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재미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여자 축구의 세계
지름 22cm 공을 차는 건 인류의 본능이다. 박은선, 지소연, 이금민은 그 본능을 기꺼이 따른다. 고개를 숙인 적도, 발길을 멈춘 적도 없다. 휘슬은 울렸고, 이제 여자 축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시작된다.
압도적 진심, 박은선
오늘 촬영 현장에서 1990년대 가요가 나오니까 세 선수 모두 자동으로 몸이 반응하던데요.
1986년생이라 당시 노래를 여전히 많이 들어요(웃음). 경기장 라커 룸에서는 단체로 듣고 싶은 노래 틀어주는데 그때 신곡을 주로 듣고요. 요즘은 아이브가 가장 인기죠.
에너지를 올리는 박은선 선수만의 노래는 어떤 곡인가요.
경기 전에는 이영지의 ‘나는 이영지’를 주로 들어요. 앞으로 걸어나간다, 해낸다 그런 의미로 해석해 스스로 자신감을 불어넣는 노래예요. 평소에는 리쌍이나 다이나믹 듀오류의 음악을 좋아해요.
7월 호주/뉴질랜드 여자 축구 대회에 기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콜린 벨 감독은 박은선 선수를 두고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내비치기도 했는데요.
1분이든 10분이든 경기 시간이 주어진다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제가 키도 크고 몸도 좋기 때문에 경기장에 들어가면 그 순간 상대 팀이 동요해요. 그런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면 감독님이 원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03년, 2015년에 이어 세 번째 출전입니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라졌나요.
예전에 비해 여자 축구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국가 대표로 뽑히면서 사랑받고 있구나 느끼고 있어요. 선수이기 전에 저 역시 기대가 많이 돼요.
개인적으로 세운 목표가 있을까요.
16강에 진출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득점도 해보고 싶어요.
이번 국가 대표 팀은 어떤 강점이 있나요.
골고루 다 좋아요. 수비 쪽에서 혜리나 슬기, 선주, 서연이 모두 장점이 있거든요. 공격이나 미드 쪽도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지소연 선수와는 ‘영혼의 투 톱’으로 불리곤 합니다. 잠비아와 친선경기에서는 이금민 선수와 합작으로 결정적인 골을 터뜨리기도 했지요. 두 선수와 맞춘 호흡의 순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최근에 금민이 어시스트로 골을 많이 넣었어요. 웃긴 게 제가 헤딩하려고 할 때마다 금민이가 보였어요. 근데 또 금민이가 골을 기가 막히게 넣으니까 금민이 덕에 활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소연이는 옆에서 보면 리더십이 정말 뛰어나요. 그리고 늘 어디서든 연결해줄 수 있는 선수죠. 소연이는 제가 말 안 해도 다 아실 거예요.
혼자 하는 스포츠보다 축구가 아름다운 건 함께하며 생기는 연대감 때문입니다. 우정, 존경심 등 여러 감정이 흐를 듯하고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 애들이 먼저 다가와줘서 금방 적응했어요. 특히 잠비아전에서 골 넣었을 때 모두 달려와서 얼싸안고 좋아해줬거든요. 그때 그런 감정을 많이 느꼈어요. 제가 골을 넣었는데 저보다 더 좋아해주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래 지금도 축구를 하는 이유로 ‘재미있기 때문’을 꼽았습니다. 그 재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축구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할수록 늘기 때문이에요. 특히 성취감이 커요. 예를 들어 어릴 때는 리프팅 1,000개도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1,000개를 하면 결국 1만 개까지도 하게 돼요. 안 되던 것들도 연습하면 언젠가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늘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해요. 그리고 축구는 쾌감이 커요. 일단 골을 넣으면 그때 기분이 가장 좋죠.
어느 정도인가요. 상상도 안 됩니다(웃음).
골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우리가 지고 있는 와중에 경기가 끝나갈 때 골을 넣어서 비길 수도 있고, 비기는 와중에 마지막에 골을 넣어서 이길 수도 있어요. 최근에 우리 서울시청 팀이 지고 있었는데 제가 89분쯤 들어가서 골 넣고 바로 이겼거든요. 그때 엄청 기분 좋았죠. 아직 내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더 기뻐요.
