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젊은 작가가 자본의 형상을 창조한다면
땅에 발붙인 고민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을 담아 자본의 형상을 창조해내는 젊은 작가, 이병찬의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개인전 <호흡의 언어(the language of respiration)>가 4월 15일부터 5월 20일까지 샌드위치 에이피티(SANDWICH apt.)에서 진행된다. 자본이 현대인에게 유발하는 불안감을 닮은, ‘크리처’의 기이한 호흡이 울려 퍼지는 전시장 한편에서 그와 나눈 대화.
그동안 어떤 작업을 해오셨나요?
우리가 소비할 때 만들어지는 여러 형태나 행위의 모습을 수집해 자본이 지닌 힘이나 질량을 시각화하고 도시의 생태계를 보여주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주로 설치 작업을 합니다. 플라스틱을 활용한 ‘크리처(Creatrue, 호흡하는 유기체)’ 작품이나 스프링을 이용해 파동을 만들어내는 작품이 대표적이죠. 이외에도 드로잉, 퍼포먼스,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투영한 작품에 대해선 많이 보고 들어왔지만, 자본 그 자체를 시각화한 시도는 매우 새롭게 느껴집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송도 신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다녔어요. 지금은 화려한 도시지만 당시엔 마땅한 편의 시설조차 없이 한창 개발 중일 때였어요. 빈 땅에 시멘트를 쏟아부어 거대한 빌딩을 만드는, 도시 전체가 개발되는 모습을 매일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셈이죠. 나무나 호수처럼 자연적인 요소도 인위적으로 생겨났는데, 마치 원활한 소비 작동을 할 수 있도록 치장하는 장식품같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자연계’로만 생각했던 생태계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어요. 또 신도시에는 투자 현수막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걸리기 마련이잖아요. 학생으로서 투자 현수막에 적힌 숫자들을 봤을 때 어떤 갭(Gap)을 느끼곤 했어요. 왠지 어른들의 세계가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열등감도 생기고요. 그런 감정들이 ‘크리처’가 기형적 형태로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크리처’ 시리즈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형태를 언제 처음 떠올렸나요?
대학원에 다닐 때,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랑 김밥을 자주 사 먹었어요. 어느 날 편의점 직원이 비닐봉지에 컵라면이랑 김밥을 넣어주는데, 그 장면 자체가 도시에서 소비 행위를 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는 단계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비닐봉지나 포장 필름지 등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됐죠.
플라스틱, 비닐봉지 등의 소재를 주로 사용하는 건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환경문제 역시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일까요?
도시의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제 작업에서 환경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순 없지만, 꼭 그것만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소비를 한 이후의 흔적이라든지 폐기된 것들, 즉 소비의 ‘결과’가 아닌 ‘시작’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앞서 언급한 편의점에서의 상황처럼요. 예전에 비닐하우스에서 폐기된 비닐을 수집해 작업한 적이 있는데요. ‘내가 환경을 더 해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염된 걸 우선 닦고 작업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 사용되는 물이나 세제가 환경에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크리처’ 작업 과정도 궁금합니다.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져요. 고데기로 비닐을 밀봉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플라스틱을 잇고자 하는 부분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손가락으로 눌러줍니다. 각 플라스틱을 그런 식으로 연결하며 작업하다 보니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이번 전시를 위한 작업은 작년 12월부터 시작해 두 달 정도 소요되었어요.
작품 규모가 거대한데, 작업실에서 작업한 후 옮기는 형태인가요?
작업실이 작아서 미리 바람을 넣어 테스트해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저도 현장에 가서야 완성된 형태를 처음 봅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머릿속에 있을 뿐이죠.
그럼 미리 치밀하게 설계를 하고 시작하나요? 아니면 즉흥적으로?
추후 수정이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할 수는 없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죠. 그렇다고 꼼꼼하게 하지는 않고 러프하게 낙서하는 식으로 해요.
현장에서 볼 때 머릿속으로 그렸던 이미지와 다를 때도 있나요?
물론이죠. 그럴 땐 최대한 수정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그러다 보니 설치하기 전에 며칠 동안은 잠도 못 자고 엄청 예민해요. 그래도 이번 전시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나온 것 같아요.
