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아름다움 너머, 뱀의 세계
패션과 예술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패션 브랜드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기꺼이 예술을 수용했고, 예술가들의 철학을 존중해왔죠. 그런 점에서 오는 7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열리는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그 끝없는 이야기>가 불가리의 아이코닉 컬렉션인 세르펜티의 역사를 구구절절 나열하는 대신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패션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해석해서 보여주는 건 영민한 선택입니다. 이 자리에 초대한 6명의 여성 작가, 천경자, 니키 드 생 팔, 최욱경, 최재은, 홍승혜, 함경아의 작품은 각자의 작업 영역에서, 단순한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는 강인하고 대담하며 지혜로운 여성성을 은유합니다. 그렇게 뱀을 의미하는 ‘세르펜티’에 대한 단서가 미술 작품으로 드러나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전시를 여는 건 K1에 걸린 천경자의 ‘사군도 Tangled Snakes'(1969)의 몫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공적인 자리에 소개되어 미술 애호가들의 환대를 받고 있는 작품인데요. 뱀들이 서로 뒤엉켜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데, 허물을 벗고 환생하는 뱀을 통해 작가의 심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천경자라는 작가가 평생 경험한 고독과 슬픔, 고통과 분노, 희망과 바람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뜨거운 예술혼은 옆방에 놓인 니키 드 생 팔의 다양한 작품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납니다. 니키 드 생 팔은 브랜드의 뮤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가리가 사랑하는 프랑스의 여성 작가죠. 그녀 역시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유년 시절의 고통과 경험을 예술로 승화해왔는데요. 그런 그녀에게 뱀은 스스로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정체성을 찾고 성찰하도록 만든 중요한 모티브이고, 이는 다채로운 드로잉 및 조각에 담겼습니다.
K2로 자리를 옮겨볼까요. 한국 추상회화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현대 여성의 상징이 된 최욱경의 작업이 전시의 특별함을 배가합니다. 추상이 아닌 구상회화 작품은 우리가 알던 최욱경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특히 색색의 실로 나뭇가지를 감싼 ‘Tree Turns into Snake'(1985)는 보기 드문 조각 작품으로, 회화의 영역을 비약적으로 확장합니다. 최욱경의 생동감은 함께 놓인 함경아의 자수 회화로 고스란히 이어지는데요. 2008년부터 진행 중인 자수 회화 연작은 작가가 디지털로 만든 도안을 제3국을 통해 북한의 자수 노동자 및 공예가에게 보내고, 작업 후 우여곡절 끝에 회수해 완성한 작업입니다. 동시에 작품 속 단어, K-팝 가사 등을 통해 국경 너머에 사는 이들과 금기된 소통을 시도하는 개념 미술이기도 하죠. 실제 협업했지만 알 수도, 만날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 그 끝없는 삶의 이야기가 전시장 가득 공명합니다.
한국의 중견 작가 최재은과 홍승혜는 이번 전시를 위해 기꺼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냈습니다. 최재은은 무한한 시간과 이를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 즉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순환을 이야기해온 작가입니다. 동양 문화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는 뱀의 생명력은 공간을 고즈넉이 비추는, 황금 뱀이 그려진 조명 작품을 통해 펼쳐집니다. 또 우아하고도 신비로운 에너지가 공간을 영적으로 밝히며 보는 이를 명상의 순간으로 이끌죠. 한편 홍승혜 작가의 작업은 보다 활기찬 위트를 선사합니다. 세상 만물을 기하학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미술가답게, 홍승혜는 자신의 언어로 뱀이라는 존재를 해석하는데요. 프랑스 시인 쥘 르나르가 지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뱀, 너무 길다’라는 구절이 사프란색 카펫 위에서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신선하고 유쾌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불가리는 그리스 어느 작은 마을의 은세공업자 소티리오 불가리가 창립한 브랜드입니다. 브랜드의 현재를 이끈 뛰어난 세공 기술과 대담한 디자인의 바탕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대담한 상상력과 견고한 여성성에 대한 철학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지금 소개되고 있는 여성 작가들의 작업 세계와 방식이야말로 불가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무한한 상상의 여정, 그 실체 혹은 예시가 아닐까 합니다. 패션과 현대미술이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면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지, 이번 전시가 꽤 오래 회자되면서 증명할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무엇보다 세르펜티 컬렉션이든 미술 작품이든 이 자리가 아니면 좀처럼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여름 삼청동을 찾는 발걸음은 충분히 즐거울 겁니다.
- 사진
- 국제갤러리, 불가리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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