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집은 어디인가
독립 후 20년간 열 번의 이사. 물적으로 심적으로 내 공간은 없었다. 드디어 지난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룸서비스 벨이 울렸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밤. 퇴사하고 한 달간 이탈리아 일주를 계획한 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한 여행을 이번 저녁으로 보상받을 거라 벼르고 있었다. 45리터 배낭에서 유일한 원피스를 꺼내 입고 피렌체에서 구입한 플랫 슈즈를 신었다. 그때만 해도 레스토랑 예약이나 미슐랭이 익숙하지 않던 나는 베네치아의 골목을 거닐면서 저녁 식사를 거행할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다. 거리 조명이 켜지자 레스토랑의 테라스는 둘, 셋 짝지은 사람들로 자리가 찼다. 가방을 앞으로 멘 관광객들이 앉은 테라스를 지나치며 나는 은밀한 맛집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중심가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때 오징어 배가 불을 밝히듯 골목 끝에서 노랗게 발광하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발이 부어오던 터라 이 정도면 운명이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대여섯 개의 테이블에 거의 혼자 온 손님들이었다. 그들은 벽을 응시하거나 무뚝뚝한 얼굴로 음식을 씹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미소를 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코팅된 책받침 같은 메뉴판에는 100여 개쯤 되는 음식이 이탈리아어, 중국어, 영어로 써 있었다. 내가 주문하자 직원은 주방에 중국어로 소리쳤다. 살면서 가장 맛없는 파스타를 먹었다. 다행인 것은 테이블 밑에 신발을 벗고 부은 발을 내놔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식당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음식은 그렇다 쳐도 기름에 전 듯 무거운 공기, 이탤리언부터 중식까지 갖가지 향신료가 섞인 기묘한 냄새, 군데군데 벗겨진 벽지와 카운터에 있는 마네키네코의 손짓까지. 애석하게도 식당을 나와 돌아갈 곳은 매일 삼겹살을 굽는 한인 게스트 하우스였다.
레스토랑 때문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에서 여행을 끝내는 것이 좀 억울해져 빈으로 넘어갔다. ‘이제 성당과 교회는 그만 보고 싶은’ 상태였지만, 마지막으로 빈 가운데 자리한 슈테판 대성당에 들렀다. 성당에 들어서자 12세기부터 역사를 간직한 고딕 건축양식에 완전히 매료됐다. 100m 넘게 치솟은 층고와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축복을 내리듯 비추는 햇빛, 조심스럽게 내뱉는 사람들의 감탄사까지 어우러져 공간에 압도됐다. 눈물이 났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인간이 미미하게 느껴져서인지, 내 맘 같지 않았던 여행에 지쳤는지 모르지만, 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김희애가 그곳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나만 그렇지 않구나 싶었다.
사람은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 이 자명한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외면했다. 아름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공간에 머물지 못하는 현실에 낙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학 입학 후 혼자 사는 20년간 열 번 이사했지만 뚜렷한 내 공간은 없었다. 드라마에서 옥탑방에 사는 주인공이 “저 많은 불빛 중에 내 한 몸 누일 곳이 없네”라고 한탄하는 장면을 보면서 같은 말을 해본 적 있다. 드라마의 옥탑방은 기이할 정도로 좋았다. 주인집이 올라오지 않아 마음대로 쓰는 옥상이 있고, 평상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술자리가 벌어졌다. 야경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시티 뷰에, 방은 소박하지만 귀여운 가구로 채워져 있다. 그곳은 친구의 옥탑방과 달리 덥거나 춥지 않았다.
독립하고 나의 첫 집은 반지하였다. 나는 사회학과인데 영문과 신입생과 함께 방을 썼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주인 아주머니가 임의로 룸메이트를 정해줬다. 반지하에는 벌레가 많았다. 한 달쯤 뒤엔 다리가 열 개 달린 돈벌레는 아무렇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방보다 지대가 높은 화장실이 나오는데, 그 집이 그랬다. 내게도 그 가족들처럼 ‘반지하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마 그랬을 거다. 장마철엔 행어에 걸린 옷이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질 정도였으니까. 친구는 택배를 받을 때면 B102호 대신에 102호라고 썼다. “좀 그래서”라고 말했다. 우린 1년 만에 그곳을 나와 각자 다른 원룸으로 떠났다.
세월이 가면서 집 구하는 조건이 조금씩 달라졌다. 반지하를 나올 때는 반지하가 아닌 곳, 그다음엔 학교에서 떨어져 있어서 술 취한 친구가 함부로 자러 오지 않는 곳,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는 곳, 상가 옥상처럼 보안에 취약하지 않은 곳, 저렴한 곳, 회사와 가까운 곳 등이었다. 나의 주거는 생존이 우선순위여서 그것이 충족되면 나머지는 쉽게 받아들였다. 내 집에 주인아저씨가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열쇠만 바꾸고 그곳에서 반년을 더 살았다. 그만한 가격에 투룸을 구할 수 없어서였다. 나의 집은 존엄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다. 집에 동화되지도 못했다. 동화는 집과 그 안의 물건에 애착이 생기고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간 집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을지 모른다.
