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할 뻔한, 뎀나의 이야기
발렌시아가를 일으켜 세우고, 거의 추락할 뻔하게 만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의 흥미진진한 드라마.
무색무취의 텅 빈 하얀색 공간. 사람들의 불안한 기침 소리가 파도처럼 연달아 이어졌다. 그날은 3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미사가 한창일 11시 30분이었다. 파리 패션 위크에서 언제나 발렌시아가의 시간이었던 그 시각, 발렌시아가 2023 가을 컬렉션 쇼를 보기 위해 수많은 에디터, 바이어, 여러 클라이언트, 미디어 관계자들이 루브르 박물관 아래의 동굴 같은 카루젤 드 루브르 몰에 몰려들어 있었다. 패션계는 이날을 발렌시아가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순간이라고 얘기했으며, <타임>은 “이번 시즌에서 가장 걱정되는 쇼”라고 했다. 발렌시아가는 어린이를 성적 맥락에 노출시키며 아동 학대를 묵인했다는 논란도 포함해, 지난해 12월 대중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일으켰던 말썽 많은 캠페인이 가져온 위기에서 회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날 쇼의 모든 좌석에는 발렌시아가 아트 디렉터 뎀나(Demna)의 메시지를 담은 하얀 카드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 몇 달 동안, 패션에 대한 저의 열정을 다시 타오르게 하기 위해 마음 둘 곳이 필요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그가 그동안 다트, 노치, 숄더 라인과 암홀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글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패션이 제게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옷을 만드는 예술로 여겨지게 된 이유입니다.”
이 위기를 맞기 전까지 뎀나는 패션계에서 엄청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디렉터 중 한 명이었다. 만약 패션이 엔터테인먼트였다면, 그는 스펙터클을 몰고 다니며 평단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던 P. T. 바넘(P. T. Barnum)이나, 발터 벤자민(Walter Benjamin)과 같았을 것이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1937년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세웠다. 뎀나는 2015년에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후, 선거운동 로고 같은 스타일의 발렌시아가 로고가 박힌 ‘Bern-lenciaga’ 맨투맨, 크록스 협업으로 제작된 채 ‘세상에서 가장 못난 신발’이라는 애정 어린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플랫폼 클로그처럼 위트 넘치는 아이템을 크게 히트시키며 CEO 세드릭 샤비트(Cédric Charbit)와 함께 기존 3억5,000달러 가치의 회사를 20억 달러 가치의 메가 브랜드로 키웠다. 그리고 2022년에는 <타임>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되었다. 그의 작업은 대중을 열광시킨 동시에 평론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50년간 중단된 발렌시아가 꾸뛰르를 부활시켰을 때 저널리스트 캐시 호린(Cathy Horyn)은 “그야말로 우주선을 새 궤도로 진입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만약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오버사이즈 코트에 투박한 운동화를 매치해본 적 있다면 간접적으로나마 뎀나가 만든 스타일을 입어본 셈이다.
뎀나의 쇼는 그의 디자인처럼 크고 괴상하고 강렬하면서도 시각적 충격과 비례해 어딘지 모르게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위트 넘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한번은 유럽 의회를 연상시키는 푸른 카펫이 깔린 쇼장에서 끈만 두른 모델들을 천천히 걸어 다니게 했고, 라텍스 보디수트를 입은 모델들을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활보하게 해 궁극의 페티시가 돈인지 섹스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 경쟁 브랜드가 앞다퉈 젠체하는 짧은 영상을 찍어내는 동안, 뎀나는 온라인 게임 ‘Afterworld: The Age of Tomorrow’를 주제로 흥미로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 후 <심슨 가족>의 크리에이터를 설득해 호머가 마지의 생일이 가까워졌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10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발룬…벌룬…발린…발렌시아가-가에게, 나 지금 큰일 났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그가 쓴 호머의 대사다.
“뎀나는 우리 모두가 생각만 하는 것들을 입 밖으로 내놓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패션 서치 엔진인 ‘Tagwalk’ 설립자 겸 CEO 알렉산드라 반 후트(Alexandra Van Houtte)가 내게 한 말이다. 2020 겨울 쇼에서는 런웨이 위로 물이 차오르는 동안 천장의 스크린에서 찌르레기들이 불길과 천둥, 거센 파도를 이겨내며 재잘거렸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지아 태생인 뎀나(1981년생)는 패션쇼장의 모든 의자를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된 티셔츠로 감쌌다(그는 2021년 개인적인 삶과 직업인의 삶을 구분하기 위해 그의 성인 바잘리아(Gvasalia)를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그의 성을 자꾸 잘못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 쇼는 거센 눈바람이 불어대는 디스토피아적 공간과 그곳을 쓸쓸하게 걷는 차갑고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줬다. 돌체앤가바나 같은 브랜드가 영원히 계속될 듯한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면, 발렌시아가는 끝나지 않는 겨울, 핵전쟁 이후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뎀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뉴스를 보는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제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냥 사무실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거든요.” 다른 디자이너들은 우리를 청나라와 벨 에포크 시대, 주나 반스(Djuna Barnes)의 레프트 뱅크 아파트나 탈리타 게티(Talitha Getty)의 마라케시 빌라로 데려간다. 하지만 뎀나는 다르다. 기꺼이 우리를 폭력이 만연한 세계로 데려가, 그 세계가 무너지는 동안 우리 기분을 나아지게 할 만한 옷이 어떤 건지 보여준다.
2022년 10월에 있었던 그의 ‘머드 쇼’는 이제 그가 그만두기로 맹세한, ‘패션테인먼트’ 세계의 화려한 볼거리의 정점을 보여준 쇼로 패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초대장은 가상의 인물 나탈리아 앤튠즈(Natalia Antunes)라는 여성의 개인적 흔적이 가득 담긴 너덜너덜한 지갑 형태였는데, 그녀의 헬스장 회원 카드, 신분증, 비건 슈퍼마켓의 구매 영수증 등이 들어 있었고, 가짜 동전까지 들어 있었다. 이 아이템이 가진 평범함은 앞다퉈 고급을 추구하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치열한 경쟁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뤘다. 초대장에 적힌 쇼장은 파리 교외에 있는 어느 대회장으로, 촌스러운 관광버스나 드나드는,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장소였다.
나에게 그 쇼는 발렌시아가 세계로의 첫 여행이었다. 나는 주차장에 모인 수많은 팬들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인종과 성별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발렌시아가의 유명한 앱솔루트 블랙 컬러로 된 뾰족 선글라스, 동글납작한 부츠, 큼지막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하퍼스 바자>는 1938년에 이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을 두고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처럼 보이는, 벨벳처럼 아주 어두운 스패니시 블랙으로, 일반적인 검은색을 회색처럼 보이게 하는 색”이라고 썼다). 관객은 브랜드 직원과 잘 구분이 가지 않았고, 직원은 또 경호원과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이는 경호원의 유니폼이 뎀나가 ‘코트 입은 폭력배’ 룩을 유행시킬 때 참고했기 때문이었다. 뎀나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그의 미적 감각을 두고 “쓰레기 같다” “끔찍하다” “한심스러울 만치 꼴사납다”라고 한들 그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말이다. 뭐가 됐든 발렌시아가 옆에 있으면 다 시시해 보였으니까.
쇼장에 들어서자 악취가 진동했다. 아티스트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가 타원형 구덩이를 만들 때 이용하던 습지에서 퍼온 275m³ 용량의 진흙에서 나는 냄새였다. 손님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자기 좌석을 찾아야 했고, 신발이며 구두에 진흙이 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귀에 거슬리는 강렬하고 반복적인 전자음악이었다(뎀나의 남편이자 BFRND로 알려진 뮤지션 로익 고메즈(Loïk Gomez)가 발렌시아가의 모든 쇼 사운드트랙을 작곡했다). 이어서 모델들이 줄지어 나와 전투사들처럼 진흙 가득한 트랙을 돌았다. 모델들은 이마에 상처가 나 있거나 뺨에서 뾰족한 보형물이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입에 마우스피스를 낀 경우도 있었다.
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룩은 일반인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숨이 죽어 납작해진 점퍼, 낡아빠진 청바지, 낡은 핸드백으로 기운 가죽 재킷, 후드 티와 헐렁한 탭 팬츠, 이 모든 것이 너무 후줄근한 나머지 모델들의 앙상한 다리에 올라온 닭살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모델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온 완벽한 외모가 아니었으며, 서른 살 넘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민투 베살라(Minttu Vesala)라는 이름의 핀란드 출신 모델이 선보인 구부정하고 괴팍한 걸음걸이는 틱톡에서 ‘발렌시아가 워킹’이라는 패러디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자 모델들은 체스트 캐리어에 사람처럼 생긴 인형을 담고 있었다. 뒤쪽엔 발렌시아가, 앞쪽엔 베이비뵨(BabyBjörn) 제품이었다. 팔을 완전히 집어넣게 디자인한 백과 사람이 하나가 된 토트백도 등장했다. 뎀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쇼 무대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비유예요.”
