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 – ‘빨리 감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이란 책이 있다. OTT의 2배속 재생 기능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그게 아니면 유튜브에서 요약본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시청 형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연구까지 했다는 점이 신선했다. 책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나요? 영화 수입사 같은 곳에 종사하나요? 업무상 빨리, 많이 봐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왜?’ 영화를 빨리 보나요? 책에서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대화’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과 대화한다. 그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려면 지금 가장 핫한 콘텐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콘텐츠는 이미 너무 많고, 또 많이 제작된다. 그러니 빨리 많이 보기 위해서 ‘빨리 감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빨리 감기’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시청 형태를 가장 정확히 일컫는 용어는 ‘건너뛰기’다. 드라마의 경우 초반 1, 2회 정도는 그냥 보거나 빨리 보면서 캐릭터와 중심 사건, 그리고 캐릭터가 추구하는 목표 정도만 파악한 후 사건의 전개에 해당하는 부분을 건너뛰며 보는 것이다. 그래서 대사가 없는 장면,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장면, 주인공들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건너뛰는’ 부분이다. 작품을 만든 입장에서는 그런 시청이 아쉬울 것이다. 시청자가 건너뛴 그 장면에 인물의 감정과 배우의 연기가 도드라져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시청 형태라면 어쩔 수 없다. 모든 콘텐츠를 극장에서만 상영할 수도 없고, 이미 OTT 플랫폼에 있는 ‘2배속 재생’ 기능을 없앨 수도 없으며, 유튜브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역으로 지금의 시청 형태에 맞는 형식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 더 영리한 선택일 수도.
지난 5월 12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택배기사>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주요 인물의 서사가 빈약하고, 이들의 감정에 이입할 만한 에피소드가 부족했으며, 가장 어려워 보이는 미션은 제일 쉽게 진행됐다. 예를 들면 강유석이 연기하는 윤사월이 택배 기사가 되기 위해 벌이는 서바이벌 대결, 후반부 코어 구역 진입 장면 등이 그러했다. 사월이 돌연변이라는 설정과 빌런 류석(송승헌)의 숨겨진 사연 등은 줄거리 요약에 언급되는 정도로만 묘사됐다. 나와 비슷하게 <택배기사>를 감상한 사람은 이 작품을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만한 콘텐츠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택배기사>는 콘텐츠를 건너뛰어가며 보는 사람들에게 맞춰 제작된 게 아닐까? 이 개념으로 보면 <택배기사>가 대충 넘어간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건너뛰기’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사월이 택배 기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지, 그가 어떻게 택배 기사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5-8과 그의 조직이 천명의 코어 구역에 진입해서 악당을 처단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코어 구역에 진입하는가는 건너뛰어도 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후반부는 거대 권력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영웅이라는 익숙한 서사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전체적으로 SBS 드라마 <모범택시>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니 중요한 과정과 감정과 사연을 삭제하고 중요한 사건만 남겨놓는 건 오히려 <택배기사>의 장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는 ‘빨리 감기’로 보는 형태를 ‘감상’이 아닌 ‘소비’라고 정의한다. ’소비하는 콘텐츠’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지만, 넷플릭스는 여기에 가속페달을 밟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자체가 ‘소비’를 부추기는 하나의 패키지이기 때문이다. 먼저 어디에서나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원하는 장면만 볼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과 신선한 컨셉의 기획에 지금 가장 핫한 배우들을 참여시킨 콘텐츠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소셜미디어와 길거리,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하는 대규모 마케팅까지 더해지니 누구나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일단 손이 갈 수밖에 없다. <택배기사>는 심지어 스토리와 연출에서도 쉽고 빠른 소비를 유도하는 형식의 콘텐츠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나뉘지만, 호평과 혹평을 나누기 전에 <택배기사>에 대한 대화가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평점이 낮아도 다른 콘텐츠 못지않게 많은 대화를 이끌어낸다면, 그 또한 <택배기사>의 성공 지표일 것이다. 그만큼 많이 소비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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