‘크리처’에 호흡이라는 청각적 요소를 활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괴물이든 동물이든 어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호흡이라는 생각이 첫 번째 이유였어요. 두 번째는, 자본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자본의 팽창과 붕괴를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호흡이라는 요소를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바람을 통해 호흡을 표현하는데, 외부에 모터를 두고 거기에 호스를 연결한 다음 그 안에 소리가 작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오브제를 넣어둬요. 바람을 집어넣으면 소리가 발생하도록. 관악기나 목관악기에 사람의 호흡이 들어가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아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크리처’ 앞에 달린 볼록거울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전 우주를 좋아해요. 우리는 빛을 통해서 우주를 보지만, 내가 보는 빛이 얼마나 먼 과거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죠.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싶어 제임스 웹 망원경에서 착안한 거울을 설치했어요. 그리고 볼록거울을 통해서 크리처와 주변 장면들이 일그러진 형태로 보이길 바랐어요.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을 작업에 많이 투영하는 편이에요. 팬데믹 이후에 부동산값이 폭등했잖아요. 그때 언론은 집값이 더 올라갈 테니 지금 집을 사야 한다고 부추겼죠. 돌이켜 보면 완벽한 거품인데 말이에요. 그렇듯 오늘이 내일과 이어져 있다는 것과, 내일에서 오늘을 바라봤을 때 일그러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어요.
관람객들이 작품을 통해 어떤 자극을 얻길 바라나요?
그런 건 없어요. 저는 작업을 할 때 관람객에게 어떤 의도나 의미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보다는 그냥 제가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 의의를 둡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다를 테니, 관람객에게 특정 감상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전적으로 맡기고 싶어요.
작품에 담긴 의미를 보면 사회문제 전반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보통 어떤 식으로 사회 이슈를 접하세요?
뉴스를 봐요. 제가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보통 9시 뉴스 중간에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어요. 저는 혼자 뉴스를 보면서 부모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게 매일 뉴스를 봤어요. 당시 IMF 때라서 초등학생이 보기에 자극적인 뉴스가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보는 것 같아요.
청년으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이 작품에 반영된 적도 있나요?
제가 1987년생인데, 스무 살 이후로 이사를 열 번 넘게 했어요. 또래 청년들과 똑같이 주거 문제에 대한 분노가 있죠. 2021년 세화미술관에서 진행한 <Solid City> 전시에서 텐트 형태의 크리처 작업을 선보인 적이 있어요. 사람이 직접 작품 안에 들어가서 문을 열면 압력이 빠지면서 형태가 붕괴되는데, 그렇게 주거 문제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어낸 거죠. 저는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경험을 많이 했고, 그래서 작업할 때 그런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젊은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일과 자본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젊은 작가들 대부분이 경제적인 문제를 겪고 있죠. 저는 제가 작가가 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군대에 다녀온 후 스물아홉 살 때쯤 뒤늦게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학자금 대출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냥 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후회할까 봐. 지금은 괜찮을 때도, 아닐 때도 있어요. 프리랜서와 비슷해요. 작품이 판매됐다거나 큰 프로젝트에 참여한 후엔 조금 여유가 있지만, 6개월 이상 수입이 없을 때고 있고요.
현재의 삶에 만족하세요?
아닌 것 같아요. 음, 그러니까, 저는 집이 너무 갖고 싶어요.(웃음)
아, 집. 저도 문제인데.
집이 너무 갖고 싶어요. 주위의 미술 작가들을 만나면 보통은 전시나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 얘기를 하면 저는 옆에서 “나는 집이 갖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해요.
집을 보유하게 된다면 만족하실 것 같으세요?
음, 집을 갖고 나면 여행을 좀 다녀보고 싶어요. 동남아 같은 데 가서 시간과 돈을 자유롭게 써보고 싶어요. 그 정도면 행복한 삶 아닐까요?
의외의 답변이 계속되네요. 어떻게 보면 젊은 작가이자 청년으로서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답변인 것 같기도 하고요. 보편적인 고민을 하고 계신 작가분이어서 관람객 입장에서는 왠지 반갑기도 해요.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너무너무 평범한 사람이에요.
지난해에는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의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죠.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측에서 먼저 제안해서 3개월간 참여했어요. 다방면으로 서포트를 많이 해준 덕에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었죠. 결과물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던 작가들과의 그룹전 <FaN WEEK>를 통해 공개했고요. 그룹전이지만 작가마다 전시 장소가 달랐어요. 저 같은 경우는 도초지(東長寺)라는 절이었어요. 절은 향도 피우고, 기도도 하면서 기복적인 행위를 하는 공간이잖아요.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사람들이 부처님 같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자본의 형태를 은유한 제 작업에 한 번쯤은 기도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앞으로 또 어디에서 작품을 볼 수 있을까요?
노르웨이 베스트포센 미술관(Vestfossen Kunstlaboratorium)에서 제 작업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뒤에는 남해에 자리한 문화 공간 스페이스 미조에서 설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또 8월에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해요. 3년마다 열리는 국내 유일의 공공 예술 축제인데, 규모가 꽤 커서 많은 작가가 참여할 예정이에요. 다음 달에는 새 프로젝트 미팅차 도쿄에 다녀올 예정인데, 그건 아마 내년 초쯤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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