<젠틀우먼> 편집장 페니 마틴(Penny Martin)에게 그 쇼는 “지하에서 뭔가 멋진 것이 발굴되자마자 순식간에 그것이 대중문화로 주입된 과정”을 의미했다. 쇼의 ‘노스페라투식 모더니즘’을 칭송한 평론가가 있는 반면, 다른 평론가들은 이를 영화 <쥬랜더>에서 푸들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디자이너 자코빔 무가투(Jacobim Mugatu)가 ‘이 멋진 도시를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노숙자, 부랑자, 약쟁이 창녀들’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디렐릭트(Derelicte)라는 이름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장면에 비유했다. 쇼가 끝난 후로도 며칠 동안 내 머리카락과 옷에서 습지의 악취가 빠지지 않았다(발렌시아가 쪽에서 조향사 시셀 톨라스(Sissel Tolaas)에게 진흙의 자연스러운 냄새를 증폭시켜달라고 의뢰했다).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꽤 영리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냄새가 발을 들인 모든 이를 오염시키는 패션계에 대한 논평처럼 느껴졌으니까.
카루젤 드 루브르에서 있었던 쇼의 조용한 분위기는 뎀나가 자신이 마스터하고 화려한 세계를 떠났음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발렌시아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쇼가 열리는 장소를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캠페인으로 인한 논란이 고조되고 있었던 지난해 12월 뎀나는 취리히에서 몸을 사리는 중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그곳에 칩거했다. 그는 재봉틀을 꺼내 계속 바지를 만들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가졌다고 언론에 말했다.
쇼가 시작되기 전, 뎀마는 나와 나눈 대화에서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마음을 비쳤다. 그때의 논란을 그가 나아갈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바꾸게 한 계기로 보고 있었다. “이 하우스를 위한 저의 혁신을 3~4년 정도 가속화했어요.” 전에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걸 좋아했지만 선동가 역할이 벌써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말 그 모든 난리를 겪고 나니, 어느 날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디자이너로서 더 성숙해지기 위해 또다시 한두 해를 더 기다릴 필요는 없겠다고요.” 이제 그는 소동 말고 재봉을, 분탕질 말고 바느질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어찌 보면 궁여지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극적 연출이 그의 작업을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은 영민한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머드 쇼에서 그 압도적 분위기로 인해 옷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뎀나 역시 쇼가 끝난 뒤 “기분이 더러웠다”고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카루젤 드 루브르 쇼의 초대장은 재킷 패턴이었다. 그대로 재단사에게 들고 가면 발렌시아가 디자인의 블레이저를 하나 만들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런웨이는 패션 하우스가 시제품을 만들 때 사용하는 담갈색 모슬린 소재로 도배되어 있었다. 분명 그의 마음에 들어선 겸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뎀나는 2022년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봉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죠. 패션 스캔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요”라고 말하며 런웨이에 내보낸, 커다란 쓰레기봉투처럼 생긴 1,800달러짜리 송아지 가죽 자루 같은 홍보성 아이템은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패션의 기본으로 되돌아가 심플한 면직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제가 패션 디자이너로 사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만약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재봉사로 살고 있었을 거예요.”
음악이 시작됐다. 피아노와 기타만으로 연주된 소박한 멜로디였다. 맨 처음 등장한 인물은 쭉 뎀나의 뮤즈였던, 긴 팔다리에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국인 화가 엘리자 더글러스(Eliza Douglas)였다. 늘 그렇듯 긴 생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그녀는 검은색 더블 브레스트 수트를 입고 나타났다. 뎀나의 습관대로 수트의 소맷단은 그녀의 손끝을 넘길 만큼 길었다. 바지에 덧댄 긴 천은 바지와 치마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엘리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예배복처럼 펄럭였다. 계속 트롱프뢰유 디자인이 등장했다. 한 트렌치 코트의 위아래로 뒤집힌 허리끈은 요크를 이뤘다. 뎀나가 그나마 과감함을 드러낸 부분은 운동선수들이 다치지 않도록 고안된 기술을 사용해 모터사이클 재킷과 후디를 부풀린 것이었다. 등이 굽어 보이고 목이 없는 듯한 과장된 디자인은 만화적인 느낌이 충만했지만,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볼륨감 넘치는 실루엣이라는 전통에 기반했다. 또 우리를 사정없이 무너뜨리고도 남을 세상에 대한 보호막을 암시하면서,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다(브랜드 정체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방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어깨가 강조된 이브닝 가운은 그야말로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뎀나는 안도하는 듯 보였다. “쇼가 시작되기도 전에 빨리 끝나길 바랐어요!” 그가 눈썹을 쓸며 말했다. 분명 이 쇼는 분방하거나 획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기술적인 솜씨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라는 걸 잘 보여줬다. “자기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걸 그대로 실현했어요. 옷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죠.”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 패션 뮤지엄의 관장 미렌 아르살루스(Miren Arzalluz)의 말이다. 쇼 다음 날 나온 언론의 반응은 이를 그대로 확인시켰다. 이 패션계에서 그는 여전히 경쟁력 있는 디자이너라는 걸 말이다. 지나치게 안전한 길을 택했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옷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는 여전히 대담함이 엿보였다. 그는 같은 모델들, 전형적인 그만의 실루엣, 비슷한 프린트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아이디어와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커리어를 다시 쌓기 위해 일관성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아리 루옌딕 주니어(Arie Luyendyk, Jr.)와 로렌 루옌딕(Lauren Luyendyk)은 그들의 세 아이 알레시(3세), 세나와 럭스(21개월 된 쌍둥이)와 함께 살고 있는 애리조나 스코츠데일의 현대식 농가 푸른 안뜰에서 운동화를 불태우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다. 그것은 발렌시아가의 베스트셀러로 소비자가가 900달러가 넘어가는 스피드러너, 즉 ‘테크-니트 하이브리드 운동화’였다. 날렵한 디자인에 하얀색, 울퉁불퉁한 폼 소재 밑창이 달린 모델이다. 양말이나 스쿠버 부츠처럼 생긴 이 신발을 감싸는 푹신한 밑창은 신은 사람들에 의하면 마시멜로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로렌 루옌딕은 부젓가락으로 불타는 운동화를 집어 들고 있었고, 남편 아리 루옌딕은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녀는 운동화를 쥐의 사체를 버리듯 커다란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그 커플이 12월 1일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비디오에서 불타는 쓰레기통 위로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 피스 사인을 해 보였다. 그리고 “잘 가, 발렌시아가”라고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이는 그 커플에게 “이 세상의 진정한 악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댓글을 남기며 그들을 치켜세웠다.
루옌딕 부부는 이전에 딱히 도덕적인 리더십을 갖춘 걸로 알려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리 루옌딕은 리얼리티 쇼 <The Bachelor> 22번째 시즌에 출연해 볼링공을 핥았고, 그를 가장 흥분시키는 것은 ‘흥분’이라고 말했으며, 로렌과 결혼하기 전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고는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는 TV 쇼에서 차버린 인물이다. 이 부부는 영상을 올리기 일주일 전에 공개된 발렌시아가 광고 캠페인에 대해 분노했다. 첫 캠페인은 11월 16일에 나온 것으로, 홀리데이 아이템을 모아 기프트 숍 컨셉으로 찍은 화보였다. 발렌시아가는 저명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가브리엘레 갈림베르티(Gabriele Galimberti)를 고용해 이 화보를 촬영했다. 갈림베르티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불도저 장난감, 레고 블록, 스테고사우루스 공룡 인형 등의 장난감을 늘어놓은 58개국 어린이들을 찍은 <토이 스토리> 같은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이 ‘기프트 숍’ 광고 역시 자신의 수집품을 늘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을 찍은 것으로, 다만 이 수집품이 장난감이 아니라 발렌시아가 상품이라는 점이 다르다.
