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필 화장품과 지속 가능성의 상관관계?
당신의 화장대 위에 안착한 리필 화장품. 과연 지속 가능한 뷰티의 미래일까?
“화장품 패키지의 95%는 폐기물로 처리됩니다. 재활용 비율은 너무 낮죠.” 영국 뷰티 위원회(British Beauty Council)가 공개한 수치는 다소 충격적이다. 코네티컷대학은 화장품 산업이 매년 1,200억 개 단위의 포장을 생산하고 그 가운데 70%가 매립지로 간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지속 가능성이 회자되기 시작한 지 수십 년, 이제 괄목할 만한 실천 행보가 보인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을까? 종이 라벨을 제거하거나, 생분해성 또는 재활용 플라스틱을 패키지에 사용하고 있지만 쓰레기의 절대적인 ‘양’을 줄이는 획기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바로 ‘리필 화장품’이다. 폐기물은 줄이고 재구매를 독려하는 이 제도는 친환경 브랜드를 시작으로 럭셔리 뷰티의 간판, 샤넬과 에르메스, 드리스 반 노튼 뷰티, 발렌티노 뷰티, 독일 스킨케어 전문 브랜드 아우구스티누스 바더(Augustinus Bader)와 111스킨, 지난해 스텔라 맥카트니가 공개한 스킨케어 브랜드 스텔라(Stella), 그리고 샬롯 틸버리, 이사마야 프렌치 등의 메이크업 브랜드가 동참하고 있다. 더바디샵을 비롯해 셀프리지스 백화점, 홀랜드앤바렛(Holland&Barrett) 같은 쇼핑 플랫폼은 매장 내 리필 스테이션을 운영 중이며 라 부쉬 루즈(La Bouche Rouge), 키예르 바이스(Kjaer Weis), 페이스 인 네이처(Faith in Nature) 같은 신생 브랜드는 탄생 초기부터 리필 제품을 비즈니스 모델로 구축했다. ‘예쁜 쓰레기’ 배출의 일등 공신이라는 뷰티 월드의 오명이 벗겨지는 시대는 이제 도래할까? 이쯤에서 리필 화장품의 현실을 짚어봐야 때라고 여겼다.
마케팅 리서치 기업 민텔(Mintel)은 리필 화장품에 대한 소비자 인식과 관심이 지리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전한다. 이 기업에 따르면 영국 소비자의 약 75% 이상이 리필 화장품에 대해 인식하고, 사용한 적 있거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 수치는 63%, 한국에서는 겨우 50%에 그친다. 가장 큰 문제는 소비자가 ‘리필 화장품’이라는 컨셉에 저항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특히 위생 문제에 까다로운 한반도에선 소비자가 직접 빈 용기를 적절히 세척해야 한다는 점이 진입 장벽이다. 화장품 폐기물의 가장 강력한 대안임에도 고체형 화장품이 일반화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이 외에도 편의성, 신제품 구매 욕구 등을 꼽을 수 있다고 민텔의 뷰티 & 퍼스널 케어 담당 글로벌 수석 애널리스트, 애나 켈러(Anna Keller)가 말한다. “리필 제품은 소비자가 몇 달 혹은 몇 년간 한 제품만 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제품을 시도하고 싶거나 아름다운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소비자는 아무래도 리필용 화장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죠.” 리필 가능한 화장품은 실상 브랜드 입장에서 제조와 마케팅에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바더의 공동 설립자이자 CEO 샤를 로시에(Charles Rosier)에 따르면 활성화된 스킨케어 제품의 경우 가장 큰 과제는 제조법과 성분의 안전성 보장이다. 그리하여 유리, 세라믹, 폴리프로필렌(PP) 수지 등으로 제작된 고가의 용기에 담긴 스킨케어 리필을 제공한다. 랑콤, 라프레리, 타타 하퍼(Tata Harper)의 경우 밀폐된 용기에 수분 크림을 담고 있는 리필 전용 패키지를 끼우는 형태로, 박테리아로 오염되지 않고 유효 성분이 유지되도록 고안했다. 즉 적어도 ‘제대로’ 만든 리필 화장품이라면 위생 면에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회의적인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리필 제품이 일회용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이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매립지로 향하는 쓰레기를 완전히 없애진 않습니다.” 민텔의 켈러가 말하는 것처럼 소비자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지 못한다면 결국 리필 제품이라는 카테고리가 늘어난 만큼 폐기량도 늘어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추측이지만 눈에 띄는 폐기물 절감을 위해서는 화장품 한 개당 50~100회 정도 리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수고를 들여 화장품을 리필하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경험이 민망해지는 대목이다. 뷰티 과학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이자 컨설팅 기업 디 에코 웰(The Eco Well)의 설립자 젠 노바코비치(Jen Novakovich)는 “리필 제품은 이론상으로 분명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뷰티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기에는 아직 초기 단계죠”라고 첨언한다.