지난 4월 잠비아와 친선경기에서 골을 넣으면서 36세 107일로 한국 여자 축구 최고령 득점 기록을 세웠습니다. 운동선수는 신체 나이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더 오래 현역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고 있나요.
올해 들어서 풀 경기를 자주 뛰었더니 오히려 체력이 더 좋아진 거 같아요(웃음). WK리그 자체가 화요일, 금요일에 주로 진행되어서 경기장에서 100% 쏟고 나오면 하루 이틀은 그냥 푹 쉬어요. 유산소 운동도 하지만 근력 운동도 많이 해요.
그동안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이나 경기로 무엇을 꼽고 싶나요.
딱 생각나는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처음으로 청소년 대표 팀에 뽑혔을 때. 결승전에서 중국과 만났는데 제가 해트트릭 해서 득점왕, MVP도 되고 우리가 우승했거든요. 그 경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최근이지만 다시 국가 대표 팀에 뽑혀서 골을 넣은 잠비아전도 인상적인 경기로 꼽고 싶어요.
나이키가 여자 축구 국가 대표 팀 전용 유니폼을 발표했습니다. 선수들 몸을 3D로 스캔하고 체형의 특징을 반영하는 등 여자 축구 선수들에게 최적화된 유니폼인데요. 실제로 착용해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기존 유니폼은 남자 체격에 맞췄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사이즈를 입어도 약간 컸어요. 이번에 잠비아전에서 처음 입었는데, 뛸 때 편했고 땀 흡수도 잘됐어요. 평소 딱 맞는 핏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유니폼은 달라요. 주변에서도 예전 유니폼보다 훨씬 예쁘다는 얘길 들었어요. 레드와 핑크 컬러 조합도 마음에 들고요.
유니폼에 변화가 필요했듯 스포츠에 장비, 환경 등 물리적 요소는 분명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동안 개선되길 바란 것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는 운동장도 많지 않았고, 장비도 개인이 준비해야 했어요.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죠. 그보다 사실 가장 힘든 건 경기에 나갔을 때 텅 빈 관중석이에요. 우리만의 리그인가 싶어지거든요. 일단 팀이 더 늘어야 해요. WK리그를 뛸 수 있는 선수가 한정적이거든요. 드래프트에서 떨어지면 꿈을 아예 접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편입해서 다음 해를 노리는 선수도 있지만 실업 팀도 못 와보고 은퇴하는 선수가 더 많아요. 팀이 더 많이 생기면 좋은 선수도 늘 거예요.
기회에 대한 얘기군요.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빛을 못 본 선수가 오히려 실업 팀에서 엄청난 기량을 발휘하는 경우를 봤어요. 그런데 그런 기회조차 없이 관두는 상황이 생기니 너무 아쉬워요.
나이키×마틴 로즈 컬렉션을 입고 화보를 촬영했는데,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여자 축구를 위해 디자인했다는 점에 자부심이 생겨요. 힘찬 에너지를 받았어요.
<골 때리는 그녀들> 등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축구의 재미에 눈을 뜨는 여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관심이 여자 축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나요.
예전에는 관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경기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홈경기 할 때 경기장이 꽉 찼어요. 그럴 때 확실히 높아진 관심을 체감해요. 7월 호주/뉴질랜드 여자 축구 대회에서 잘하면 팬들이 더 생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최선’을 소모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어요. 하지만 스포츠에서만큼은 통용되지 않는 정서일 겁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어쨌든 운동은 솔직해요. 결과가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스포츠의 일부죠. 최선을 다했을 때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와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 운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많이, 오래 했거든요. 밤 12시에 나가서 공 차기도 하고, 새벽 운동은 무조건 팀에서 했고요. 늘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어요.
축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도 있을까요.