갈림베르티의 다큐 사진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접근 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었지만, 광고에서는 어린아이가 세트장 같은 침실에서, 어른들의 액세서리에 둘러싸인 모습이 그저 이상하게만 보였다. 어느 화보에서 어린 소녀가 가죽 하니스가 채워진 곰 인형 모양의 가방을 끌어안고 열린 창 앞에 서 있는데, 그 주위로 발렌시아가의 주얼리, 코스터, 강아지용 접시, 와인 잔, 샴페인 잔, 가짜 발렌시아가 맥주 캔 안에 꽂힌 양초와 같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또 다른 화보에서는 웃음기 없는 어린이 모델이 검은색 옷을 입고, 목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망사로 된 옷을 입은 곰돌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 화보의 전반적 분위기는 불편했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공개되자마자 대중의 분노를 산 건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에 “발렌시아가에서 새롭게 출시한 오브젝트 라인은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라고 언급한 라이프스타일 웹사이트도 있었다. “하나씩 다 살게요”라고 했던가.
11월 21일, 발렌시아가는 럭셔리 베이식 라인인 가드 로브(Garde-Robe)를 홍보하는 개별적인 광고를 하나 더 공개했다. 화보에는 벨라 하디드와 니콜 키드먼 같은 셀러브리티들이 유리로 된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검은 가죽 핸드백은 서류와 서류철로 어지럽힌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류를 확대한 인터넷 탐정단은 그것 중 하나가 2008년의 ‘미국 대 윌리엄스(U.S. v. Williams)’ 사건에 대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문인 것을 밝혀냈는데, 이 사건은 원고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들먹이며 아동 포르노에 대한 유죄 판결을 번복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준 니콜 라핀(June Nicole Lapine)이라는 논란 많은 유튜버는 자신이 운영하는 트위터 계정 @shoeØnhead에 이런 글을 올렸다. “아주 의도적으로, 별로 감출 생각도 없이 심어 넣은 ‘가상 아동 포르노’ 관련 법원 문서.” 화보 배경이었던 사무실 장식에서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피에 뒤덮인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그림을 그렸던 벨기에 아티스트의 책이 소품으로 쓰인 것이 문제가 됐다. 또 다른 사진에서는 대학 졸업 증서에 존 필립 피셔(John Phillip Fisher)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손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동명의 미시간 출신 남자에 대한 2018년 기사를 떠올렸다.
그들은 세상에 바이오 엔지니어링 부서장이나 농부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수백 명의 무고한 존 필립 피셔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건이 아동 포르노 범법자들에 대한 것이지 그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무시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근거로 비난을 이어갔다.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에게는 한 화보에서 아동 포르노 사건에 관련된 소품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발렌시아가를 저주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구토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자기들의 악의 세계를 숨기는 데 점점 실수가 잦아지는군”이라고 올라온 댓글도 있었다. 어떤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은 일루미나티, 렙틸리언, 악마 숭배의 음모론에 관련된 숨겨진 암시를 더 찾아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머지않아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 이를 폭스 뉴스에 내보냈다. 그는 발렌시아가를 “면 맨투맨 하나를 1,500달러에 판매한 럭셔리 브랜드”라 언급하며, 얼마 전 공개한 그 광고 캠페인이 혐오감을 자아낸다고 말했다. 또 “광고의 셀링 포인트는 어린이들과의 섹스”라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화보를 보고 패션 브랜드가 독특해 보이려고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칼슨처럼 이를 퇴폐적이고 좌파적 소아 성애 숭배라고 주장하며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 스캔들부터 ‘의사들이 건강한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잘라내는 현실’까지 연결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언론이 이 논란을 미국에서 벌어지는 젠더 정치에 관한 큰 규모의 문화 전쟁으로까지 확장하자, 컨트리 가수 제이슨 알딘(Jason Aldean)의 아내로 트럼프 지지자 겸 성전환 반대자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브리트니 알딘(Brittany Aldean) 같은 열성적 논쟁가까지 이에 자극을 받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내슈빌에 있는 저택에서 자신의 발렌시아가 제품을 비닐봉지에 담은 사진을 찍어 올리며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고 언급했다.
지난날 뎀나는 비판에 정면으로 대응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발렌시아가와 발렌시아가로 오기 전 그가 만들던 베트멍 시절에 지나치게 백인 모델들을 많이 쓴다는 비판을 받은 후, 다양한 인종을 모델로 캐스팅했다. 비평가들이 그가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디자인을 차용했다고 비난하자 그는 ‘The Elephant in the Room(다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이라는 제목으로 마르지엘라에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대응이 좀 느렸다. 초기 사과문에서 발렌시아가는 “화보 세트를 만들고 승인되지 않은 소품을 사용한 업체”에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오히려 논란을 더 부추길 뿐이었다(결국 발렌시아가는 2,500만 달러 상당의 소송을 취하했다). 런던에서는 어떤 사람이 발렌시아가 부티크 쇼윈도에 ‘PAEDOPHILIA(소아 성애자들)’라는 메시지를 붙였다. 베벌리힐스에서는 공공 기물 파괴범들이 발렌시아가 스토어에 학대받은 어린이들을 표현한 낙서를 그려놓았다. 이 일이 있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발렌시아가 추종자들은 뎀나의 천재성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며 그를 칭송하기 바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뎀나에게 연락하는 사람들은 오직 두 사람 ‘안나 윈투어와 나’뿐이었다고 패션 평론가이자 작가 소피 퐁타넬(Sophie Fontanel)이 내게 말했다. 발렌시아가의 앰배서더이자 골수팬으로 한때 온몸에 발렌시아가 포장 테이프만 둘둘 감고 행사장에 나타나기까지 했던 킴 카다시안은 발렌시아가와의 관계를 ‘재고 중’이라 밝혔다. 패션 관련 웹사이트 ‘BoF’ 설립자 겸 CEO 임란 아메드(Imran Amed)는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이 정도 스캔들은 2011년 존 갈리아노의 유대인에 대한 격분과 2018년 돌체앤가바나의 중국 비하 정도밖에 없다고 내게 말했다.
이 논란은 전례 없는 것이었지만, 아주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발렌시아가는 도발적인 행보로 명성을 쌓아왔다. 지난해 초 뎀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쓰레기봉투 가방은 ‘절대 열지 마시오’라고 쓰인 상자 같은 거였어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제가 그걸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금기를 싫어하거든요.” 많은 사람이 그 광고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제작한 것으로, 패션계의 황당하고 멍청한 기행의 역사에 당당히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만한 거라 여겼다. (미국 법무부로 하여금 아동 포르노 제작 의혹으로 브랜드를 조사하게 만들었던 캘빈 클라인의 외설적인 오락실 광고, 톰 포드의 구찌 로고 모양으로 만든 음모가 등장한 광고를 기억하는지.)
아무리 한계를 시험하는 걸 즐기는 브랜드였다고는 하지만, 그 광고 논란이 불거지기 몇 개월 전까지 발렌시아가는 대담함과 어리석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뎀나는 머드 쇼를 위해 파격적인 모델들을 기용했다. 이제는 ‘Y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의 친구 카니예 웨스트는 거대한 완전무장 군복을 입고 런웨이를 쿵쾅대며 걸었다. 예는 뎀나의 베트멍 시절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를 열렬히 지지해왔다. 발렌시아가의 모회사 케어링이 발렌시아가의 새 디렉터로 뎀나를 임명한 직후, 예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려 뎀나의 명성을 드높였다. “내가 뎀나를 발렌시아가에서 훔쳐올 거야.” 예가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자신의 고객 계정 스크린샷에 따르면, 그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1년 동안 발렌시아가에 400만 달러 이상을 써 브랜드의 중요 고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이 두 남자는 서로 친분을 쌓고 열띤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뎀나는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 관계를 두고 ‘아주 강렬한 창의적 교류’라고 언급했다. 뎀나는 예의 프로젝트에 관해 함께 논의하는 사이가 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는 스스로를 뎀나의 ‘이성애자 남편’이라고 했다. 이들은 계속 하나의 이름처럼 불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머드 쇼가 열린 지 48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 예는 ‘White Lives Matter(백인의 삶은 중요하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 이지(Yeezy) 시즌 9 컬렉션을 공개했다. 뎀나와 발렌시아가의 CEO 세드릭 샤비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예와 거리를 둔 반면에, 발렌시아가는 그저 함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예가 반유대적 감정을 내비치는 글을 여러 차례 올리는 동안에도 발렌시아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예가 팟캐스트에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는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으며, ‘유대인 미디어’가 그에게 해코지한 것이라고 발언한 후에야 발렌시아가는 “앞으로 이 아티스트와 어떤 관계도 이어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프로젝트도 함께 할 계획이 없다”며 공개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 이 상황은 대중문화에서 가장 불안정한 부분에 대한 위험성을 드러냈다. 또 발렌시아가가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 집중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이 너무 자만한 것 같아요. 옷에서 아주 멀어져버린 거죠.” 어느 패션 경영인의 말이다.
