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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외투

2023.07.01

여름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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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에는 시(時)다. 그땐 감기에 걸리기도 쉬우니까, 그럼, 마음도 절로 팔랑대는 종잇장, 창백한 백지장이 되기 십상이니까. 그럴 땐 처방전 찾듯 시를 떠올린다. 지구가 아파서 이제는 환절기랄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나는 구식이라 절기부터 살핀다. 귀신같이 알고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부터 찾아온 무서운 손님. 소만, 망종, 하지를 거치며 내내 면역이라는 얼굴 없는 적과 싸웠다. 가능한 한 볕을 피하고 되도록 긴팔을 두르며 어떻게든 실내로, 그늘 쪽으로 파고든다. 때아닌 여름 외투를 갑옷처럼 두른 듯해 갑갑하고 울적했던 나는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김은지의 <여름 외투>(문학동네, 2023)를 펼친다. ‘갑자기 퇴직하고/갑자기 휴일을 보내면서//내가 쓰고 싶은 건/여름 외투/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어깨를 감싸주는/그런/시’ 표제시 ‘여름 외투’에 담긴 시인의 바람을 따르니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지는 않았구나 싶다. ‘실내’라고 하는 누군가의 안쪽이, 그 내부가 얼마나 시리고 스산할 수 있는지를 아는 시인은 여름 외투를 자처하고 나섰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하며 감정이입한 ‘여름 외투’와 시인이 쓰고자 하는 ‘여름 외투’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슬픔과 기쁨의 개인사라는 시를 봤을 때/나는 그것이/슬픔과 기쁨의 개 인사인 줄 알았지 (…) 시의 제목을 오독한 후 그 시가 더 좋아지고’(‘슬픔과 기쁨의 개 인사’)라는 문장에 전적으로 수긍하며 오히려 다른 ‘여름 외투’를 만나 잘됐다 싶다.

시인의 문장은 소박하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과 그 속에서 배운 것들과 최근의 관심을 꾸밈없이 속속들이 털어놓으며 그 세부에 깃든 위트와 미세한 힘을 나눌 줄 안다. 이를테면 일본어 공부를 하며 내다본 1월의 창밖 풍경은 이렇다. ‘1월의 카페에 트리가 있고/나는 트리 아래 빈 선물 상자들을 보면서//외워졌는지/외워지지 않았는지/무엇이든 떠오르는 생각들을 위한 시간을/충분히 가지려고//눈은 유키/내리다는 후루//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하얀 눈이 쌓이는 것을/조용히/충분히/외운다’(‘1월의 트리’) 환경에 관한 관심과 고민은 또 이렇게 표현된다. ‘나는 김을 먹고 싶고/김이 나는 바다가 깨끗해야 한다고 믿고/시간을 들여 하는 노력이/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일에 소용이 있기를 원하지만//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고/피자를 먹고/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고 나오는 새로운 쓰레기를/버리는 방법을 모른다’(‘위생 장갑―김을 좋아하고 몇 주째 김을 생각합니다’)

김은지 ‘여름 외투'(문학동네, 2023)

시인은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 속도로 가볼 생각이다.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물건을 다시 쓰는 일로 시인은 생태주의라는 말을 이해한다. ‘겨울에 한참 쓰던 모자를 보풀 때문에 내놓으려고 하다가/가위질을 시작했다/재밌다 (…) 주의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다니며/시간의 보풀을 제거하고/이 잘 만든 장갑을 계속 쓸 거다/잊어버리지만 않으면’(‘털모자의 보풀을 떼어내는 20분’) 시인은 토막 난 시간과 분절된 이미지는 접어두고 시간을 잇는 시도도 해볼 요량이다. ‘어제 읽은 책에서도/오늘 읽은 책에서도//우리에게 시간은 있지만/시간의 연속성을 분실하였으며/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작아졌다고//인스타그램을 잠깐만 하고/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스트레칭을 하면서/시간 연속성의 예시를 생각해본다’(‘예시와 호박’) 기다림이라는 호흡법을 아는 시인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뼈가 붙는다는 건/정말 신기한 일이야 (…) 궁금한 게 있으면 당장 답을 얻을 수 있고/연락을 기다리는 잠시가 고통인 요즘에//지금 여기는/뼈가 붙는 시간’(‘반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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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외로이 이고 지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던 나의 ‘여름 외투’가 다행히도 아주 많이 가벼워졌다. 의사 선생님 말씀, “긴 호흡으로 면역력을 키우세요.” 멀리 내다보기라고 생각하니 시인의 시선과도 이어지는 것 같다. ‘뼈가 붙는 시간이 있음을 기억하고, 긴 호흡으로 다가올 절기를 맞아야지.’ 다음은 ‘작은 더위’ 소서(小暑)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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