축구를 하면서 엄청 위에도 올라가봤고, 완전히 바닥도 찍어봤어요. 힘든 적도 많았고, 즐거운 적도 많았어요. 희로애락을 많이 느꼈는데 인생 자체가 축구가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오래 했는데 아직도 축구가 좋은 걸 보면 축구 없이 인생을 논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인생에서 축구 외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아직 은퇴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껴요.
오늘의 전설, 지소연
인터뷰집 <너의 꿈이 될게>를 발간했습니다.
어릴 때 축구를 어떻게 시작했고, 힘든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일본, 영국, 한국에서의 경험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어요. 제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은 책이에요.
2015년, 2019년에 이은 세 번째 출전입니다. 첼시 FC 위민을 떠나 한국에 온 이유로 호주/뉴질랜드 여자 축구 대회를 꼽기도 했죠.
맞아요. 정말 큰마음 먹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선수들과 준비해보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언니들을 따라가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언니로서 팀을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예요. 선수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호흡도 맞출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아요.
황금 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활약 모두 기대되는데요. 후배들의 플레이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나이 있는 선수들은 경험이 많고, 밀레니얼 세대 선수들은 굉장히 당돌하고 패기가 있어요. 이런 점이 합쳐지면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때는 이타적인 플레이를 많이 했다면, 지금 선수들은 솔로 플레이를 잘해요. 예전보다 축구를 배울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하다 보니 확실히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요.
지소연 선수는 과거 도전적이고 저돌적인 플레이를 했다면, 지금은 팀 전체에 도움이 되도록 시야를 넓게 보는 전술을 구사합니다.
20대 초반에는 앞에서 섀도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찬스를 잡고 해결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공격형 미드필더지만 골에 많이 관여했고요. 지금은 골보다는 경기를 조율하고 골을 넣을 수 있게 어시스트 역할을 주로 하고 있어요. 수비도 하면서 경기를 운용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각각 재미가 다를 듯합니다.
최전방에서는 확실히 골 넣는 재미가 있죠. 미드필드에서 어시스트를 해주는 것도 굉장히 짜릿해요. 지금 수비형에서는 경기를 다 내다볼 수 있어요. 사방으로 공을 뿌려주는 역할인데, 뭔가 게임을 조종하는 느낌이에요.
더 오랫동안 현역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특별히 따로 하는 훈련은 없어요. 그래도 부상이 없어야 선수 생활을 길게 할 수 있잖아요. 운동 전에 부상 방지 운동을 항상 하고, 운동 후에 치료도 꼬박꼬박 받아요. 기본을 굉장히 잘 지키려고 해요. 식사도 경기 전후 잘 챙겨 먹고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게 최고 같아요.
운동은 타고난 체격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첼시 FC 위민에서 다양한 조건을 가진 선수들과 함께 뛰면서 지소연 선수만의 결론이 생겼을 듯한데요.
유럽 선수들은 신체 조건이 동양 선수들과 달라요. 체구가 크고 속도도 빠르고 힘도 좋아요.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플레이 스타일을 지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뛰어난 건 ‘빠른 판단’이더라고요. ‘몸싸움하기 전에 볼을 뿌려야겠다’, ‘드리블에 자신 있으니 박스 근처에 갔을 때는 과감하게 해야겠다’처럼 저만의 스타일로 해나갔어요. 9년 동안 영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저 같은 유형의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축구는 팀 스포츠로 선후배 관계가 특별하게 형성되는 듯 보여요.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봐왔으니 실제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했을지도 몰라요. 사실 후배들에게 가르쳐준다기보다는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웃음). 경기장 밖에서는 진짜 편하게 하고,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엄격하게 하거든요.
10년 전 인터뷰에서 “박은선 선수와 함께라면 세계 정복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지금은 또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언니가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좀 아깝죠. 은선 언니한테 “여자 축구가 훨씬 더 클 수 있었는데 책임은 언니한테도 있다. 어깨 무거우라고 하는 얘기다”라고 말해요. 그러면 잔소리 그만하라고 하죠(웃음). 언니한테는 이번이 마지막 출전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도와줄 좋은 선수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은선 언니와 시너지 효과가 많이 날 것 같아요.