광고로 불거진 논란은 그간 있어온 여러 논란으로 아슬아슬했던 브랜드를 마침내 터뜨려버린 기폭제였다. 지난 몇 해 동안 발렌시아가는 분기별로 패션 브랜드의 호감도 순위를 집계하는 리스트 인덱스(Lyst Index)에서 최상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난해 3분기에는 업계에서 네 번째로 인기 높은 브랜드였다. 하지만 광고 논란 이후, 2017년이래 처음으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지난 2월 케어링이 공개한 최신 수익 보고서에 따르면 발렌시아가는 ‘힘겨운 12월’을 보냈다. 케어링은 발렌시아가의 개별 실적은 밝히지 않고, 다만 다른 브랜드와 묶어 전반적으로 4분기 수익이 4% 감소했다고 밝혔다. 케어링 회장이자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François-Henri Pinault)는 수익 결산 회의에서 ‘명확한 판단 미스’라는 말로 유감의 뜻을 내비쳤다. 그는 뎀나와 샤비트를 옹호하면서 “사람들에겐 실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케어링은 그 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만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뎀나와 발렌시아가는 문제가 된 광고에 대해 거듭 사과했다. 발렌시아가는 미국의 아동복지 재단인 ‘내셔널 칠드런스 얼라이언스(National Children’s Alliance)’에 3년간 후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샤비트는 이 후원을 ‘수백만 달러 상당의 기부’라고 언급했지만, 브랜드가 돈을 주고 곤경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다며 액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꺼렸다.) 발렌시아가는 가드 로브 캠페인에 등장한 미심쩍은 소품에 대해 솔직하게 해명했다. 그 서류는 그냥 소품 대여 회사에서 빌려온 아무 의미 없는 서류였으며, 아동 포르노나 아동 학대에 관련될 만한 어떤 것도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화보 세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좀 더 철저히 검토해야 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나는 이 회사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의뢰한 조사 결과를 담은 1월 6일 자 보고서의 사본을 보게 되었다. 가드 로브 캠페인의 문제가 된 세트 소품 출처에 대해서는 그저 황당한 추측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바로 “TV 쇼 <Law & Order> 촬영에 쓰인 소품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뎀나는 <보그> 인터뷰에서 기프트 숍 광고에 사용된 곰 인형 가방은 “절대 BDSM을 표방하려던 것이 아니라, 펑크와 DIY 문화에 대한 레퍼런스였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해당 캠페인이 잘못 기획된 거라는 건 인정했다. “이 소품을 어린이와 함께 화보 이미지로 제작했을 때 얼마나 부적절하게 보일지 깨닫지 못했어요. 유감스럽게도 저의 잘못된 아이디어와 그릇된 결정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원래 의도한 메시지가 뭔지 물었다. 그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어요. 그보다는 그저 하나의 해결책이었죠”라고 답했다. 갈림베르티는 그가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사진가였고, 당시 광고해야 할 제품이 너무 많아서 현실적인 이유로 그 프로젝트가 그와 함께 작업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제게는 그 화면 구성과 홍보해야 할 많은 제품을 한 이미지에 다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어요.” 내부 보고 자료에 따르면, 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그 캠페인의 공개를 승인했다. 그중 단 한 명만 우려를 제기했는데, 그것도 “어린이와 검은색 아이템, 박쥐 같은 센 이미지의 제품을 함께 놓는다는 것이 다소 음침해 보인다”는 이메일을 보낸 게 다였고, 곰 인형 가방은 아예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뎀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화보의 그런 기분 나쁜 측면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명확하게 알게 됐죠. 프랑스에 이런 말이 있어요. ‘Je pense tellement pas au mal que je vois pas le mal(나쁜 생각을 너무 하지 않은 나머지, 나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제가 그 일을 멍청한 실수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이른바 럭셔리 패션계 어둠의 군주라는 그는 41세의 채식주의자로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며 퐁뒤의 나라 스위스에서 남편과 함께 쿠키와 치키타라는 이름의 치와와 두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다. 7개 국어를 할 줄 알고(조지아어, 독일어, 플라망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 박사를 존경하며(최근 그녀의 팟캐스트를 통해 그의 현재 감정을 ‘비통함’과 ‘경외감’으로 정의하는 걸 배웠다), 내적 평화를 위한 앱을 켜놓고 명상을 하며 아침을 시작한다(그가 헤드폰을 벗는 즉시 강아지들이 그에게 뛰어든다). 옷을 만드는 일 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요리다. 가장 자신 있는 요리는 식물성 고기로 만든 힌칼리(Khinkali) 만두로, 그에게 “남자가 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말해온 부모님에게마저 나쁘지 않다는 소리를 들은 맛이라고 전한다. 그는 대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외톨이, 심지어 ‘루저’라고 여긴다(그는 “제게는 친구가 아마 두 명뿐일걸요”라고 말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핀스타(인스타그램 부계정)를 쓰는 그가 팔로우하는 건 ‘별난 할머니들’과 ‘이상한 유럽 지도’뿐이다.
뎀나는 그가 한때 ‘그 어마어마했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국가’라고 묘사한 나라인 소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람(Guram)은 조지아 출신이다. 차 정비공이었던 그는 개조한 자동차를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엘비라(Elvira)는 러시아 사람으로 가정주부였다. 그들은 흑해 연안의 휴양지 수후미(Sukhumi)라는 곳에서 뎀나와 뎀나의 남동생 구람을 키웠다(아버지와 남동생 이름이 같다). 뎀나의 가족은 3층짜리 건물에서 친할머니, 삼촌들, 사촌들과 시끌벅적하게 함께 살아서 사생활이나 혼자 있는 시간, 개인 소유물은 집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뎀나 것이 그들 것이었고, 그들 것이 뎀나 것이었다. 뎀나는 농담 식으로 가족 중에 가장 옷을 잘 입는 사람은 그날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뎀나는 이것저것 만들기 좋아했던 아버지가 암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차고에서 미국 스타일의 티셔츠와 운동화를 만들 때 나던 잉크젯 프린터와 접착제 냄새를 기억한다. “당연히 소련에서 구할 수 있는 요소를 사용해야 했죠. 그래서 미키 마우스 대신, 러시아 버전의 미키 마우스를 썼어요.”
뎀나가 맨 처음 갖고 싶었던 물건은 줄자였다. 십자수를 하고 싶은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밖에 나가 공을 차며 놀기를 바랐다.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부모님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기억한다. “부모님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며, 진짜 제 모습을 몰라준다는 식으로 썼어요.” 그는 부모님이 그 편지에 대해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좀 슬퍼진다고 말한다. “부모님은 그걸 보고 귀엽다고 여기셨어요. 다들 제 편지를 보고 웃으면서 ‘이것 좀 봐. 당연히 우리는 뎀나를 사랑하지. 근데 얘가 뭘 알겠어’라면서 주위 분들께 보여줬죠. 하지만 그건 부모로서 성숙한 반응은 아니었다고 봐요. 제가 겪은 건 그렇게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었고, 전 그때 상당히 힘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다르게 반응했더라면, 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훨씬 많은 도움이 됐을 거예요.”
학창 시절 뎀나는 양말이 드러나 보이도록 바지 길이를 줄여서 입고 다녔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전파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그의 부모님을 질책했다. 뎀나는 소련 청년 전위대(Young Pioneers)의 일원으로서 빨간 네커치프를 하고 다녀야 했다. 규칙에 순응해야 하는 억압적인 상황과 네커치프의 촌스러움에 짜증이 났다. 그는 ‘첫 번째 개념적 패션 반달리즘 행위’로서 옷에 소련 록 밴드 키노(Kino)의 ‘Blood Type’ 가사를 검은색 마커로 휘갈겨 썼다(“My blood type, on my sleeve(내 소매에 적힌 혈액형)/ My service number, on my sleeve(내 소매에 적힌 군번)/ Wish me luck in battle!(전쟁에서 내 명복을 빌어다오!)”). 소련의 몰락은 여러 자극의 대혼란을 일으켰다.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기 어려웠고, 매력과 경멸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뎀나는 어느 잡지에 이렇게 말했다. “콜라 캔을 생전 처음 봤던 때가 기억나요. 핵폭탄인 줄 알았다니까요.”
