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복계의 ‘바비’, 오펜하이머코어
<바비>와 <오펜하이머>는 ‘바벤하이머’라는 밈을 생산할 만큼 대조적인 스타일로 박스 오피스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패션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비>는 개봉 전부터 일찌감치 ‘바비코어’ 열풍을 일으키며 여성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사에서 공격적인 패션 마케팅을 펼친 덕이기도 하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패션과는 거리가 먼 영화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보다 3주 먼저 공개된 외국에서는 남성복계의 <바비>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미국 <보그>는 “바비코어는 잊어라. 오펜하이머코어가 우리 시대 트렌드다”라는 칼럼을 온라인에 게재했다. 칼럼은 “이 영화가 다음 시즌 남성복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전망으로 끝맺는다. 영국 <GQ>도 “<오펜하이머>의 수트는 이 영화를 수년간 가장 큰 맨스 웨어 무비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Vox>는 의상 디자이너 엘렌 미로즈닉의 코멘터리를 실으면서 오펜하이머코어가 남성복에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최근 더 로우의 루스 핏 팬츠 수트를 입고 나타난 제니퍼 로렌스의 경우처럼 이 트렌드가 여성복에도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관한 전기 영화다. 정치, 이데올로기, 과학의 상관관계,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죄책감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주인공의 심리가 화려하게 묘사된다. 그렇다. 이 영화는 화려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다크 나이트>, <인셉션>, <덩케르크> 같은 대형 리얼 액션을 기대하는 관객은 그가 이번 영화에서 진짜 폭탄으로 버섯구름을 찍어냈다는 얘기에 다른 종류의 화려함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액션이 전혀 없는 정통 드라마다. 그럼에도 아이맥스 장기 상영을 위해 상영관별 스크린쿼터가 있는 한국에서만 개봉을 늦췄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만큼 충분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완벽하게 디자인한 배경과 구조적 미학이 담긴 앵글, 감각적인 몽타주, 시종 긴장을 자아내는 사운드, 작은 배역도 마다하지 않는 오스카 레벨의 배우들이 러닝타임 3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기에 의상도 한몫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트맨> 시리즈, <인셉션> <테넷> 등에서 이미 주인공들에게 멋진 수트를 입혔다. 그 자신도 촬영장에 셔츠와 재킷을 입고 나타나는 수트맨이다. 이번에는 <월 스트리트>와 <브리저튼>을 통해 남성복과 시대극 양쪽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의상 디자이너 엘렌 미로즈닉이 합류했다. 그들은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 재직 중이던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를 연구했다. 그들이 발견한 키워드는 ‘실루엣’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수트에 푸른 셔츠를 주로 착용했으며, 수십 년간 거의 같은 실루엣을 추구했다. 영화의 원작으로 활용된 오펜하이머 전기는 그의 아버지가 남성복 업계 종사자였고 ‘뉴욕에서 직물을 가장 잘 아는 남자’로 통했다고 전한다. 그러니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옷 입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을 것이다. 극 중 오펜하이머의 수트는 요즘 기준으로는 몸에 비해 크다. 그렇다고 1980~1990년대처럼 과장된 실루엣은 아니다. 타이는 짧고 허리선은 높다. 재킷은 길다. 실용적이면서도 격식 있고 스타일리시하다. 그것이 오펜하이머가 전쟁 종식이라는 대의에 몰두해 패션에는 개의치 않는 사람, 하지만 본능적으로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정치가들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담당할 과학자로 그를 선택한 이유, 그를 정치꾼으로 보는 다른 과학자들의 시선도 배척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으로 설득이 된다. 그리고 어김없이 모자가 등장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의 열렬한 팬이다. <배트맨 비긴즈>부터 <오펜하이머>까지 연출작 여섯 편에 그를 출연시켰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머피가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놀란이 직접 카메라를 잡기도 했다. <인셉션> 때는 킬리언 머피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원하는 배역을 고르라고 했다. 머피가 로버트 피셔를 택하자 놀란 감독이 잘 어울린다고 기뻐했다는데, 팬들은 이를 두고 “머피가 여주인공을 맡겠다고 해도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놀란은 특히 킬리언 머피의 차갑고 신비로운 푸른 눈을 자주 강조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그 눈을 보여주기 위해 “기회가 올 때마다 계속 그의 안경을 벗겨내려고 시도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인셉션>에서는 머피에게 복면을 씌워서 그것이 벗겨지는 순간 시선이 환기되는 효과를 즐겼다. <덩케르크> 캐스팅 전화를 받은 머피가 “이번에도 내가 머리에 뭘 써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덩케르크>에서 복면 대신 헬멧을 썼다. <오펜하이머>에서는 전 세계를 뒤져 까다롭게 찾아낸 중절모가 복면과 헬멧을 대신한다.
