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왜 1990년대에 집착할까?
우리가 지나온 길고 긴 과거 중에서도, 패션이 유달리 그리워하는 시기가 있다. 많은 이들이 패션의 ‘황금기’로 꼽곤 하는 1990년대다. 최근 이때를 추억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미학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역대 최고의 패션 포토그래퍼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 스티븐 마이젤. 지난 2022년 11월 9일부터 며칠 전인 5월 1일까지, 스페인의 해안 도시 라 코루냐(La Coruña)에서는 그를 주제로 한 전시 <스티븐 마이젤 1993: 사진으로 돌아본 한 해(A Year in Photographs)>가 열렸다. 1993년에만 28개의 <보그> 커버, 그리고 100건이 넘는 화보 촬영을 진행하며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낸 스티븐 마이젤과 그의 작업을 기념하기 위한 것. 스티븐 마이젤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위대한 디자인을 보며 영감을 받아왔다. 그리고 1993년에는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정말, 정말 많았다. 오로지 패션만을 위한 시대라고 할까? 그때만큼 패션계에 몸담기 좋았던 때는 없다.”
스티븐 마이젤이 1993년을 ‘가장 패셔너블한 해’로 꼽았다면, 프랑스 파리의 팔레 갈리에라 박물관은 1997년에 주목했다. 올해 7월 3일까지 팔레 갈리에라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1997: 패션 빅뱅>에서는 당시의 패션계를 지배하던 디자이너들,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르던 젊은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만나볼 수 있다.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당시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브랜드들도 존재한다. 과거 인기 있었던 아이템에 모던한 터치를 더한 ‘리에디션 컬렉션’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프라다는 작년에 ‘리에디션 1995 백’을 출시했다. 킴 카다시안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돌체앤가바나의 2023 S/S 컬렉션 속 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축적된 브랜드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겨날 것이다. 왜 하필 1990년대일까? <1997: 패션 빅뱅>의 큐레이팅을 담당한 알렉상드르 샘슨(Alexandre Samson)은 <보그 프랑스>가 1997년 봄 꾸뛰르 컬렉션을 취재하며 ‘빅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영감받아 전시 제목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것처럼, 1997년에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며 지금의 패션 역시 그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이유에서다.
1997년 패션계에는 실로 많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헬무트 랭은 1998 S/S 컬렉션을 발표하며 미니멀리즘의 전성기를 알렸고, 후세인 샬라얀은 패션 역시 예술, 심지어 과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 마르지엘라는 해체주의와 비율에 관한 실험을 이어갔고, 라프 시몬스는 1998 S/S 컬렉션을 통해 하이패션이 꼭 고상할 필요는 없다고 외쳤다.
그의 말처럼 패션계는 아직 당시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까?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딱 잘라 답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꽤 설득력 있다. 최근 급부상하는 트렌드 ‘조용한 럭셔리’는 헬무트 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샬라얀의 유산은 ‘하이-테크 꾸뛰르’를 선보이는 아이리스 반 헤르펜이 성공적으로 이어받았다. 물론 지금은 스타일이 많이 변했지만 라프 시몬스는 여전히 현역으로 트렌드의 정점에 서 있는 프라다를 이끌고, 1997년 당시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렌시아가의 수장이 된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베테랑이 되어 루이 비통을 이끌고 있다. 그뿐일까? 지금도 젊은 디자이너의 컬렉션에서 해체주의의 향기가 느껴지는 즉시 그에게는 ‘제2의 마르지엘라’라는 별명이 붙는다. 2023년에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1990년대 후반 무렵 탄생한 패션 속 여러 ‘분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어쩌면 ‘왜 하필 1990년대일까?’보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왜 하필 지금 그때를 그리워할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또렷한 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는 1990년대가 정말 ‘패션의 황금기’였으며, 현재 디자이너들이 칼 라거펠트, 알렉산더 맥퀸, 마르탱 마르지엘라 등 ‘위대한 디자이너’들에 비하면 수준이 현격히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또 누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주장할 것이고, 누구는 전쟁과 기후 위기 같은 우리를 둘러싼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할 뿐이라는 논리를 펼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스티븐 마이젤의 말처럼, 1990년대에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때를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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