1992년 러시아를 등에 업은 압하스(Abkhaz) 분리주의자들이 수후미를 침공했다. 당시 열 살이던 뎀나는 거의 매일 밤을 이웃집 다락에서 가족과 숨어서 보냈다. 결국 뎀나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됐다. 조지아 소수민족을 향한 집단 학살이 한창이던 1993년 가을, 뎀나의 가족은 그곳에서 도망쳤다. 뎀나는 그들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붙잡히느니 아버지가 온 가족을 죽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족은 캅카스산맥을 따라 거의 300마일 가까이 걸어 이동한 뒤, 사람들로 가득한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트빌리시(Tbilisi)에 정착했다.
뎀나는 2022년 겨울 컬렉션 쇼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1993년부터 내게 남아 있는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보도 자료에 썼다. 쇼는 뎀나가 침울한 목소리로 우크라이나 시인 올렉산드르 올레스(Oleksandr Oles)의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소지품을 바닥에 질질 끌며 나타난 모델들은 무대에 눈보라가 불어닥치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않고 굳건히 전진했다. 음울한 피아노 연주곡은 점차 강렬한 테크노 음악으로 바뀌어갔다. 뎀나가 이 프레젠테이션을 계획한 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이었지만, 그의 예상이 소름 끼치게 적중해 무대는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던 현실의 축소판이 되어버렸다. 킴 카다시안, 에이셉 퍼그, 미세스 다웃파이어 흉내를 낸 사람이 참석한 쇼는 호화로움과 사치는 누구의 목숨도 구해내지 못할 거란 것을 시사했다. 쇼는 가슴 시리게 아름다웠다. 마지막을 장식한 짙은 청색 드레스의 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까지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패션은 그 현실의 반영입니다.” 뎀나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번 쇼가 공포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면, 제 계획대로 된 거예요.”
트빌리시에서 뎀나는 물려받은 옷가지와 남들이 버린 헌 옷을 입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몇 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을 만큼 큰 옷을 사줬다. 그 오버사이즈 핏이 청소년이 된 그의 손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털을 가려줄 수 있어서 그는 만족했다. 그는 자기표현과 자기방어가 시작되던 그 시기를 기리기 위해 현재까지도 소매가 상당히 긴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 차림으로 다닌다. 뎀나처럼 패션의 자기보호적 측면을 깊이 파고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옷은 무서운 느낌을 주지만, 겁에 질린 느낌도 있다. 어떤 이들이 냉소적이라고 해석하는 그의 작업적 경향은 개인적이며 고통을 여실히 드러낸다. 뎀나는 사진가 세실 비튼(Cecil Beaton)이 말하는 패션 개인주의자(남들 시선이나 옷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사람)로, ‘발판 사다리나 라탄 바구니’에도 의미를 담아낼 줄 안다. 그의 작업은 트빌리시, 조지아 혹은 그 어느 곳이라도 창의적 상상에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은 탈리타 게티보다 더 말이다.
뎀나가 21세가 되던 해, 그와 가족은 뒤셀도르프로 이사했다. 그 후 조지아에 다시 가보지는 못했지만, 늘 조지아 문화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고 말하며 그것을 종종 작업에 반영했다. 베트멍 2019 봄 컬렉션에는 ‘가족과 전쟁’에 대한 복합적 감정이 잘 드러난다. 서명과 낙서로 뒤덮인 하얀 셔츠는 조지아 고교 졸업식 전통을 반영했고, 살색의 몸에 딱 맞는 튜닉에 새겨진 타투는 소련 붕괴 후 갱스터들이 선호하던 것이다. 컬렉션의 모든 옷에는 QR 코드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걸 스캔하면 ‘압하스에서 일어난 조지아인 인종 청소’에 대한 위키피디아 글이 뜨게 되어 있었다. 뎀나는 게이 남성으로서 조지아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살았다. 가족 중에서도 그의 성 정체성을 두고 가문의 수치로 여긴 사람이 있을 정도다. 지난해에 트빌리시 시장이 그를 명예시민으로 임명했을 때, 정교회의 한 집사는 이 명예시민 상을 규탄하면서 뎀나를 “스스로 남색자라 밝히고 나선 뎀나 바잘리아”라고 칭하며 강하게 비난했다.
바잘리아 가족은 뒤셀도르프의 이민자 캠프에서 3개월을 보냈다. 이미 독일어를 할 줄 알았던 뎀나는 가족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하드코어’한 관료 체계를 겪어본 그때의 경험은 계급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재킷, 모자, 완장, 부츠, 배지, 패치 같은 ‘사회학적 유니폼’에 대한 관심을 형성하는 기틀이 되었다. 어쩌면 그 관심은 아에로플로트(Aeroflot, 소련 항공)의 기장이었던 할아버지와 공항 직원이었던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정말 공항에 밀접한 삶을 사셨어요.” 그가 회상했다. 언젠가 <보그>는 뎀나를 ‘패션의 CCTV 혹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드론’이라고 부른 적 있다. 뎀나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 아트를 존경하지만, 그에게는 일상적 인간 군상을 기록한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날카로운 관찰자의 측면이 엿보인다. 뎀나가 코트 안쪽에 덧댄 길쭉한 주머니의 존재를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 주머니에 대해 그는 우연히 본, 와인병을 든 채로 더듬더듬 문을 열려고 하는 파티광들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바잘리아 가족이 뒤셀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뎀나는 이미 트빌리시주립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 학위를 딴 상태였다. 부모님은 그가 독일 은행에 취직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뎀나는 패션이란 부잣집 딸들을 위한 일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가난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날 제가 앞으로 경제 분야에서 일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힌 적 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건 오로지 옷을 만들고, 패션을 통해 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뿐이었어요.”
뎀나는 학비가 비교적 저렴하지만 학습량이 엄청난 것으로 정평이 난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의 패션 스쿨에 지원했다. 입학 면접시험에서 누군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물었고, 그는 마지막으로 매장 진열대에서 본 이름이 떠올라 드리스 반 노튼이라고 대답했다. 운 좋게도, 반 노튼은 1980년대 그 학교를 졸업한 유수의 디자이너 모임인 앤트워프 식스의 일원이었다. 뎀나는 합격했다.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와, 정말 대단하다!’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어요”라고 오랫동안 그곳의 학장이었던 린다 로파(Linda Loppa)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됐죠. 호기심이 가득한 데다 열린 마음의 겸손한 자세로 배워나갔으니까요.” 학생들은 스케치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뎀나는 자연스럽게 마네킹에 옷감을 둘러가며 입체적 접근으로 작업했다. 옷이 가진 추상적 영감보다 옷 자체에 더 신경 썼다. 그는 패션 스쿨 시절을 ‘마트에서 산 싸구려 재봉틀의 바늘을 부러뜨리고, 싸구려 레드 와인을 마시며, 줄담배를 피우고, 시끄러운 음악을 듣던’ 성장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2학년 때는 아무도 모르게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열린 장기 자랑 대회에 나가 맞춤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여 1등을 한 적도 있다. 그는 그 시절 동급생, 강사들과 아직까지 친하게 지낸다. 그는 발렌시아가 51번째 오뜨 꾸뛰르 컬렉션을 디자인하면서 자신의 드로잉 강사였던 이본 드콕(Yvonne Dekock)에게 패션 스쿨 재학 시절 그녀가 입었던 걸로 기억하는 옷을 본뜬 검은색 플리세 드레스 한 벌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러면서 뎀나가 이런 말을 했다고 그녀는 기억한다. “그는 ‘이제 예전 모습 같군요. 학교에서 선생님을 뵈었을 때 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뎀나는 그의 교수이자 앤트워프 식스의 일원인 월터 반 베이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 밑에서 2년간 일한 후, 왕립예술학교 졸업생 중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동명의 브랜드에 지원했다. 마르지엘라 하우스가 시작된 1988년 이래, 마르지엘라는 아방가르드한 사고방식과 클래식한 테크닉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왔다. 하지만 뎀나가 그곳에 지원했을 때는 마르지엘라가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랜드의 미래가 불투명했다. 뎀나는 어쨌든 그곳에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이에 대해 그는 <시스템> 매거진에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경제 학도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내 포트폴리오를 열어 보게 해야 한다. 어떻게든 들여다보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패션 회사에서 디자이너들이 보낸 포트폴리오를 아예 열어 보지도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포트폴리오의 패키지가 중요하다고 여긴 채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라는 피자 가게의 피자 박스에 포트폴리오를 담았어요. 당시 CEO 이름도 지오반니였거든요. 그러면 그들의 관심을 끌 테고, 열어 보면 피자가 아니라 다른 게 들어 있다는 걸 보고 놀라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래, 그렇게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죠.” 그의 독특한 전략은 진심으로 모든 걸 다 내건 간절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뎀나는 마르지엘라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마르지엘라의 유산을 이어가는 데 굉장한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경영진은 브랜드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옳은 것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당시 제게는 아무 힘이 없었기에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죠.”
