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교를 런웨이로 만든 황동혁의 게임
루이 비통의 잠수교 상륙작전에 함께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오징어 게임>을 탄생시킨 황동혁 감독이 푸른 빛깔이 어른거리는 물빛 풍경을 완성했다.
“솔직히 단 한 번도 패션쇼라는 행사에 가본 적이 없었다.” 루이 비통이 2023년 프리폴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서울을 찾았을 때,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잠수교라는 배경을 꾸미고 쇼 음악을 선택하는 등 쇼의 크리에이티브한 여러 아이디어가 그와 루이 비통의 협업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정작 황동혁에게 패션쇼는 낯선 미지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처음 제안받을 때는 너무 잘 모르는 분야라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쇼 장소가 내게 아주 친숙한 공간인 잠수교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과 흥미가 생겼다.”
디스토피아적 한국을 그려내 보인 황동혁이 잠수교에 이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50년 가까이 된 회색빛 다리는 외국인에게 사이버펑크 이미지의 전형에 가깝다. “잠수교는 이름 그대로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는 다리다. 잠수교가 물에 잠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다리를 건너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곤 했다. 잠수교 바닥과 기둥, 지붕에 물을시각화해 물에 잠긴 다리 위에 있는 기분을 주고 싶었다.” 황동혁은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과 물에서 그 이미지를 다리에 투영했다. “푸른 강물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파란 물그림자 영상으로 다리를 감싸려고 했다. 다리 바로 아래 흐르는 강물과 피날레에 뿜어져 나올 분수까지 함께 어우러지면서 물속에 잠긴 느낌으로 런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강이라는 장소도 매력적이었다. “한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해왔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는 한강의 남북으로 나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서울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한강을 찾는다. 서울 사람들이 마시는 식수도 모두 한강에서 취수한다. 한강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 그대로 생명 줄과 같은 강이다.”
한강과 잠수교라는 아이디어가 자리 잡자, 루이 비통과의 협업은 자연스러웠다.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유명한 시네필이다. 특히 그가 미래주의에 빠진 건 잘 알려져 있다. 황동혁에 대한 애정도 짐작할 만하다. “니콜라는 줌으로 처음 만났다. 매우 친절하고 열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견을 처음부터 주의 깊게 경청했고, 내가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던진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시각화해 다시 보여주며 피드백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음악선택에도 최대한 내 의견을 존중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서울 잠수교라는 공간적 특성과 어울리는 쇼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4월 29일 오후 8시 잠수교에서 그 묘한 풍경을 직접 목격한 이들을 울린 또 다른 감각은 청각이었다. 산울림과 펄 시스터즈와 농악, 프랑스 샹송이 이어지는 묘한 멜로디의 향연. “음악으로 사계절에 걸쳐 벌어지는 물과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쇼이기에 한국 음악을 여러 곡 사용했다. 김덕수패의 힘찬 호남 농악 첫머리로 쇼의 시작과 해빙된 강의 흐름을 표현했다. 또 잠수교가 개통되던 1970년대 말에 나온 산울림의 ‘아니 벌써’로 활기찬 봄기운과 함께 쇼를 열어젖혔다. 펄 시스터즈의 ‘첫사랑’도 봄빛을 표현하기 위해 선곡했다. 그리고 팝송과 루이 비통의 본고장 프랑스의 음악으로 시련과 격동의 여름을 표현했고, 아폴리네르의 육성으로 암송한 시 ‘미라보 다리’도 음악처럼 사용했다. 피날레는 ‘It is Accomplished’를 사용해 시련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표현했다.
그날 현장을 지킨 이들에게 놀라운 피날레 풍경만큼 인상적인 건 차가운 강바람이었다. 황동혁도 봄날 같지 않는 날씨가 걱정이었다. “하루 전날 밤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밤새 비를 보며 걱정했다. 당일 다리 위에서도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 상태로 제대로 워킹을 할 수 있을까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관객이 들어차고 쇼가 시작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모든 우려를 날려주는 순간이었다.”
직접 상상한 이야기를 화면 속 현실로 완성하는 영상 작업과 패션쇼 작업은 아주 다르게 다가왔다. “속으로 많이 떨었다. 날씨도 추웠지만 프로젝션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릴까? 쇼 시작부터 농악과 오래된 한국 팝을 사용했는데 관객의 반응은 어떨까, 걱정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쇼가 시작되고 조명이 바뀌며 니콜라의 옷을 입고 ‘아니 벌써’ 음악에 맞춰 걸어 나오는 정호연의 멋진 모습을 보고 ‘그래!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 비통과 황동혁 사이에는 정호연이 있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모델은 이제 루이 비통을 대표하는 앰배서더가 되었다. 그녀를 모델로 바라보는 경험은 감독에게 새로웠다. “호연이 배우가 되기 전 모델이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모델로 일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 눈앞을 지나가는 호연을 보면서 ‘우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평소 내가 알던 호연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모델 호연도 배우 호연만큼 멋진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푸른 분수가 쏟아져 나오고,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황동혁 감독이 꿈꾸던 그림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매체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영상 작업과 달리, 패션쇼는 우선 그 공간을 함께한 관객에게 감흥을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하지만 비슷한 지향점을 공유한다. “TV 시리즈나 영화도 많은 스태프의 협업으로 탄생한다. 내가 감독과 작가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긴 하지만 결국 내가 쓴 글을 화면으로 표현해내는 건 많은 배우와 스태프를 통해서다. 패션쇼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옷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옷을 선보이기 위한 다른 제반 요소는 많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의견 조율,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모든 노력이 하나로 합쳐질 때 멋진 쇼가 탄생한다는점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준비 중인 황동혁은 그 후 <KO 클럽>이라는 장편영화도 선보인다.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그는 오히려 루이 비통이라는 친구를 통해 신선한 환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서울이라는 익숙한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 역시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자극이 되었을 법하다. “서울은 600년이 넘는 동안 이 나라의 수도였고, 그만큼 오랜 역사와 풍요로운 문화, 사람들을 품어온 곳이다.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변화해왔고, 지금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이 도시가 또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서울은 나에게 우리 삶의 변화를 상징한다. 때로는 너무 빨라 두려울 정도인 인간 삶의 변화. 서울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시다. 그 변화가 가져올 미래도 다른 어느 곳보다 서울의 모습에서 미리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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