이금민 선수에게는 어떤 점을 기대하고 있나요.
많이 아끼는 동생이에요.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한마디라도 더 하죠(웃음). 후배들과 영국 무대를 같이 경험함으로써 또 하나의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해요. 금민 선수가 영국에서 굉장히 잘하고 있고 대표 팀에서도 모범적인 선배가 되고 있어서 힘이 됩니다. 제가 대표 팀을 떠나면 금민 선수가 팀을 이끌어갈 만한 친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팀 스포츠의 재미를 못 느끼고 성장한 여성이 많습니다. 최근 여자 축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그런 과거에서 출발합니다. 운동은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고 이는 자신감으로도 이어집니다.
저는 행운아예요. 어릴 때부터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까요. 지금 축구 즐기는 여성들이 “이렇게 재밌는 걸 왜 몰랐지, 너무 억울해”, “어릴 때 축구 했으면 제2의 지소연이 나왔을 텐데”라고 하세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바뀌어서 너무 좋아요.
축구를 통해 깨달은 것도 있을까요.
축구를 하면서 예의범절이라든가, 여럿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다 배웠어요. 축구 안에 인생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과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여자 축구의 부흥을 위해 애쓰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었나요.
제가 어릴 때는 동경하면서 꿈을 키울 여자 축구 선수가 없었어요. 지금 그런 기회가 생긴 것만 해도 큰 변화예요.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건 정말 멋지잖아요. 그래서 여자 축구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고, 사랑받는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골 때리는 그녀들>을 통해 여자 축구에 관심이 높아져서 굉장히 뿌듯하고, PD님한테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생활체육이 좋아져도 엘리트 쪽에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죠. 연봉 인상 등 선수들의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여전히 바뀌어야 할 건 많지만, 조금씩 여자 축구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나이키가 여자 축구 국가 대표 팀을 위해 개발한 유니폼은 여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촘촘하게 반영했어요.
맞아요. 예전에는 남자 유니폼에서 사이즈만 달리했기 때문에 쇼츠를 입을 때 항상 불편했어요. 여자가 남자보다 골반이 넓으니까요. 이번 유니폼은 여성의 몸에 맞춰 디자인해서 훨씬 편안해요. 특히 생리 기간까지 신경 쓴 소재더라고요. 선수들 모두 만족하고 있어요.
나이키×마틴 로즈 컬렉션에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이었는데 되게 괜찮아요. 나중에 사복으로 다시 입어보고 싶습니다.
운동선수는 재능만큼 마음가짐도 중요해요. 경기란 승패가 나뉘기 마련이니까요. 관중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압박과 부담이 따르는 일인데, 멘탈 관리는 어떻게 해오고 있나요.
단순한 편이라 경기력이 좋지 못한 날에는 반성하고 빠르게 잊어버리는 편이에요. 실수를 빨리 털어내고 바로 다음을 준비해요. 계속 생각해도 도움이 안 되고 앞으로 뛰어야 할 경기는 많으니까요.
경기장 안에서 지소연과 밖에서 지소연은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요.
경기장 안의 지소연은 굉장히 자신에게 엄격하고, 경기장 밖의 지소연은 뭐든 괜찮습니다.
이 자리까지 달려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족도 있을 테고요. 저 자신, 제 목표도 원동력이 되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여자 축구에 대한 마음입니다.
호방한 재주꾼, 이금민
나이키×마틴 로즈 컬렉션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되게 품격 있는 느낌(웃음). 꾸미지 않았는데도 갖춰 입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차림으로 당장 나가서 서울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싶을 정도로 탐나더라고요. 평소에도 셔츠에 반바지는 즐겨 입는 스타일이에요.
여자 축구 국가 대표 팀을 위해 나이키가 내놓은 유니폼도 특별해요. 선수들의 움직임과 체형은 물론 그동안 겪은 고충을 반영했잖아요.