2012년 뎀나는 디자이너로 루이 비통에 입사해 마크 제이콥스 아래 여성복 컬렉션을 디자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뎀나의 직속 상관이었던 줄리 드 리브랑(Julie de Libran)은 그를 재능 있고 성숙하며 엄청나게 내성적인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저를 통해 내놓곤 했어요. 마크 앞에 직접 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죠.” 뎀나는 그때를 회상하면 독일 은행에 다니는 것과 비슷하게 어떻게든 시간을 견디는 기분이었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제게 미적으로 썩 와닿지 않은 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그냥 일이 되어버렸죠. 아주아주 좋은 일이요.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돈을 잘 받고, 7시면 집에 오고, 휴가 때면 카프리에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요.” 기업형 패션 시스템에 대한 환멸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2014년 그는 저축해온 자금으로 자신의 브랜드 베트멍(프랑스어로 ‘옷’이라는 뜻)을 론칭했다. 베트멍은 디자인 공동체 형식으로 세웠다. 주요 멤버에는 동생이자 베트멍 CEO 역할을 한 구람, 러시아 출신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Lotta Volkova)가 있었지만, 뎀나가 창의적인 중추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자기 브랜드를 세운 그는 마침내 디자인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며 비틀고 손본 다음, 마르지엘라에서 선보이려고 했으나 환영받지 못한 해체적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자신만의 기준은 있었다. 공산주의, 소련 이후의 소비 지상주의, 동방정교회, 모조품 문화, 벼룩시장, 메탈, 힙합, 1990년대, 인터넷 등이었다. 트빌리시에서의 10대 시절, 그는 TV 뉴스 방송국의 기사 번역 일을 했다. 비행기들이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던 2001년 군에 징집된 그는 언어 능력 덕분에 생방송되는 보고서를 전달하는 보직을 맡고 있었다. “여러분이 소련 붕괴 후 국가에 살면서 그곳의 더럽고 부패한 정치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열일곱 살이라면, 그런 부분에 어느 정도 심취할 수밖에 없어요.” 그가 패션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작업 방향에 대해 설명하며 한 말이다. 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반영되지 않은 태도를 옷에 담고자 했다. 재킷의 어깨를 지나치게 튀어나오게 해 축 처진 듯한 무심한 반항아 같은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베트멍은 시작부터 반향을 일으켰다. “미리 손발이라도 맞춘 것처럼 남녀 할 것 없이 매장으로 달려가 베트멍을 입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베트멍이 주는 룩과 느낌에 완전히 빠져들어 충동적으로 옷을 사들였다.” 사라 무어(Sarah Mower)가 그런지한 느낌과 동유럽 할머니들의 커튼 느낌이 동시에 나는 뎀나의 소방관 풀오버와 플로럴 티 드레스에 대해 <보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2015년 베트멍은 자칭 “le plus mythique des Cruising Gay de France!(프랑스의 가장 전설적인 게이 클럽!)”이라고 홍보하는 파리의 나이트클럽 르 데포(Le Dépôt)에서 컬렉션을 발표하게 된다. 뎀나에 따르면 그곳은 예산 내에서 섭외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베뉴 중 하나였다. “약간 터부시하는 장소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패션계는 게이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는 업계일 거예요. 그런데 패션계에 몸담은 그 많은 사람이 수십 년간 드나들었을 이곳에서 패션쇼를 여는 게 왜 금기시돼야 하나요?” 쇼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곳의 화장실 방향제 냄새가 너무 세긴 했지만 일생에서 한번 경험해볼까 말까 한 패션쇼였다고 회상한다. “심지어 그 지역 택시 운전기사들까지도 쇼에 대해 알고 있더라고요.” 패션 관련 영화 제작자 루익 프리정(Loïc Prigent)이 내게 한 말이다. 뎀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왔어요. 평생 거부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살아온 저에게는 특히 중요한 순간이었죠.”
그다음 시즌 베트멍은 DHL 티셔츠를 공개했는데 그야말로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DHL 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티셔츠였다. 그것은 브랜드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음에도 여전히 상품 납품에 들어간 배송비를 지불할 수 있을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던 사업의 불안정한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 그의 텀블러(Tumblr) 글에서 시작된, 뎀나의 일기 같은 디자인이었다. 그 티셔츠는 출시되자마자 ‘자본주의적 키치’ 클래식으로 엄청난 환호를 받았는데, 특히 DHL 회장이 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DHL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후에는 더 유명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임>지는 이렇게 선언했다. “한때 별 볼 일 없었던 디자이너, 이제 파리에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1895년 스페인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헤타리아(Getaria)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파리의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의 말처럼 ‘거장 중의 거장’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성직자가 되거나 그의 아버지처럼 보트 선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스페인 내전으로 그의 사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프랑스로 망명한 난민이기도 했다. 세실 비튼은 그가 서민 출신인 것을 조롱하며 ‘내복 상인 딕 휘팅턴’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지만, 그의 비할 바 없는 세련됨을 인정하며 이렇게 썼다. “발렌시아가가 옷감을 다루는 것을 보면 대리석으로 조각하는 조각가 같다.” 크리스토발에 대해 알기 위해 그 주변인들이 남긴 평을 인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패션에 몸담은 50년 동안 단 한 번의 인터뷰도 허락하지 않았고 패션 외의 어떤 것에도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심오한 미적 세계만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소매는 발렌시아가가 집착한 부분이었다. 발렌시아가 하우스와 연이 닿았던 모든 사람은 라 망가(La Manga)에 울려 퍼지던 고뇌에 찬 그의 비명 소리와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 옷이 찢겨나가는 끔찍한 소리를 기억한다.” 그의 전기 작가 메리 블룸(Mary Blume)이 쓴 <The Master of Us All>의 한 대목이다. 코코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 중 유일하게 진정한 꾸뛰리에였다.”
발렌시아가 꾸뛰르 고객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탐미주의자들이었다. 다리를 드러내기 위해 앞쪽 헴라인을 높게 재단하는 방식을 좋아했던 폴린 드 로스차일드(Pauline de Rothschild), 특별히 목 부분의 옷깃을 뒤로 넘긴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담은 리넨 블라우스로 정원복까지 만들어주었던 레이첼 (버니) 멜론(Rachel (Bunny) Mellon)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배가 약간 나온’ 디자인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풍만한 몸매의 나이 든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 더 까다로운 손 기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진정 우아한 여성이라면 최신 유행을 좇아 이 브랜드 저 브랜드를 돌며 옷을 입기보다, 특정 의상 제작자와 신실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고 여겼기에 자신이 고객에게 정성을 쏟은 만큼 고객도 자신만을 찾아주길 바랐다. 조지 V 10번가에 있던 흰 벽으로 된 살롱은 아주 엄격하고 조심스러운 운영 방침을 따랐다. 여점원은 절대 고객에게 무언가를 ‘팔았다’고 말해서는 안 됐다. 대신 고객에게 ‘옷을 입혔다’든가, 옷을 ‘만들어주었다’고 해야 했다. 1950년대 스페인의 상류층 여성들은 발렌시아가 옷을 구입하기 위해 1년에 두 번 파리에 갔다. 당시 그 관행에 대해 이런 글이 남아 있다. “그들은 남편들이 암시장에서 면직물을 사고팔아 번 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렌시아가를 휘감고 귀국하는 사치를 부렸다.”
창의적 측면에서 발렌시아가는 급진적인 디자이너였다.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예쁜 옷을 만드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1950년부터는 여전히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정제되고 건축적인 형태를 구축해나갔다. 당시 디올 같은 디자이너들이 허리를 강조하는 것을 숭배하는 동안, 그는 몸과 의복 사이의 빈 공간에 집중하고,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통해 유럽 패션계를 완전히 뒤바꿨다. 그의 디자인이 너무도 추상적인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창조물을 일반적 수준에서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써서 묘사하곤 했다. 자루 같은 형태의 색 드레스(Sack Dress), 튤립 드레스, 봉투 드레스, 베이비 돌 드레스, 코쿤 코트, 메리 블룸이 “통통한 샤페이 강아지 피부 같다”고 묘사한 접히는 부분이 있는 멜론 슬리브 등으로 말이다(늘 그렇듯 크리스토발에게도 그의 패션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1951년 어느 잡지는 “골반이 턱 바로 아래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고, 오래된 느릅나무 둥치에서 잘라낸 것처럼 보이는 여자들”이라며 불평했다). 발렌시아가의 ‘Chou’ 랩은 그가 발명에 일조한 뻣뻣한 실크 직물인 검은 가자르 천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이 랩으로 사람의 얼굴을 서양 장미의 꽃잎이나 거대한 스크런치 헤어밴드처럼 감쌌다. 1967년에는 아이보리색 가자르 천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든 뒤 석탄 통처럼 생긴 모자를 함께 매치했다. 한 장의 타원형 직물을 비스듬히 재단해서 만든 이 웨딩드레스와 모자는 세상에서 만들어진 신부용 웨딩 앙상블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작품일 것이다.
