운 것도 칼이었고, 그녀가 평소 사랑하던 진주를 패셔너블한 액세서리로 변모시킨 것도 그였죠.
칼은 샤넬의 아트 디렉터로 부임한 이후, 다양한 아틀리에를 인수합니다. 1996년에는 깃털과 꽃 장식 공방 르마리에를, 1년 후에는 모자 공방 미셸을 샤넬 공방에 합류시켰으며, 2002년에는 자수 공방 르사주를 인수하죠. 이는 칼이 생각한 샤넬만의 차별점인 ‘장인 정신’과 ‘수공예 기법’을 바탕으로 확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칼과 샤넬은 2002년 이후 꾸준히 공방 컬렉션을 선보이며 샤넬 공방의 탁월한 기술력을 뽐내고 있죠. 몬테카를로, 에든버러, 잘츠부르크 등 전 세계 도시를 방문하며 각 도시의 문화에서 영감받은 룩을 선보인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고요. 2015년에는 서울에서 리조트 컬렉션을 발표하며 한복을 재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칼은 타고난 쇼 맨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환상을 런웨이에 그대로 옮긴 듯한 그의 컬렉션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쇼’와도 같았죠. 2009 S/S 컬렉션에서는 캉봉가 31번지에 위치한 샤넬의 본사 건물을 런웨이에 그대로 재현하는가 하면, 가브리엘 샤넬이 사자상을 수집했다는 사실에서 영감받아 2010 가을 쿠튀르 컬렉션의 베뉴를 거대한 금빛 사자상으로 장식하며 샤넬 하우스의 역사와 뿌리에 경의를 표했죠.
칼은 단순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종종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했죠. 그는 2010 F/W 컬렉션을 위해 스웨덴에서 265톤, 40m에 달하는 빙하를 파리의 그랑 팔레로 옮깁니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2015 S/S 컬렉션은 카라 델레바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모델이 ‘여성 인권’과 ‘자유’를 외치는 시위와 함께 막을 내렸죠.
칼의 펜디에서 경력을 쌓은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디올 데뷔 컬렉션에서 내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슬로건처럼 럭셔리 하우스들이 내는 용기 있는 목소리는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기 마련입니다.
칼은 ‘현재를 포용하고 미래를 발명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가브리엘 샤넬의 유산을 이어받아 지금의 샤넬을 만들었듯, 누군가는 ‘칼 라거펠트’라는 이름의 과거와 현재를 포용하며 새로운 미래를 발명해나가겠죠. 칼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모든 것은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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