제가 입어보니 라인이 들어가서 진짜 움직이기 편해요. 일단 신축성이 좋아서 경기 뛸 때 유니폼 때문에 거슬리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끼거나, 돌아가지 않았고요.
7월 호주/뉴질랜드 여자 축구 대회의 막이 오릅니다.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개인적인 목표는 없다고 답해요. 그런데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는 되고 싶어요. 팀으로서는 16강을 넘어서 더 멀리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대회로 여자 축구 저변이 확대되어 아이들이 여자 축구에 큰 비전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사실 경기 성적 좋으면 반짝 관심이 생겼다가 시간 지나면 제자리인데, 이번에는 관심이 쭉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여자 축구에 대한 편견이 있다고 느끼나요.
아직도 여자 축구는 재미없다, 중학교 수준이라는 인식이 높죠. 반면 여자 축구의 매력을 알아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더 노력해서 더 나은 경기를 보여준다면 선입견도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요.
골을 넣으면 해보고 싶은 세리머니에 대해 묻고 싶었는데, 콜린 벨 감독님이 세리머니 금지령을 내렸다고요.
감독님이 세리머니에 트라우마가 있어요(웃음). 다 이긴 것처럼 좋아하니 정신이 해이해진다고 보세요. 이번 대회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축제니까 끝나고 나서는 충분히 즐기려고 해요.
선수들끼리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이 궁금해지는군요.
라커 룸에 모여서 노래 빵빵 틀어놓고, 그동안 자제하던 춤도 추죠. 그리고 숙소 들어가면 밥도 더 많이 먹습니다(웃음). “경기 때문에 관리했지만 끝났으니 회복하자” 하면서요. 수다 떨면서 다음 경기에 포커스를 맞추죠.
국가 대표 팀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요.
선수들 모두 한식을 좋아해요. 한식 나오면 엄청 먹어서 다음 날 바로 몸무게 늘고 감독님 엄청 화내시고요(웃음). 그래서 주방에 금지하는 메뉴도 있어요. 잡채에서 당면 빼라고 하시고요. 한식을 덜 먹으면 확실히 살이 빠집니다(웃음).
국내 여자 실업 축구 WK리그에서 활약하다가 2019년 맨체스터 시티로 진출했고, 현재는 브라이턴에서 뛰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일으킨 변화에 대해 듣고 싶어요.
우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배들이 해외에 더 많이 진출하려면 제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쪼 언니(조소현)나 소연 언니가 잘해놓았는데, 저도 언니들이 해온 일을 잘해내야죠. 그런데 영국 와서 부딪혀보니 벽이 엄청 높지는 않더라고요. 도전하면 우리 선수들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어요. 물론 새로운 곳에 적응이 정말 쉽지 않아요. 저도 1년 차에 경기도 못 뛰어봤어요. 그래도 적응 기간은 선수들한테 반드시 필요해요. 영국에서는 아주 잘하는 선수들이 계속 들어와요. 거기 맞춰서 계속 적응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빠르게 성장하죠. 더 많이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이룬 성과나 기록 중 가장 의미 있는 커리어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17세에 치른 경기를 잊을 순 없어요. 정말 역사적인 일이었죠. 앞으로는 올림픽에 나가는 최초의 순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처음 나가는 날이 오면 콜린 감독님이 화를 내시더라도 웃통 벗고 운동장 한 바퀴 돌 겁니다(웃음).
스트라이커로서 경기를 운영하는 모습이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해요. 무수한 순간이 있겠지만 최고의 ‘발맛’을 느낀 경험에 대해 들려주세요.
골을 넣을 때 항상 느낌이 있어요. ‘어우, 이거 골이다, 진짜 잘 맞겠다’ 하는 느낌. 그럴 때 더 자신감 있게 하고요. 그런데 사실 그런 발맛을 자주 느끼긴 힘들죠. 그래도 한 번씩 터질 때가 있어요. 하나 터지면 두 개 터지고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가 보여준 호날두의 골 장면 영상을 보고 축구 선수로 진로를 결심한 에피소드는 유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정말 따라 하고 싶었고 그러다가 진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졌어요. 그걸 본 이후로 호날두 자세만 따라 했어요. 드리블을 하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릎도 안 구부러졌어요(웃음). 그런데 따라 하던 시간이 나중에 엄청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어린아이들한테도 항상 얘기해요. 축구 경기 많이 보고 롤모델을 정해서 그 선수를 따라 하라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선수의 기술을 마스터하거든요.