1968년 5월에는 갑자기 아틀리에 문을 닫았다. 거리에서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기성복은 꾸뛰르의 전통을 위협했다. 이 소식에 발렌시아가 고객이었던 미국 사교계 명사 모나 본 비스마르크(Mona von Bismarck)는 카프리에서 3일간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독일의 대형 제약사에 매각되었고 이후 1980년대에 소유주들이 다시 의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훌륭한 디자이너를 영입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향수만 제조했다. 이 시기에 발렌시아가로 오게 된 디자이너에는 1990년대에 합류한 요세푸스 멜키오르 티미스터(Josephus Melchior Thimister)가 있다. 1997년 그들은 당시 발렌시아가 라이선스 아래 장례식 의복을 제작하는 일본 업체에서 일하던 25세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당시 P.P.R.로 불리던 케어링은 2001년 발렌시아가를 매수했다). 제스키에르는 수석 디자이너로 있던 15년 동안, 새장 같은 엉덩이 라인과 봉긋한 어깨선을 가진 네오프렌 소재의 스쿠버 드레스 등을 히트시키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독특한 형태와 혁신적 소재에 대한 전통을 되살리는 가운데 브랜드의 명성을 재건했다. 알렉산더 왕의 뒤를 이었으나 3년간 미온적 활동을 보인 뒤 2015년에 발렌시아가를 떠났다.
이후 패션계의 반항아 뎀나를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케어링이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재능을 바탕으로 디자이너를 임명한 것을 극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선택을 ‘위험한 것’이라거나, ‘뜻밖의 선택’이라고 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베트멍의 구부정한 애티튜드와 크리스토발의 엄격함을 결합한 그의 첫 쇼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그 쇼는 나오자마자 뭔가를 확 바꿔놓았어요. 모든 패션 에디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 걸 봤죠.” 루익 프리정의 말이다. 파리 장식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로 있었던 파멜라 골빈(Pamela Golbin) 같은 패션 전문가는 패션 대가와 독립적 디자이너 사이의 시대를 초월한 어떤 공감을 보았다고 말했다. “발렌시아가는 완벽의 형태를 상징하는 브랜드입니다. 뎀나가 순수와 위엄을 하우스에 다시 불어넣은 것 같아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일부 제자들은 고고한 사원에 천박한 망나니를 들여놓았다며 분개했다. 뎀나가 스트리트 웨어를 발렌시아가의 주류로 만들어버리자 그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사람들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서 못 본 척 조용히 있었는데, 이제 더는 참을 수 없군요.” 미국의 꾸뛰리에 랄프 루치(Ralph Rucci)가 2018년 인스타그램에 남긴 말이다. 그는 브랜드 리더십이 “비율에 대한 균형과 존중이 없고, 퀄리티도 없으며, 진실성도 없이, 그저 체육관 운동화나 티셔츠, 백팩이나 팔겠다는 저급한 욕심만 가득하다”며 불만을 표했다. 루치는 최근에 그가 뎀나에게 보낸 DM을 캡처해 올렸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결단코 당신은 이 하우스의 디렉터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운동화나 만들고 있는 주제에.” 운동화나 만들고 있는 주제라니!
CEO 샤비트에 따르면, 뎀나는 그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뜨 꾸뛰르를 다시 시작하자는 아이디어를 꺼냈고, 미신처럼 그 후 5년 동안은 이에 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5년이 지난 뒤, 뎀나는 그를 반대한 사람들이 하우스에 대한 신성 모독이라며 폄하했던 바로 그 운동화를 통해 패션 분야에서 가장 고차원적 표현 방식을 시도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꾸뛰르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노력과 값비싼 자재를 마련하기 위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꾸뛰르는 또한 다소 저급하고 밀레니얼적인 것으로 왜곡된 브랜드 이미지에 성숙한 품격을 더할 사업적 제안이기도 했다. 뎀나는 조지 V 10번가에 있는 오래된 살롱을 발렌시아가의 과거 영광이 빛나던 살롱처럼 복원해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는 그 살롱이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떠난 뒤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서 ‘고색 전문가’들을 고용해 벽에 세월의 흔적을 연출하고 카펫을 바래게 만들었다. 첫 꾸뛰르 컬렉션은 사람들의 모든 염려와 의심을 잠재웠지만, 뎀나에 대한 가장 완고한 회의론자들에게는 소용없었다. 그 불신은 유서 깊은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침묵이었다. 스키 파카 오페라 코트가 좁은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내는 고요했다. 하지만 제작에 3개월이 걸린 사다리꼴 새틴 티셔츠가 등장할 때와 스치면 피가 날 듯 뾰족한 모서리의 귤색 데이 수트에 과일 접시를 뒤집어놓은 것 같은 검은색 모자를 쓴 룩이 나왔을 때는 여기저기서 감탄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뎀나의 옷은 티셔츠 한 장을 만드는 데 무도회용 드레스를 만드는 데 준하는 정성과 기교를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샤비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뎀나는 사람들이 이전에 ‘이건 잘 팔려야 되는 것들이야’라고 할 법한 것들에 창의성과 혁신, 노력을 쏟아부었어요.”). 하지만 그런 정성과 기교를 보여주는 데 무대에 올릴 수 있는 티셔츠 개수의 한계 또한 존중했다. 전통적으로 꾸뛰르 쇼는 웨딩드레스로 끝난다. 뎀나는 엔딩을 위해 기발한 것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결국 1967년의 오벌 드레스를 복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더 나은 건 없을 것 같았어요.” 뎀나의 말이다.
뒤샹과 유사하게, 뎀나는 그가 ‘망막’ 패션이라고 부르는 눈으로 보기에만 좋은 옷을 만드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비평가들은 그의 디자인을 노골적으로 추하다고 말한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보통 시즌마다 한두 벌 정도, ‘와, 이건 너무 갔다. 완전 흉물스럽기 그지없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옷이 있어요.” 화가로 활동하는 모델 엘리자 더글러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며칠 지나 ‘맙소사, 이게 바로 그거구나’라고 깨닫게 되죠.” 최근에 그녀는 들창코처럼 생긴 광택 나는 클로그를 두고 이 과정을 겪었다고 말했다. 엄청나게 긴 부츠와 어깨가 뿔처럼 튀어나온 터틀넥은 아름다움은 낯선 비율에서 비롯된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관찰에 대한 극단적 해석이다. 저속함, 질 낮은 프린트, 모조품 티가 나는 디테일에 대한 애정은 시골 마을에 있는 시장 가판대를 연상시킨다. 패션 평론가 소피 퐁타넬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레퍼런스는 좀 남달라요. 하지만 그것들을 실제 디자인에 활용할 용기도 갖췄죠.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것에도 고상함과 세련미가 있다고 믿었어요.” 사람들이 추하다고 일컫는 것들은 종종 긴장을 야기했다. 입기 편안한 옷은 아름다움에 대한 근심을 유발했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옷은 외적 결함을 야기했다. “우리가 거의 고문하다시피 한 드레스가 있어요.” 디자인 팀이 사흘간 구멍을 뚫어 만든 섬세한 블랙 레이스 드레스에 대해 뎀나가 한 말이다. 그는 패션의 전례를 뒤집어 옷으로부터 고통을 받기보다 옷에 사디즘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목표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뎀나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거라면,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마 그게 저의 가장 큰 공포일 거예요.” 2021년 리스본대학의 어느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뎀나는 ‘밈을 패션에 불러들이는 것’의 시작이 된 인물이다. 가장 명확한 예는 자극적인 낚시성 가방일 것이다. 쓰레기봉투처럼 보이는 송아지 가죽 자루, 광택 나는 가죽으로 된 이케아 스타일의 캐리어, 네 가지 맛 버전(클래식, 리몬, 솔트 앤 비니거, 플레이밍 핫)으로 출시된 레이즈(Lay’s) 감자칩 봉지 같은 쭈글쭈글한 1,500달러짜리 클러치 같은 것들 말이다. 분석 회사인 런치메트릭스(Launchmetrics)는 그의 쓰레기봉투처럼 생긴 가방이 한 주에 200만 달러 상당의 ‘미디어 영향력 가치’를 창출해냈다고 밝혔다.
