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간
서울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유고작 <별의 시간>(을유문화사, 2023)을 읽는다. 그녀의 책은 처음이다. 1920년 우크라이나 출생, 러시아 내전을 피해 가족과 브라질로 이주,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고 작가 되기를 소망, 스물세 살에 첫 장편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발표, “언어와 사고를 통해 가장 멀리까지 다다르고 싶다”고 선언, 그해 브라질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혀 그라샤 아랑냐상을 받음, <G.H.에 따른 수난>, <달걀과 닭> 등 다수의 작품 발표, <별의 시간>을 탈고한 뒤 쉰일곱 번째 생일을 앞두고 난소암으로 사망. 그녀에 관한 얼마간의 정보. 그보다 앞서 나는 그저 우연에 이끌려 <별의 시간>과 만났다.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세계에 진입하는 게 그를 이해하는 좋은 출발이 될 때가 있다. 이번이 꼭 그렇다. 나는 이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또 다른 책을 살펴보고 있다.
2시간이 채 못 되는 기차 이동의 시간이 고스란히 이 소설을 읽는 시간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기차가 속도를 줄여 서서히 도착지의 플랫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막바지에 이른 <별의 시간>은 점점 더 가속도가 붙더니 마침내 놀라운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 강조의 따옴표는 전혀 과도하지 않음을 밝힌다. 이 책을 읽는다면, ‘섬광처럼’이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폭발적인 순간이 ‘번쩍’ 하고 눈앞에 펼쳐지는데 수천 개의 카메라가 동시에 플래시를 터뜨리는 것만 같다. 일순간 시야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산화된다. ‘천각형의 별’(145쪽)이 쏟아지는 ‘별의 시간’이란 이런 상태가 아닐까.
책은 ‘저자 헌사’라는 다소 의아한 이름의 페이지에서 시작한다.
“나는 여기 이것을 지금은 슬프게도 유골로 남은 오래전의 슈만과 그의 사랑 클라라에게 바친다.
나는 이것을 혈기 왕성한 인간/남자*인 나의 피처럼 짙고 검붉은 진홍색에 바치며, 따라서 내 피에 바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것을 내 삶 속에 사는 땅의 요정들, 난쟁이들, 공기의 요정들, 정령들에게 바친다.
나는 이것을 내 가난했던 과거, 매사에 절도와 위엄이 있었으며 바닷가재를 먹어본 적이 없었던 시절의 기억에 바친다.
나는 이것을 베토벤의 폭풍에 바친다.
나는 이것을 바흐의 중성색이 진동하는 순간에 바친다.
나를 졸도시키는 쇼팽에게 바친다…
이들 모두가 나 자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내 내면의 어떤 영역에 먼저 도달했던 이들, 즉 내가 ‘나’로 터져 나올 때까지 나에 대해 예언해준 예언자들이다. 이 ‘나’는 당신들 모두이다… 이 이야기는 비상사태, 즉 재난 중에 벌어진다. 이 책은 미완성인데, 왜냐하면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누군가가 내게 그 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일까? 이 이야기는 약간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총천연색으로 진행되며, 맹세컨대, 내게도 그런 게 필요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아멘.“
‘*’로 표시한 부분의 편집자 주에 따르면, 포르투갈어 Homem은 ‘남자’ 또는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남자로 해석할 경우, 이 헌사는 곧이어 시작될 이야기의 작중 1인칭 화자이자 남성 작가인 호드리구가 쓴 것이 되며, 따라서 헌사는 소설의 일부로 편입된다. 반면에 인간으로 해석하면 본문보다 앞서 등장하는 헌사의 관례상, 이 헌사는 ‘진짜 작가’인 리스펙토르가 ‘소설 밖-현실 속’에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다 가능하다. 심지어 이 헌사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덧붙었다. “(이 헌사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작성함).” 리스펙토르가 자신이 헌사를 썼음을 굳이 밝혀두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이 헌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소설 안팎에 모두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는가. 헌사를 둘러싼 해석의 가능성이 여러 갈래인 것만큼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저자 헌사’에 이어 화자인 ‘나’, 호드리구 S. M.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쓰는 자이고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의 저자이다. “나는 질문들이 있고 답이 없는 한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17쪽) 그는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북동부 출신의 여자 마카베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올 것이다. 그는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런 연민이 없다고, 이 이야기가 냉정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쓰는 자로서 그의 입장이고, 글을 쓰는 그의 방식이며, 자신이 쓴 이야기에서 마카베아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얼마간 가늠하게 한다. 그는 마카베아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독자인 우리에게 끝없이 상기시킨다. 동시에 그는 독자인 우리를 계속 의식하고 우리에게 질문해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우리와의 거리를 인식하고 적절한 거리를 견지한다. 저자와 이야기 사이, 저자와 주인공 사이, 저자와 독자 사이, 호드리구라는 저자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는 저자 사이. 이 사이는 구멍이 숭숭 뚫린 공백이기도 하고, 이 사이는 넘치는 긴장의 회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놀랍게도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 가며 이음새 없이 넘나든다. 그리고 종국에 이르면 우리는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별의 시간’이란 생의 끝에서 마주하는 생각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전하고 거대한 정적임을.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순간 중에서도 순간이다.
“언어와 사고를 통해 가장 멀리까지 다다르고 싶다”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도착한 가장 먼 곳이다. <별의 시간>으로 나는 그곳까지 동행했다. 저자와 주인공이, 소설과 현실이 한 호흡으로 얽히고설키면서도 동시에 얼마간의 간극을 확보할 수 있음을 목격하는 일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정속의 기차 안에서 누린 격렬한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이제 책을 덮고 기차에서 내려야 한다. 세상은 아직 대낮의 햇살로 눈이 시리다.
- 포토
- 을유문화사,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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