2020년 론칭한 스킨케어 브랜드 메딕8(Medik8)의 지속 가능성 책임자 알렉스 플로리아(Alex Florea)는 <보그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리필 제품은 ‘펌프의 생명주기 연장’이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펌프의 위생만 철저히 관리해도 폐기물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매우 성가신 것도 사실이다. 리필 제품을 구매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용기 뚜껑을 연 다음 펌프에 오염 물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위생 처리한 뒤 다시 끼우고… 플로리아는 리필 화장품에서 결국 소비자를 향한 ‘교육’이 가장 중요하며, 현재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조언한다. “소비자가 이 방식을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기후변화는 서서히 우리 목을 조르고 있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스킨케어 라인에 99% 이상의 천연 유래 성분, 최첨단 재활용 리필 시스템을 내세운 스텔라 맥카트니 역시 어조는 다르지만 이에 동조한다. “우리는 까다롭고 양심적으로 화장품을 만들지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만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더 지속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느끼길 원해요.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문제에서 우린 모두 한배를 타고 있으니까요.” 스텔라는 리필 화장품의 사용, 지속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SNS를 통해 전파한다.
유니레버, 로레알, 아모레퍼시픽 등의 거대 뷰티 기업과 협력해온 뉴욕 소재 전략 컨설팅 기업, 스마트 디자인(Smart Design)의 파트너 컨설턴트 터커 포트(Tucker Fort)는 리필 화장품은 사람들이 새로 받아들여야 할 ‘행동 방식’이라고 짚으며, 소비자에게 추가 노력이 필요한 만큼 브랜드에서 지속 가능성 외에 다른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격의 이점. 소비자에게 동기부여책이 될 수 있도록 리필 제품을 정품보다 20~30%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방안은 실제로 대부분의 브랜드가 채택하고 있으며, 고객 충성도를 이끌어낸다. 1회 사용량만큼 제품을 소분해 판매하는 ‘모노도징(Mono-dosing)’ 역시 대안으로 떠오른다. 물론 포장재는 전부 자연에서 100% 분해되는 것이 필수 전제 조건. 과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럭셔리 스킨케어 브랜드 노블 패너시아(Noble Panacea)는 세럼의 일회 사용량을 바이오 플라스틱 소재 캡슐과 파우치에 담아 제공한다. 제품을 전부 소진하면 지구에 남는 폐기물은 ‘0’에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다.
입 아픈 이야기지만 지구는 건강하지 않다. 미미한 실현 가능성과 효과에도 수많은 대안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것은 결국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오늘날의 싸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모든 혁신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모두에게, 리필 화장품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이 이뤄진다면 폐기물량이 두드러지게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자신들만의 순환 철학으로 다양한 스킨케어 제품의 리필을 촉구하는 영국의 뷰티 키친(Beauty Kitchen), 맥주 캔을 연상시키는 알루미늄 패키지에 리필용 보디 워시를 선보이는 캔캔(KanKan) 같은 브랜드는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으며 새로운 뷰티 문화를 전파한다. 문화를 바꾸는 데는 그만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재고 부담, 예상보다 낮은 고객 충성도 때문에 당장의 지속 가능한 대책을 접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스마트 디자인의 터커 포트는 ‘인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네스프레소의 커피 캡슐 같은 혁신은 모멘텀을 얻어 성공적인 규모로 자리 잡는 데까지 7년이 걸렸다. “종종 브랜드에선 새로운 혁신에 흥미를 보이고 실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익숙한 제품으로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지 않죠.” (VK)
- 포토그래퍼
- 정우영
- 프롭
- 전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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