저 사람 정말 진심으로 저러는 걸까? 뎀나의 커리어 내내 사람들은 그가 진심 어린 괴짜인지, 교활한 냉소주의자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아티스트이자 비평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발렌시아가의 이 광고 기계를 ‘충격과 그 후에 이어지는 정상화의 다이내믹’을 사용해 제품을 홍보한다는 면에서 트럼프와 브렉시트 캠페인에 비유했다. 뎀나는 관심 경제에 능숙하게 대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그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의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항상 긍정적일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줄 아는 재주는 기프트 숍 화보 분위기가 고의적 선택이 아니었다는 그의 말을 다소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그 목적이 피해를 끼치기보다 관심을 끌려는 데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뎀나의 농담이 자신들을 향하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그는 모호함, 그 모호함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에 이끌리는 인물이라는 걸 파악했어요.” 뎀나는 이런 글을 남긴 적 있다. “몇몇 질문의 묘미는 그것에 항상 답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이한 행보 이면에 몹시 명확한 생각을 지녔다. 그는 문화적 위계질서를 도치하는 뒤샹의 전통에 따라 이케아 백을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그 가방은 1990년 마르지엘라의 프랑프리(Franprix) 비닐봉지로 만든 상의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가방은 그가 4년 동안 패션 스쿨에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갖고 다닐 때 쓴 봉지를 연상시키는, 그의 개인적인 역사를 담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 백을 이케아에서 훔쳐야만 얻을 수 있는 노란색 가방과 똑같은 노란색으로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아이러니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느껴본 적 없어요. 이런 걸 보고 기분 나빠 하는 대신, 그냥 웃어넘기고 ‘꽤 재미있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창작물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트리플 S 운동화에 대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좀 지겨워졌어요”라고 했으며, 스피드 삭스 슈즈에 대해서는 “이제 그걸 보면 좀 오그라드는 기분이에요”라고 했다. 파리에 머물던 어느 날엔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자신의 작업에 대해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열성 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영국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 중인 학생도 있었고, 다양한 일을 하는 미국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뎀나에 따르면 “그 누구보다 내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팬들 중 한 사람이 발렌시아가 로고가 반복적으로 새겨진, 몸에 딱 달라붙는 풍선껌 색상의 미니 드레스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물었어요. ‘정말 당신이 자발적으로 만든 건가요? 아니면 홍보 팀에서 만들라고 하던가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내가 물었다. “제가 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이걸 꼭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하죠.”
2021년 뎀나는 패션계의 무도회라 할 수 있는 멧 갈라에 킴 카다시안과 동행했다. 그는 레드 카펫을 걸은 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유명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데 부담감과 긴장감을 느꼈다. 당시 드레스 코드는 ‘미국의 독립’. 뎀나와 카다시안은 짝을 이루는 올 블랙 앙상블을 입고 얼굴에는 불투명한 검은색 마스크를 쓴 채 나타났다. 큰 낫만 들었다면 사신처럼 보이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너무 긴장해 겁날 정도였어요. 해결책으로 그런 룩을 한 거예요. 물론 제 옆에 있는 인물이 킴 카다시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복장엔 관념적 반전도 있었죠.” 최근까지도 그는 메르세데스-벤츠 기술자들과 함께 개발한 타원형 폴리우레탄 페이스 마스크를 쓴 상태로만 사진 찍히기를 고집했다(나 역시 조지 V 10번가에 있는 발렌시아가 살롱에서 이 마스크를 써본 적 있는데, 생각보다 가벼워 깜짝 놀랐다.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페이스 마스크에 6,500달러를 쓸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면 사서 썼을 것이다). 그가 얼굴을 가린 이유는 신체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특히 어느 컨퍼런스에서 ‘턱이 세 겹인 모습으로’ 찍힌 자기 사진을 본 뒤 더 그렇게 되었다. 나는 마스크를 쓰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이 더 집중될 거라고 말했다. 그는 “맞아요. 결과적으로는 그렇더군요”라고 인정했다. “제가 가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바라더라고요.” 그가 옅게 피식 웃어 보였다. “세상에, 기분이 묘하군요. 제 상담사와 굉장히 자주 나누는 주제거든요.”
“저는 절대로 실패할 거라고 여기지 않아요.” 취리히의 목재로 지은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크로넨할레(Kronenhalle)에서 자기가 늘 앉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뎀나가 말했다. 벽에는 마티스와 호안 미로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는 비건 치킨 요리와 뢰스티를 주문했다. 음료로는 레몬주스를 곁들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렌시아가 차림이었고, 귀에는 은색 볼 후프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고 스캔들로 인해 앞으로 창의성이 제한된 소극적 행보를 보일 건지 물었다. “다시 열정적으로 옷을 만들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어요.” 그가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려 자기 이름이 새겨진 문신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고민하는 딜레마는 옷에 집중하면서도 지나치게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으로 가지 않는 균형을 찾는 것이에요.” 그날은 흐리고 안개 낀 어느 월요일이었다. 점심을 먹기 전 우리는 함께 산책했다. 뎀나는 나와의 약속 장소를 그와 고메즈가 2017년에 결혼식을 올린 정원에서 멀지 않은 구리 첨탑이 있는 교회 프라우뮌스터(Fraumünster)로 정했다. “호그와트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가 내게 물었다. 뎀나 부부는 넷플릭스 스릴러 <Alice in Borderland>를 몰아 보며 지난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곧 제네바 근방의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사 갈 것에 대비해 짐을 싸는 중이었다. 뎀나는 좀 전까지 서류 작업을 위해 기관에서 일을 보고 왔는데 공무원이 이사하는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스위스식 독일어를 잘 못해서 소통이 좀 원활하지 않았어요.” 그가 기억했다. “실은 그게 이사하는 이유이기도 했죠.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런 점 때문에 이사를 가려는 것도 있어요. 저는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거든요.’” 우리가 취리히의 쇼핑 구역을 구경하는 동안, 뎀나의 푹 뒤집어쓴 후드와 클럽 키드 바지 차림이 몇몇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그와 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취리히 사람들은 특히 더 옷을 못 입는 것 같아요. 콕 집어서 뭐라 말하긴 어려운데, 꽤 그렇군요. 좀 놀랐어요.”).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날 뎀나의 옷이 크리스토발의 클래식한 실루엣인 것을 알아챘다. 맨투맨 상의 아래로 삐져나온 지나치게 긴 티셔츠가 베이비 돌 드레스 안에 받쳐 입는 옷처럼 볼륨을 더해준 것이다.
크로넨할레의 접시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보였다. 단조로운 상호가 새겨진 코발트색 테두리의 하얀 도자기 접시였다. 뎀나를 처음 만난 날, 우리가 마신 차가 이와 비슷한 식기에 담겨 나왔다. 다만 그 컵에는 ‘Balenciaga Hotels & Resorts’라고 적혀 있었다(물론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찻잔이 약간 거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농담을 담고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상품이어야 하나? 뎀나를 좀 더 잘 알게 된 지금, 이제 그것들이 애정을 바탕으로 한 풍자적 표현으로 보인다. 뎀나는 트러블 메이커인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인가?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사회적으로 수용된 역설이라는 불편하고 생각할 거리 가득한 세계에서 뛰노는 뎀나는 그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마스크 뒤에 숨던 시기’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 모든 밈, 시선을 사로잡는 현란한 쇼, 자신을 패션의 기본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꼬드겼던 ‘쉬우면서도 자극적인’ 모든 것에 작별을 고했다. “이케아 백 같은 건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이 편하게 느끼는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죠. 제 작업을 지켜봐주는 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뭘까요? 제 작업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그 사람들 말이에요. 또 다른 도발적 디자인일까요? 아니면 제 근본으로 돌아가서 매일 입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코트를 만드는 걸까요?” 이것은 필연적인 결론일까, 아니면 뎀나가 던지는 또 다른 답 없는 질문일까? (VK)
- 포토그래퍼
- Pari Dukovic
- 글
- Lauren Collins
- 헤어
- Olivier Lebrun
- 메이크업
- Ashleigh Ciucci
- 소품
- Eleonora S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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