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영화가 될 때
언제부터였을까. 6월 초면 무주를 찾는다. 무주에 처음 가보게 된 것도, 연중행사처럼 때마다 무주로 향하는 것도 전부 무주산골영화제 덕분이다. 영화 일을 하며 만난 인연 가운데 무주산골영화제로 이어진 사람들을 떠올리면 각별함이 있다. 환대하는 산골 극장의 스태프들, 짧은 바캉스에 오르기라도 하듯 들뜬 마음으로 무주로 함께 떠나곤 하는 영화 동료들, 영화를 기다리며 피정하듯 등나무 운동장—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2012)의 바로 그 운동장—에 모여 앉아 시원한 맥주와 볕을 나누던 친구들, 무주산골영화제가 발간하는 비평 책자 작업에 참여하며 만난 글을 쓰거나 번역하는 동료들, 산골 극장에서 같이 영화 보고 정담을 나눈 관객들. 영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가볼 생각조차 못했을 장소,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 알지 못했을 이야기, 세계. 영화가 우연처럼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듯하다. 그리고 또 영화가 홀연히 나를 어딘가로 데려갈 것만 같다.
6월 2일 개막하는 무주산골영화제의 ‘무주 셀렉트: 동시대 시네아스트’는 자신만의 영화 미학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해외의 감독 한 명을 선정해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고 관련 비평서를 내며 상영 후에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영국의 안드레아 아놀드,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 미국의 켈리 라이카트, 브라질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에 이어 올해는 프랑스의 미아 한센-러브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제가 펴내는 비평서 <삶의 진실을 탐구하는 사유의 시네아스트 미아 한센-러브>(2023, 무주산골문화재단)에 감독론을 싣게 돼, ‘느슨한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데뷔작 <모두 용서했습니다>(2007), <내 아이들의 아버지>(2009), <안녕, 첫사랑>(2011)과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 <다가오는 것들>(2016), <베르히만 아일랜드>(2022)에 이어 신작 <어느 멋진 아침>(2022)까지 한 호흡으로 미리 봤다. 이번에 처음 본 영화가 절반, 다시 본 영화가 또 절반 정도였는데 이렇게 함께 두고 보니 더욱더 미아 한센-러브라는 사람이 보이는 것만 같다.
“내 모든 영화에는 어떤 식으로든 자전적 요소가 있다. 전기적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얘기에서 상당 부분 영감을 받는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화상에 가장 가까운 게 아닐까.” -2023년 4월 <가디언>
프랑스 파리에 근거지를 둔 중산층, 이성애 중심의 가족, 철학적 담론과 멀지 않은 삶, 음악, 문학, 영화, 건축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예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충만한 상태. 거의 예외 없이 미아 한센-러브의 인물들은 이런 삶의 조건 위에 발붙이고 서 있다. 첫 번째 영어 영화로 스웨덴 포뢰섬을 배경으로 한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있지만, 이 역시 접근을 조금 달리했을 뿐 그 기저는 여타 영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것은 철학자인 부모와 DJ로 활동한 오빠가 있고 파리 태생에 철학을 공부하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비평을 쓰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연인이었고 현재는 새로운 사랑과 아이들이 있는 미아 한센-러브 개인의 삶의 조건과 많은 부분 공명한다. 이와 관련해서 감독은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를테면 <내 아이들의 아버지>는 초기 한센-러브의 멘토이자 영화 제작자 움베르트 발산의 자살의 그림자가 어른대고, <에덴: 로스트 인 뮤직>은 DJ인 오빠를, <다가오는 것들>은 철학자인 어머니를, <어느 멋진 아침>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그 영향 아래 만든 영화다.
그녀의 영화가 그녀의 현실의 정확한 판박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가족이나 연인과의 관계가 절대적인 누군가도 있다. 모든 영화가 그런 건 아니지만, 사는 것이 영화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미아 한센-러브는 그런 유의 사람이고, 그런 영화를 만들어왔다. 관계를 저버리지 못하고, 그로부터 출발해 영화로 들어서서 그 관계성으로 회귀해가는 사람, 사는 것과 다르지 않은 영화.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녀는, 영화는 그러했다.
그런 그녀는 <어느 멋진 아침>을 공개하고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내가 커다란 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데뷔작) <모두 용서했습니다>로 돌아온 게 아닐까. (…) 자전적 영화를 한 번 더 찍을 수 없는 데까지 온 것 같다. 이 사실이 두렵기도 하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이 그녀에게는 잠정적 완결이자 분기의 기로인 걸까. 그런 의미로 이 사람의 다음을 조금 다른 기대감으로 기다려봐도 좋을까. 삶이 그녀의 영화를 또 어디로 데려갈까.
비평서에는 이런 내용을 포함해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를 보며 주목한 몇 가지 지점에 관해 썼다. 그녀의 영화에 나온 인물들, 예컨대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에서 실패한 아버지들, 그런 아버지들과 절연하지 못한 채 뒤늦게라도 바라보려는 딸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이나 그림자에 압도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여자들을 주목해보고 싶었다. 이때 말하는 그녀들의 시간은 사랑이 끝난 이후의 시간이기도 하다. 첫사랑 설리번과의 질긴 인연을 뒤로한 카밀이 다시 현재의 연인 곁으로 돌아왔듯(<안녕, 첫사랑>), 크리스가 영화를 경유해 다시 사랑하는 가족을 품었듯(<베르히만 아일랜드>), 자신이 더는 급진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막 태어난 손주를 품에 안은 채 자장가를 읊조리던 나탈리가 그러했듯(<다가오는 것들>). 그녀들은 자기 앞의 삶에 얼마간은 타협하고 일정 부분은 수긍하며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 안고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에서 그것은 시간의 경과에서 오는 것 같다. 지나가고 흐르는 시간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삶의 지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계절과 빛의 변화, 장소의 이동이 한센-러브의 영화에서는 흘러가버린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모든 영화에서 이런 변화와 이동이 매번 시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아버지를 잃고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마을 전체가 정전되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별을 관찰하겠다고 하는데, 들뜬 순간도 잠시. 금세 다시 빛이 들어와 소동은 끝이 난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C’est la vie!” 이것이 인생이다. 미아 한센-러브는 이 오랜 관용구의 보편성을 자기 삶에서 찾고, 영화로 전해오는 게 아닐까.
* 비평서는 영화제 기간인 6월 2일부터 6일까지는 영화제 굿즈 숍에서, 영화제가 끝난 뒤에는 무주산골영화제 스마트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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