사람에게는 주거 욕구가 있다. 공간 심리학자 바바라 페어팔(Barbara Perfahl)은 주거 욕구에 안전, 휴식, 공동체, 자기표현, 환경 구성, 심미성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최우선으로 하느냐에 따라 주거 공간이 달라지고, 원하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도 편하지 않다. 나는 안전과 휴식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나름대로 집을 꾸며보려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빠진 유행이 미니멀리즘이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곤도 마리에의 말을 따랐다. 옷장을 비웠고 잡다한 소품(예쁜 쓰레기)을 정리했다. 오래 써서 뒤틀린 합판 책장도 설레지 않아 버렸는데, 그 뒤로 방바닥에 뒹구는 책을 넣어둘 책장을 살지 말지 오래 망설였다. 그러다 북유럽풍(그때는 뭐든 심플한 나무 가구를 북유럽풍이라 불렀다) 책장을 주문했다. 가격에 맞춰 산 책장 역시 설레지 않아 문제였지만. 한때 발리풍에 빠져 산 라탄 바구니, 필립 스탁이 인기였던 시절에 을지로에 주문한 의자도 처분했다. 생각해보면 온전히 의지대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다. 내가 구입하고 내가 버렸지만 시대의 유행을 탔을 뿐이다. 물론 버리긴 잘했다. 이사 갈 때마다 ‘혼자 사는데 이렇게 많은 짐이 필요했단 말인가’ 놀랄 만큼 끝도 없이 물건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 미니멀리즘을 원했던가. ‘오늘의집’ 앱에서 비슷비슷한 우드 톤, 화이트 톤, 그레이 톤의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니, 이들도 이런 인테리어를 원했을까 의구심이 일었다.
나는 어떤 공간을 원할까. ‘영끌’해 마련한 아파트를 리모델링할 업자와 상담할 때 더 난처해졌다. 업자는 예산을 물어보고 그간 시행한 샘플을 몇 개 보여주었다. 내가 준비해간 파워포인트는 무시당했는데, 핀터레스트의 예쁜 사진을 붙였을 뿐이니 그럴 만하다. 결국 집이 넓어 보이고 가성비가 높은 화이트 & 그레이의 인테리어를 시공하기로 했다. 장판 두께부터 타일 색깔, 변기 모양까지 정할 것이 너무 많아 나는 “알아서 해주세요”에 이르렀다. 바쁘기도 했지만 정해진 기한과 예산 내에서 내 공간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기준 없는 내가 고집할 거리는 없었다.
지금 내 아파트는 주거의 다섯 가지 욕구 중 안전과 휴식을 준다. “집이 최고지”라며 베란다 너머 아파트 뷰를 보며 소파에 눕는다.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열어 공동체 욕구도 채운다. 자기표현, 환경 구성, 심미성은 점차 채울 거라 다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유행에 얽매이기는 싫어 함부로 뭘 사거나 꾸미지 않았다. 덕분에 1년째 책은 바닥에, 이케아 소파는 처음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지난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표표히 떠돌던 주거 욕구가 일었다. 이 기간 밀라노 시내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디자이너, 디자인 회사와 브랜드의 오픈 스튜디오와 전시로 활기찼다. 서울에서 일산 킨텍스 정도 거리에서 열리는 가구 박람회는 코엑스 열 배 정도 크기에 18개의 파빌리온이 세워진다. 바이어는 수많은 부스의 브로슈어를 챙기려 캐리어를 끌고, 관람객은 계획 없이 다녔다간 절반도 보지 못한다. 나 역시 아침부터 갔지만 파빌리온 5개를 봤을 뿐이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주는 엄청난 인풋을 소화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특히 밀라노의 오랜 빌라에서 열린 디모레 스튜디오(Dimore Studio)의 전시는 앨리스의 토끼 굴에 빠진 것 같았다. 디모레 스튜디오는 카펠리니(Capellini) 아트 디렉터였던 에밀리아노 살치(Emiliano Salci)와 그래픽 디자이너 브릿 모란(Britt Moran)이 2003년 밀라노에 설립한 건축 & 디자인 회사다. 전시장 내 의자는 고물상에 버려진 듯 놓여 있고 전위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다른 방에선 테이블과 소파, 장롱을 탑처럼 올렸고 오랜 빌라의 묵은 향이 나머지를 메웠다. 디모레 스튜디오를 수식할 때 쓰는 ‘과감하고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공간이었다. 엎어진 가구에서 오히려 그들이 얼마나 공간에 진심인지 느껴졌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여전히 1시간 넘게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의 긴 줄을 봤다. 이들 각자의 집은 크고 작고 낡고의 차이만 있지 확실한 ‘내 공간’일 것이다. 오래 떠돌고 돌아와 들어서면 내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는 집, 세상이 끊임없이 흔드는 가치관을 다시 세우는 신전, 몸과 마음을 채워서 전투에 나가게 돕는 동굴.
입국 후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서 천천히 집을 둘러봤다. 긴 외출 후엔 환기부터 했으나 그날은 집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맡았다. 당연하게 여긴 가구와 소품을 의식적으로 인식했다. 왜 냉장고를 여기에 뒀을까, 이 그림은 어디서 났지, 꼭 여기가 안방이어야 할까. 화가이자 건축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는 집은 제3의 피부라고 했다. 피부와 옷, 그다음의 보호막. 그것을 내 의지대로 갖추고 싶어졌다. 유행 인테리어를 따라 하지 않고, 어떤 집을 원하는지 고민한 후에. 예상치 못한 결론이 나도 좋겠다.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은 실내에도 나무가 자란다. 가지가 자라 발코니 창문을 뚫고 나오기도 한다. 내 집의 나무는 무엇이 될까. (VK)
- 사진
- COURTESY OF DIMORE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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