여자 선수 중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나요.
항상 호날두였어요. 호날두 오빠가 늙으셔서 기량이 조금 떨어질 때부터는 네이마르로 갈아탔어요(웃음). 그렇게 계속 배우는 셈이에요.
축구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미있나요.
축구로 많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 축구로 좌절할 때도 있고, 슬픔이나 감동을 느낄 때도 있죠. 그리고 어릴 때부터 단체 생활을 하다 보니 동지애, 화합, 팀워크 등을 배울 수 있었어요. 축구로 배운 감정이 축구의 매력이고 최고의 즐거움 같아요.
운동선수는 재능과 노력 둘 다 필요한데, 타고난 지점, 노력으로 이룬 지점이 궁금해요.
공부 빼고 운동은 다 잘했어요. 체육에서는 무조건 1등이었어요. 선생님들이 육상 해라, 배드민턴 해라 그러면 선수 준비하고요(웃음). 그래도 축구 기술은 100% 노력이었어요. 원래 가진 건 하나도 없었어요.
승부욕이 강한 편인가요.
진짜 강해요. 어릴 때 지면 울고 막 싸웠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래요(웃음). 선수들은 다들 승부욕 장난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축구 할 때 아무래도 투지가 생기죠. 물론 승부욕만 가지고 안 될 때가 있지만, 승부욕이 있으면 성장하는 발판이 돼요. ‘다음엔 꼭 한번 이겨봐야지, 저 선수 한번 제쳐봐야지’ 이런 마음이 팀으로 작용하면 어마어마해지죠.
인생에 축구가 끼친 영향이 있을까요.
초등학교 때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축구하고 나서부터 외향적으로 바뀌었어요. 원래 내적인 ‘관종’이라 하고 싶어도 망설였는데, 하고 싶으면 하는 성격이 된 거죠. 눈치도 빨라졌고 사회생활 스킬도 늘었고요(웃음). 어릴 때 알던 분들은 지금의 저를 보면 놀라요. 왈가닥이 어른 됐다고요.
오늘 지소연, 박은선 선수와 함께 촬영했는데 어떤 존재인가요.
한 발 더 뛰고 싶게 만드는 언니들이에요. 팀을 위해 모든 면에서 한 발 더 떼려고 하거든요. 항상 언니들이 존경스러워요. 비유하자면 우리 관계는 축구 같아요. 축구로 만났지만 축구 하나로 많은 걸 느끼잖아요.
시기와 상관없이 매일 하는 운동이 있나요.
‘컨디셔닝’이라고 크로스핏과 비슷한데 그 훈련을 정말 자주 하고 되게 좋아해요.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제 몸에 가장 잘 맞더라고요.
유튜브나 SNS 등의 콘텐츠에 즐겁게 등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예능 좋아해요. 어떤 콘텐츠든 불러주시면 감사하죠(웃음). 언젠가 유튜브를 시작하면 먹방 위주로 하겠다고 얘기해왔어요(웃음). 여자 축구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떤 콘텐츠든 하고 싶어요.
축구 선수로서 이금민 선수의 꿈은 어디까지인가요.
영국에서 챔스권(챔피언스 리그) 3위 안에 들어보고 싶어요. 인간 이금민으로서는 발롱도르까진 바라지 않지만 올해의 선수상은 한번 받아보고 싶어요.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이금민 선수가 정의하는 축구란.
진부한 답일 수 있지만 축구는 삶이죠. 나중에도 축구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거예요. 아이들도 가르치고 싶고, 행정 쪽 일을 해도 좋아요. 늙어서도 저는 계속 뛰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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