극 중 킬리언 머피는 포크파이(크라운이 평평하고 꼭대기가 움푹 들어간 모자) 스타일에 챙이 넓은 회색빛 펠트 모자를 쓰고 나온다. <버라이어티> 인터뷰에 따르면 엘렌 미로즈닉은 이 모자를 찾기 위해 갖은 시도를 했다. 뉴욕, 이탈리아, 스페인을 뒤지고 직접 제작도 해보았지만 무엇도 완벽하지 않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들이 ‘100%의 모자’를 찾아낸 건 LA였다. 1989년부터 할리우드에 소품을 공급해온 바론(Baron Hats)이 그것을 갖고 있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비롯해 많은 출연진이 모자를 쓰고 나온 1890년대 배경의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에도 바론이 협찬했다. 서부 개척 시대 남자들의 모자 사랑은 <오펜하이머>가 그리는 1920~196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니 <오펜하이머>에도 더 많은 모자가 나왔어야 맞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완벽한 고증보다 주인공이 주목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맷 데이먼이 군용 모자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챙이 작은 중절모를 쓰기도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모자처럼 존재감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로써 킬리언 머피에게 오롯이 시선이 집중된다.
모자는 여러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인다. 극 중 오펜하이머가 기자들로 가득 찬 복도를 걸어 나오며 모자를 쓰는 장면은 뮤직비디오처럼 스타일리시하다. 앞서 언급한 <Vox> 인터뷰에서 엘렌 미로즈닉도 이 장면의 오펜하이머가 록 스타처럼 보인다는 점을 인정했다. 미로즈닉은 이 영화의 패션이 젊은 관객도 유혹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원자폭탄 개발 팀이 사막 한가운데인 로스앨러모스에 기지를 차린 후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에는 변화가 생긴다. 더운 곳인 만큼 조끼는 사라지고, 어두운 수트 대신 모래색에 잘 어우러지는 황갈색 재킷을 착용한다. 챙 넓은 모자는 그 순간 그를 서부 시대 보안관처럼 보이게 만든다. 오펜하이머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엔딩에서 모자는 킬리언 머피의 깊고 강렬한 눈을 강조하는 마스킹 역할을 한다.
킬리언 머피 외에도 <오펜하이머>에는 스리피스 수트 차림의 남자들이 잔뜩 등장한다. 천연 직물의 도톰하고 부드러운 질감, 느슨한 실루엣, 검정, 회색, 남색, 갈색 등의 짙고 차분한 색감이 우아하다. 요즘의 날렵하고 차가운 수트보다 훨씬 신뢰가 가는 복식이다. 정장 자체가 일상복이 아닌 시대라서 오펜하이머코어를 바비코어처럼 거리에서 체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실루엣만은 주목할 만하다.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여성복은 볼 게 거의 없다. <오펜하이머>는 플로렌스 퓨와 에밀리 블런트를 캐스팅하고도 그들에게 연기할 거리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 하지만 젠더리스 룩을 선호하는 여성 관객이라면 <오펜하이머>에서도 <바비> 못지않게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 한국 개봉은 8월 1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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