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쇼는 계속된다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며 강수량 또한 매년 증가할 것이란 예측이 쏟아집니다.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수십만 달러의 자금이 들어간 패션쇼가 열리기 직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사실 야외에서 쇼를 선보이는 브랜드에 비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날이 맑기를 기도하는 기청제라도 지내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디자이너들의 바람과 달리,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쇼를 선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죠.
캐롤리나 헤레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웨스 고든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24 리조트 컬렉션을 앞두고 수시로 일기예보를 찾아봤는데요. 컬렉션 당일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쇼를 취소하고 실내 룩북 촬영을 진행하자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현지 모델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쇼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냈고, 그들의 열정에 감명받은 웨스 고든은 결국 예정대로 쇼를 강행하기로 결정하죠. 신발을 손에 들고, 미소와 함께 워킹을 이어간 모델들은 쏟아지는 비마저 즐기는 듯했습니다.
디올의 2024 크루즈 컬렉션이 열리던 5월 20일, 멕시코시티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디올은 여성 운동가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엘리나 차우베트(Elina Chauvet)와 함께 컬렉션을 완성했는데요. 그녀는 흰 드레스 위에 멕시코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여성 살해, 페미니시디오(Feminicidio)에 대한 메시지를 빨간 실로 수놓았습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추적추적 내린 비는 그들의 메시지에 엄숙한 분위기를 더했죠.
비에 개의치 않고 쇼를 이어간 두 브랜드와 달리, 질 샌더의 2023 S/S 컬렉션에는 우산이 등장했습니다. 런웨이에 오른 모델들 모두 젖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왼손에 같은 디자인의 검정 우산을 쥐고 있었죠. 미니멀리즘과 균일성을 강조하는 질 샌더다운 선택이었습니다.
9년 전, 2015 S/S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인 겐조의 런웨이에선 모델들이 아니라 프런트 로에 앉은 이들 대부분이 우산을 쓰고 있었죠. 당시 겐조를 이끌던 움베르토 레온과 캐롤 림이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여러 에디터와 바이어의 비닐우산은 미래적인 무대장치를 연상시켰습니다.
커비 장 레이몬드가 이끄는 피에르 모스의 첫 꾸뛰르 쇼가 예정된 2021년 7월 8일에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쳤는데요. 쇼가 2시간이나 지연되자 그는 수백 명의 관중에게 직접 마리화나를 나눠줬고, 결국 쇼를 이틀 뒤로 미루기로 결정한 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우중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든 디자이너가 비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기능성 의류의 방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비를 뿌려 베뉴를 물바다로 만들곤 하죠.
리 알렉산더 맥퀸은 그중 전자에 속합니다. 그는 1998 S/S 컬렉션에 ‘골든 샤워’라는 성적인 레퍼런스가 다분한 이름을 붙이려 했는데요. 브랜드를 후원하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반대에 부딪혀 쇼의 정식 제목을 ‘무제(Untitled)’로 바꾸지만, 쇼가 후반부에 다다르자 노란 조명을 깔고 베뉴에 비를 흩뿌립니다. 물에 젖은 모델들은 몸의 실루엣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마스카라가 번진 얼굴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죠.
지금도 노스페이스, 캐리모어(Karrimor) 등 아웃도어 브랜드와 협업하며 기능성 원단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준야 와타나베. 그의 2000 S/S 컬렉션 ‘기능과 실용성(Function and Practicality)’은 준야 와타나베 옷의 뛰어난 방수성을 소개하는 쇼케이스였죠. 나일론 소재의 드레스를 입고 헤드스카프를 두른 모델들은 인공 비를 뚫고 지나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기를 ‘툭툭’ 털어냈습니다. 쇼의 오프닝 모델 카트리나 밸프(Caitriona Balfe)는 2021년 <보그 US> 인터뷰에서 물방울이 튕겨 나가는 감촉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밝히기도 했죠. 1999년 10월 4일 월요일에 열린 쇼의 베뉴를 가득 채운 사운드트랙은? 카펜터스의 ‘Rainy Days and Mondays’였습니다.
‘기능성 원단’의 시조와 같은 버버리도 빼놓을 수 없죠.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이끌던 시절의 버버리는 나일론 원단의 탄탄함을 자랑하기 위해 인공 비를 뿌리는 걸로 쇼를 마무리하곤 했는데요. 브랜드의 150주년을 기념하는 2006 F/W는 물론 2012 F/W 컬렉션에서도 ‘컨페티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모델들은 일제히 버버리 체크가 프린트된 우산을 들고 런웨이를 걸었고요.
마이크로소프트의 날씨 예측 서비스는 올 7월과 8월,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것이란 예측을 내놓았는데요. 디자이너들뿐 아니라, 매일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비를 피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 장마철에는 비가 온다고 약속을 취소하는 대신, 패셔너블하게 비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질 샌더의 모델들처럼 그날 룩에 맞는 색깔의 우산을 들고 나가거나, 준야 와타나베의 모델들처럼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쿨하게 빗속을 걷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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