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윤여정의 칸영화제 스타일
“나처럼 늙은 사람들에게는 드레스 협찬이 안 들어온다.”
2010년 5월 15일, 배우 윤여정이 칸영화제 일정을 앞두고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너스레를 떨며 한 말입니다. 참석해야 할 시상식이 있다고 하면 250벌 이상의 초고가 옷이 그에게 몰리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죠. 윤여정이라는 이름 옆에 ‘패션’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한국 배우 첫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으로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영화 <미나리>, 윤여정의 저력을 다시 깨우치게 한 시리즈 <파친코>가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으니까요.
윤여정은 칸영화제에 총 네 작품으로, 두 번 참석했습니다. 첫 참석은 2010년에 열린 제63회 칸영화제,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로 레드 카펫을 밟았죠. 그로부터 2년 뒤, 윤여정은 또 한 번 칸의 부름을 받습니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로, 이번에도 역시 두 ‘상수’ 감독의 작품으로 레드 카펫에 섰죠. 한번 갈 때마다 두 편의 영화로 칸을 찾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윤여정은 이에 대해 “오래 살아서 기쁘다”는 위트 있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두 해 동안 직접 마련한 옷이 제법 많은 지분을 차지하던 윤여정의 레드 카펫 패션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설령 그가 협찬 문제로 성가셨을지언정 크게 개의치는 않았을 거라는 걸요(애초에 협찬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이기도 하지만요). 칸에서 포착된 그의 모든 패션은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윤여정의 요즘 스타일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차분한 뉴트럴 톤, 깔끔한 라인, 간결한 구성까지, 어제 찍은 사진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세련미였죠. 윤여정의 최근 패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반가운 아이템도 몇 보였고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한결같은 윤여정의 레드 카펫 스타일을 모았습니다. 자비를 털어 드라마 캐릭터에 어울릴 옷을 사고, 35세 어린 배우 김민희에게 스타일을 배운다고 쿨하게 말하며, 배우를 안 했다면 패션 디자이너를 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패션을 진정으로 사랑해본 자만 실현할 수 있는 클래식함이 서려 있지요.
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하녀> & <하하하>
생애 첫 칸영화제에서 윤여정이 선택한 컬러는 블랙이었습니다. 레드 카펫과 포토콜, 심지어 ‘한국 영화의 밤’ 행사에도 올 블랙 룩을 선보였지요. 같은 아이템을 활용하는 노련함도 발휘했습니다. 5월 14일 <하녀> 레드 카펫에서 선보인 블랙 드레스를 21일 <하하하>의 포토콜에서 다시 착용했거든요. 대신 길이는 ‘윤여정 스타일’로 손을 본 듯하군요. 평소 미디 드레스를 즐기는 그답게 말이에요.
빼놓을 수 없는 룩은 21일 <하하하> 프리미어에 참석할 때 입었던 블랙 슬리브리스 드레스입니다. 장식이라곤 왼쪽 어깨에 실버 디테일이 전부인 미니멀한 디자인의 드레스였죠. 이는 당시 협찬이 쉽지 않았던 윤여정에게 DKNY 창립자 도나 카란의 회사에서 근무하던 그의 큰아들이 직접 공수해준 드레스입니다. 첫 칸영화제 입성에 아들이 마련한 옷을 입고 섰다는 것만으로 참 특별한데,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윤여정과도 운명처럼 들어맞는 드레스군요.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돈의 맛> & <다른 나라에서>
두 번째 칸영화제 역시 블랙 컬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포토콜 앞에 선 두 룩은 반갑기까지 했죠. 미색의 트리밍 디테일이 가미된 카디건, 미디 길이의 심플한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윤여정의 패션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까요. 여기에 정석적인 블랙 펌프스와 손목시계로 담백한 우아함을 연출했습니다.
유일하게 블랙 컬러가 아닌 건 5월 21일 저녁 <다른 나라에서> 레드 카펫에서였습니다. 지난 칸에 이어 도나 카란의 브라운 드레스를 착용했죠. 컬러는 한없이 차분했지만 허리 부근의 드레이프 디테일 덕에 매혹적인 분위기가 묻어났습니다. 타이트한 롱 드레스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윤여정에게 모두 감탄했는데요. 정작 그는 “비가 와서 옷을 자꾸 접어 올렸다”며 소탈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자벨(위페르)은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자기 동네니까 잘 알았겠지 싶다. 나는 홈그라운드가 아니라서 그랬다”며 언제나 그랬듯, 유머로 유쾌하게 승화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고요.
26일 <돈의 맛> 프리미어에서는 플라워 장식이 은은하게 새겨진 펜디의 블랙 드레스를 착용했습니다. 여기에 실버 네크리스와 팔찌로 기품을 더했지요. 강렬한 레드 컬러 클러치에서 작품의 맛을 잠시 엿볼 수 있었고요.
하지만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본래 입기로 했던 정구호 디자이너의 드레스가 레드 카펫 분위기와 맞지 않았던 거죠. 결국 윤여정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당장 몇 시간 뒤에 레드 카펫에 올라야 하는 상황에서 옷을 직접 사 입기로 한 건데요. 다행히 평소 그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던 스태프가 펜디 매장에서 이 드레스를 찾아냈습니다. 비록 4,500유로에 달하는 드레스 가격을 개인 카드로 지불해야 했지만요. 길이도 그 자리에서 시침질로 수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예능 프로그램 <뜻밖의 여정>에서 직접 밝힌 것으로, 윤여정은 이 드레스를 ‘가장 코피 흘리고 산 아이템’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배우 윤여정은 연기와 패션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합니다. 본업에서는 매번 놀라우리만치 새로운 캐릭터를 선택하지만 패션에서만큼은 자기만의 분명한 스타일을 꾸준히 고수하죠.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사랑의 방식은 우리가 배우 윤여정을 끊임없이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끈끈한 중력으로 작용합니다. 윤여정이 칸을 세 번째 방문할 땐 과연 어떤 작품과 패션으로 함께할지 궁금해지는군요.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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